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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38)화 (138/180)

138화

숲의 중간 즈음에 다다랐을 때였다. 벨라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이어 두 손에 얼굴을 묻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

“응.”

“지금…… 내가 성 밖으로 나온 게 맞아?”

“맞아. 그러니까 더 이상 불안해하지 마. 여긴 성이 아니야.”

“……공작님께선 이 숲에 자주 들르셔.”

나름 제정신으로 한 말이었다. 그가 정확히 어디에 다녀오겠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니까. 혹시 사냥을 나간 것이라면 이 숲은 위험했다.

“지금은 멀리 갔어. 그러니까, 절대 이곳에 오지 않을 거야. 안심해도 돼.”

둘은 다시 숲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마을에 가까워지자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숲을 지나온 지 시간이 꽤 지났으니 어둡더라도 이른 아침에 가까운 시간일 터였다.

벨라는 숲에서 빠져나와 뻥 뚫린 길을 보며 그제야 정말 그 방을, 그 성을 빠져나왔음을 받아들였다.

공허하던 눈동자로 옅은 빛이 스몄다. 지금 순간,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이것이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얼떨결에 눈앞에 떨어진 기회일지라도 손에 쥔 이상 허무하게 날려 버리고 싶진 않았다. 무작정 도망갔다간 저번처럼 금방 그의 손에 잡힐 것이 뻔했다.

최대한 멀리 도망가면 그로서도 어쩔 수 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더 철저하게 그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가고 싶다. 그의 울타리에서 멀리, 완전히. 그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곳으로.

늘 두 가지 마음이 공존했다. 그의 품 안에 오롯이 파묻혀 있고 싶기도 하고, 그에게서 온전히 벗어나 모두 잊고 싶기도 했다.

지금 저는 후자에 가깝게 놓여 있었다. 어쩌면…… 그를 찌르지 않고도 서서히 서로를 잊어 갈 수 있지 않을까.

벨라는 버릇처럼 손을 만지작거리며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다 이제는 제 몸의 일부가 되어 버려 의식조차 못 하고 있던 반지가 걸렸다.

벨라는 그 반지를 쓸어 보며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말을 내뱉었다. 그만큼 마음이 급했다.

“이안, 잠시 폴번에 들르자.”

바로 베른을 빠져나가자고 할 줄 알았던 이안은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폴번은 왜?”

“멀리 가려면 돈이 필요하잖아. 폴번에 들르면…… 돈도 구하고, 도망갈 시간도 벌 수 있을 것 같아.”

내내 흐리멍덩하던 그녀의 눈에 처음 생기가 돌았다. 이안은 그 사소한 변화마저도 날 듯이 기뻤지만, 아직 안심하고 좋아하기엔 이른 단계였다. 이제 고작 한 걸음을 떼었을 뿐이다.

“그래. 네가 가자고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거야.”

폴번에 도착하자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하는지 하늘의 색이 조금 옅어졌다. 상업 지구에 들어서 더욱 걸음을 재촉하는 그녀를 이안이 잠깐 멈춰 세웠다.

“벨라, 잠시만.”

“……응?”

이안은 벨라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 주고 나뭇잎에 쓸려 엉망이 된 드레스 또한 최대한 가다듬어 주었다. 다행히 발목의 족쇄는 드레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이러면 좀 나을 거야.”

오면서 그녀에게 계획은 대충 전해 들었다. 그렇긴 하나, 이런 엉망인 상태로 벨리아르 공작가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안의 눈에는 살짝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벨라는 제 옷매무새를 살펴보며 미미하게 웃었다.

“지금 딱 좋아. 너무 깔끔해 보이는 것도 별로일 것 같아. 그런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벨라는 쉽사리 걱정을 떨쳐 내지 못하는 이안을 이끌고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색색의 장신구 가게를 찾았다. 전에 그의 지시로 의뢰서를 전달하기 위해 들렀던 곳이었다.

이번에도 그 화려한 외관 덕분에 별로 힘들이지 않고 목적지를 찾았다.

아주 이른 시간이라 거리에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가게 앞에는 누군가 비질을 하고 있었다.

벨라와 이안이 가게 주위를 기웃거리자 종업원으로 보이는 사람은 살짝 경계 어린 눈빛으로 둘을 살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만…….”

벨라는 긴장으로 날뛰는 속을 애써 다독이며 겉으로는 최대한 태연히 말을 붙였다.

“이른 시간에 죄송하지만…… 벨리아르 공작가에서 찾아왔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쓸데없는 대화로 지체할 시간이 없어 곧장 본론을 말했다. 하지만 종업원은 무언가 의심스러운 기색을 거두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작가에서…… 나오셨다고요? 저희 쪽에선 따로 연락 받은 것이 없는데…….”

그러다 그녀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순간, 종업원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적어도 베른에선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벨리아르 공작이 애지중지한다는 피후견인.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얼른 어르신께 전하고 오겠습니다.”

종업원은 그녀의 정체를 뒤늦게 알아차리곤 허둥지둥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문이 다급히 열렸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종업원이 헉헉대며 하는 말에 벨라는 미안한 얼굴을 하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전에 보았던 장신구 장인, 하르트만이 그녀를 맞았다.

“아가씨, 정말 죄송합니다. 이놈이 큰 실수를 했습니다.”

“제가 미처 알아뵈지 못하고 결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종업원이 과하게 허리를 숙이며 사죄하자 벨라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정말 괜찮아요. 괘념치 마세요.”

“따뜻한 차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 나누시지요.”

가게 안쪽에 따로 마련된 응접실로 들어가자 그의 심부름으로 왔을 때가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이곳에 올 땐 늘 그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은 채였다. 지금도 그때처럼 불안과 긴장으로 심장이 아플 지경이었다.

제 앞에 놓인 따뜻한 차를 보자 또 그가 생각났다. 찻물 위로 번지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마치 저를 응시하는 것 같아 절로 손끝이 떨렸다. 벨라는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을 맞잡았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정말 고맙게도 하르트만이 먼저 목적을 물어 주었다. 긴장으로 혀가 굳어있던 차에 다행이었다.

벨라는 입술을 한번 꾹 깨물곤 제 손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빼서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손이 떨리는 바람에 반지를 내려놓았을 때 미세한 울림이 번졌다.

“……이 반지를 팔려고 해요.”

“이 반지는…….”

하르트만은 한눈에 그 반지를 알아보았다. 자신이 몇 날 며칠 공들여 만든 작품이니 못 알아보는 것이 더 이상했다.

“혹,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신 겁니까?”

“아니요. 반지는 정말 마음에 들어요. 반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요. 정성스레 만들어 주신 분께 다시 파는 것은 실례되는 일이라 죄송스럽지만…… 말씀드리기 힘든 사정이 있어서요.”

지금 하르트만의 눈에 자신은 상당히 초조해 보이고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기에 그녀는 딱히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하르트만의 예리한 눈빛이 찰나에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죄송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괜히 어쭙잖은 곳에 팔렸다간 제가 만든 물건이 엄한 데 굴러다닐 수도 있으니 오히려 저로서는 감사한 일이지요. 그저…… 아가씨의 마음을 충족해 드리지 못한 것 같아 되레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선물 받은 뒤로 한 번도 빼지 않았어요. 그만큼 마음에 들었던 것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벨라는 혹여 그가 상처 받을까 봐 얼른 말을 덧붙였다. 지금 이곳에서 했던 말 중에 거짓은 없었다.

돈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고, 반지가 마음에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르트만은 작은 종이에 금액을 써서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이 정도 가격이면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번에는 표정을 숨기느라 매우 노력해야 했다. 딱 봐도 입이 벌어지는 액수였지만, 벨라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이후, 조금 앉아서 기다리자 종업원이 작은 크기의 상자를 가져와 안의 금화를 확인시켜 주었다.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의외로 쉽게 거래가 이루어졌다.

전에 그가 용돈으로 쓰라고 주었던 액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이안이 들고 있는 상자로 자꾸만 눈길이 갔다.

“아, 저 혹시…….”

“예, 말씀하시지요.”

“공작님께는 말씀드리지 말아 주세요. 이걸 팔았다는 게 알려지면 조금 곤란해서요…….”

“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탁드릴게요.”

몇 달간 성에서 지내며 알게 된 것이 있는데, 그가 부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고 그 범위 역시 넓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부탁해 봤자 지금의 상황은 무조건 그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아니, 들어가야만 했다.

벨라는 가게의 로비를 가로지르며 일부러 이안에게 친근히 붙었다. 그러고는 배웅하는 하르트만의 귀에까지 닿을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가자.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국경을 넘어야 해. 보는 사람이 많아지면 곤란하니까.”

누가 보더라도 몰래 도망치는 모습이었다.

둘은 가게를 벗어나자마자 걸음을 재촉했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떠올라 밖이 환해져 있었다.

“우선, 최대한 빨리 베른을 벗어나자. 언제 공작가의 기사들이 쫓아올지 모르니까. 그리고 공작이 알게 되면 베른을 벗어나는 것조차 힘들어져.”

벨라는 이안의 말에 동의하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에 마차를 탈 수 있는 곳이 있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 그건 너무 태평한 이동 수단이었다.

“마차는 너무 느릴 것 같은데……. 벨라, 혹시 말 타 본 적 있어?”

“……아니, 없어.”

벨라는 대답하면서도 슬쩍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혹여 자신이 짐이 될까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마음이 급한 와중에도 이안은 그녀를 보며 편안한 미소를 보였다.

“잘됐다. 너랑 말 타 보는 게 내 소원이었거든. 나, 말 엄청 잘 타. 몰랐지?”

마음의 짐을 덜어 주려 가벼이 건네는 말에 그녀는 희미하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난생처음 말에 오르니 긴장감에 숨이 찼다. 정말 그에게서 도망갈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말을 타는 것이 무서운 건지 헷갈렸다. 이안은 그런 그녀를 다독여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무섭거나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응.”

이안은 금화가 든 상자를 꼭 끌어안은 그녀를 제 앞에 태운 채 말을 몰기 시작했다.

서둘러 움직인 탓인지 베른을 빠져나가는 데에는 별다른 제약이 없었다.

그렇게 둘이 온전히 베른을 빠져나가 한참 멀어졌을 무렵, 벨리아르는 그녀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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