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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39)화 (139/180)

139화

에릭은 성에서 주로 연락책을 담당하는 기사가 말에서 바삐 내리는 모습을 본 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끝마쳤다. 얼마나 급히 달려온 건지 말이 투레질하자 희뿌연 김이 가득 피어올랐다.

“무슨 일이지?”

에릭의 물음에 기사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 채 답했다.

“벨라 아가씨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이 일이 공작의 귀에 들어가면 후에 벌어질 일이야 뻔하기에 마치 자수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에릭은 모르는 척 눈가를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새벽에 이안 에드레이즈가 아가씨를 데리고 성을 빠져나간 듯싶습니다.”

“지키고 있던 놈들이 있었을 텐데.”

그녀가 사라졌다는 말은 제법 쉽게 뱉었지만, 차마 신임 기사에게 당했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우물쭈물하던 기사가 뻔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에드레이즈의 실력이 생각보다…….”

에릭이 바람 빠지듯 픽 하고 웃는 소리에 기사의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길을 열어 주긴 했지만 성에 가서 그녀를 빼내 오는 건 오로지 이안의 몫이었다. 솔직히 반신반의했었다.

그 정도도 헤쳐 내지 못할 실력이라면 애초에 아가씨를 지킬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새파란 놈이 의외로 쓸 만하지 않은가.

에릭은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기사를 바라보는 눈빛은 서릿발처럼 냉랭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대충 들어야 할 말은 들었으니 이제 남은 일은 하나뿐이었다.

“주인님께는 내가 보고할 테니 가서 숨 좀 돌리고 있어.”

에릭은 짧게 심호흡을 하고선 그의 막사로 들어갔다.

그는 도수가 상당한 술을 연거푸 들이부으면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전쟁 중엔 금주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그에겐 딱히 해당하지 않는 사항이었다.

에릭이 들어오자마자 그가 술잔을 내려놓는 동시에 짧은 물음이 던져졌다.

“이안 에드레이즈는.”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내가 너무 어려운 걸 지시했나. 그깟 애새끼 하나 잡는 게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이야?”

무엇보다 간단한 일이었지만, 쉽게 풀지 못하도록 꼬아 놓은 장본인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에드레이즈가 어디로 향했는지는 알아냈습니다.”

벨리아르는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워 넣으며 조용히 입매를 늘였다.

“에릭, 그건 나도 알아. 파릇한 애새끼 머릿속이야 뻔하지.”

“…….”

당연히 베른으로 향했겠지. 갈 길이 뻔한데 기사 여럿이서 애 하나 잡지 못하고 이토록 시간을 허비한다는 것이 그로서는 절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벨리아르는 술을 한 모금 넘기며 가늘어진 눈매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에릭을 응시했다.

“하려던 말, 계속해야지.”

에릭은 검을 들고 있는 손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여태껏 뻔뻔하게 굴어 놓고, 막상 벨라의 도망 소식을 전하려니 풀칠이라도 한 듯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올릴지 어느 정도 눈치챘을 것이다.

그 매서운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 내고 있으려니 아무리 에릭이라도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에릭은 결국,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러 가지 속죄의 뜻이 담긴 행동이었다.

“……에드레이즈가 아가씨를 데리고 성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벨라가 도망갔다. 에드레이즈가 벨라를 데리고 갔다. 같은 말이었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에릭은 최대한 그의 분노가 벨라가 아니라 이안을 향하길 바랐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술잔을 기울이며 검지로 톡톡 건드렸다.

“벨라가, 성에 없다고.”

“……예.”

그의 입매가 비스듬히 휘어졌다. 조용한 미소에 막사 안의 공기가 한층 무겁게 가라앉았다.

“도망을 갔다는 말이지. 그 새끼 손을 잡고.”

나긋한 중얼거림에 에릭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결국, 에릭의 노력이 무색하게 벨라는 도망간 것이 되어 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벨라뿐이라 생각의 흐름도 그러했다.

* * *

전쟁터를 코앞에 둔 채 그가 기사의 반을 이끌고 베른으로 되돌아갔다.

공작가의 기사단 외에도 수많은 병사와 기사가 있으니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일은 아니겠지만, 미미한 영향은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에겐 지금 전쟁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무엇도 돌아보지 않고 그녀가 지내던 동쪽 건물로 걸음 했다. 방문을 벌컥 열자, 휑한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까지 누군가 누워 있었던 것처럼 흐트러진 침대 위의 이불, 강제로 끊긴 사슬과 그 옆에 널브러진 도끼가 차례대로 그의 눈에 담겼다.

이 방에 있어야 할 것은 단 하나였다. 이딴 흔적들이 아니라.

그녀의 잔상을 좇아 가만히 침대를 응시하던 그의 눈빛이 점점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에릭은 뒤늦게 들어와 벨라가 지내던 방을 처음 보았다. 빛 하나 들지 않는 방에서 그녀의 상태가 어땠을지 미루어 짐작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주인님, 하르트만이 직접 뵙고 전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나중에.”

“아가씨와 관련된 일이랍니다.”

그 말에 곧바로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응접실에 자리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가셔서…….”

에릭이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문을 벗어나고 있었다. 에릭은 다시 한번 방 안을 짧게 훑어보곤 숨을 내쉬며 그의 뒤를 따랐다.

하르트만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내며 응접실 안을 슬쩍 살폈다. 처음 방문하는 것도 아닌데, 올 때마다 도통 적응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던 중, 예고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순간 당황한 하르트만이 얼른 몸을 일으켜 허리를 숙일 무렵, 그가 맞은편에 앉아 짧게 지시했다.

“말해.”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빠르게 상황이 흘러갔다. 찰나의 순간이 침묵으로 채워질 때마다 그의 눈매에 매서운 기세가 더해졌다.

하르트만은 곧장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상자를 그의 앞으로 열어 보였다.

“아가씨께서 제게 이것을 팔고 가셨습니다.”

반지를 보자마자 그의 표정이 더욱 가라앉았다. 그는 반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직이 말했다.

“더 자세히 말해 봐.”

“이 반지를 팔고 싶다고 찾아오셨길래 공작님께서 처음에 지불하셨던 금액의 반을 불렀습니다. 좀 이상해서 반응을 살펴보려고 부른 금액인데, 너무 바로 수락을 하셔서…….”

하르트만은 그녀가 찾아왔던 날을 떠올리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을 최대한 말을 듣고 있던 벨리아르는 끝내 와락 인상을 구겼다.

“지금 그깟 금액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쓸모 있는 정보만 추려서 똑바로 얘기해.”

지금은 그런 구구절절한 이야기까지 모두 들어 줄 만큼 마음이 너그럽지 못했다. 하르트만은 허둥지둥 다시 기억 속에서 핵심적인 말을 뽑아냈다.

“……그, 돈이 필요하다고 얘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아, 그날 꼭 소만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말도 들었고요.”

“소만?”

“예, 분명 소만이라고 했습니다. 옆의 기사와 나누는 대화를 제가 똑똑히 들었습니다.”

소만…….

그는 익숙한 나라의 이름을 곱씹으며 나직한 숨을 얹었다. 이어 주인 잃은 반지를 조용히 그러쥐었다.

“이건 내가 원래 가격의 두 배를 주고 다시 사지.”

“예? 하, 하지만…….”

“왜. 뭐 문제 있나? 금액이 마음에 안 들어?”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애초에 다시 팔려고 갖고 온 것이 아니었기에 하르트만은 적잖이 당황했다.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되레 돈을 지불하고 사겠다니.

이 돈을 덥석 받아도 되나 싶어 고민하는 사이, 벨리아르는 반지를 손안에서 굴리며 날카롭게 지시했다.

“할 말 끝났으면 괜한 시간 뺏지 말고 나가.”

더 이상 주어진 시간은 없었다.

“가, 감사합니다, 공작님.”

하르트만이 나가자마자 그는 에릭에게 다가오라 손짓했다.

“지금 닐이 어디에 있지?”

닐은 소만에서 대륙 각지의 정보를 사고파는 가장 규모가 큰 정보상이었다. 밀수나 밀입국에 깊이 관련되어 있기도 하고, 그가 정기적으로 들르는 소만의 노예 시장을 총괄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한 달 전부터 베른에서 머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만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으니, 아직 베른에 있을 겁니다.”

“지금 당장 만나야겠으니 연락해.”

“예. 최대한 빨리 성으로 불러들이겠습니다.”

“직접 갈 테니까 위치만 보고해.”

이번에도 에릭이 대답하기 전에 그는 몸을 일으켰다. 에릭의 생각보다 그는 훨씬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젠 에릭도 벨라와 이안이 어디쯤 갔을지 예측하지 못하는 시점에 다다랐다.

닐은 다시 한번 명부를 살피며 확신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밀입국하려면 혼자서는 절대 불가능하고, 저를 거치지 않는 브로커는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명부로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소만으로 넘어갔을 확률은 희박합니다.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죠.”

단 한 번의 실수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그의 성정을 뻔히 알기에 닐의 눈은 더욱 바삐 움직였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나? 만약 잘못된 정보로 이 일에 차질이 생긴다면 곱게 죽을 순 없을 거다.”

“……예. 확실합니다. ‘벨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는 소만으로 넘어온 흔적이 없습니다. 말씀해 주신 인상착의로도 알아보았지만,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는 얘기도 없었습니다.”

확답을 받자마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으레 주고받는 형식적인 인사도 내던질 만큼, 찰나의 시간도 헛되이 날리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앞으로 밀입국자에 관련된 정보를 더 철저히 수집하도록. 이후에 조금이라도 비슷한 사람을 발견한다면 언제든 상관없으니 최우선으로 보고하도록 해.”

“예! 맡겨만 주십시오.”

닐의 충실한 대답을 뒤로한 채 밖으로 나온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해서 나온 결과는…….

벨라가 일부러 반지를 팔고 거짓된 정보를 흘렸다는 것.

반지를 팔았으니 노잣돈으로 쓸 돈은 충분히 마련했을 테고, 잠시나마 제 발을 묶어 두었다. 요령 있게 굴라고 했더니, 이런 깜찍한 생각을 할 줄이야.

아마 그 방법이 통했다면 지금쯤 저는 애꿎은 소만을 쥐잡듯 뒤지고 있었겠지. 그럼 그만큼 벨라는 멀어졌을 테고.

그녀가 남겨 놓은 짓거리가 제법 귀엽게 느껴져서 그런지,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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