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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37)화 (137/180)

137화

몸은 너무 지쳐 잠들고 싶다고 아우성치는데, 눈만 감으면 정신이 또렷해졌다. 새까만 밤하늘 같은 시야를 가득 메우는 것은 오로지 벨리아르 공작, 그였다.

눈을 감으면 깜깜한 어둠 속에서 그가 손을 뻗어 왔다. 차가운 손이 목을 죄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몸을 억누르며 저를 더욱 깊은 곳으로 끌고 들어갔다.

숨이 막히고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 소리가 북처럼 거세게 울려 댔다. 그러니 차라리 눈을 뜨고 있는 게 더 나았다.

벨라는 초췌한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려, 그가 앉아 있던 테이블을 멍하니 바라봤다.

“벨라, 한동안 너를 찾지 않을 거야.”

“멀리 다녀와야 할 곳이 있어. 아무리 빨라도 몇 주는 걸릴 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잘할 수 있지?”

못 한다고 할걸. 그러니 저를 이리 버려두고 가지 말라고 붙잡고 매달릴걸.

그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있을까.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그리고 이젠…… 더 이상 저를 찾지 않겠지.

벨라는 이불을 꽉 그러쥐며 질끈 눈을 감았다. 그가 다른 여인을 다정히 끌어안는 모습이 그려졌다.

또 가슴이 답답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벨라는 다시 눈을 번뜩 뜨며 상체를 일으켰다.

“하아, 하아…….”

고요한 방 안에 밭은 숨소리가 퍼졌다. 그녀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베갯잇 안으로 손을 더듬었다. 이어 엘리아스가 준 단검을 꺼내 물끄러미 바라봤다.

“벨라, 이 칼에 당신의 소중한 기억을 담아 오는 거예요. 아픈 상처는 도려내야죠. 이대로 계속 두면 결국 당신을 집어삼키고 말 거예요.”

나가고 싶다.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 죽을 것 같아.

이대로 그가 오지 않는다면 이 삭막한 방 안에 실낱같이 남은 희망마저 사라진다. 살아 있다고 말하기에도 우스운 상태였다. 그녀는 또 한 번 나직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죽은 채 껍데기만 움직이는 게 신기하고 우스웠다. 벨라는 제 손을 까딱거려 보며 이따금 맥없이 웃었다.

그러던 중, 기사들의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바깥에서 무언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스레 문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공작님이 오신 걸까?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무언가 넘어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울리기도 했다. 벨라는 반사적으로 칼을 품 안에 숨겨 넣었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휘둥그레진 벨라의 눈앞에는 칼을 든 이안이 있었다.

“……이안.”

이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벨라의 상태를 살폈다. 바쁘게 움직이던 눈동자가 어느 한 곳에서 멈추었다. 그녀의 발목을 묶고 있는 투박한 족쇄였다.

“……벨라, 내가 금방 다시 올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거짓말.

벨라는 고개를 내저으며 이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 가지 마. 가지 마……. 혼자 있기 싫단 말이야……. 무서워, 가지 마…….”

이안은 안타깝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빠르게 뛰쳐나갔다. 멍하니 서서 지체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울먹이며 중얼거리는 벨라의 목소리가 내딛는 발걸음에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벨라는 다시 휑해진 문밖을 보며 허망한 숨을 내쉬었다. 또 저를 버리고 가 버렸다.

방금 누가 왔더라. 그였나? 내가 누구를 불렀더라……?

바로 전에 지나간 일인데도 기억이 흐릿했다. 열린 문을 다시 보니 시야가 크게 휘청였다. 문이 마구잡이로 일그러졌다.

이것도 꿈인가? 아니면, 정말 미쳐 버린 걸까.

벨라는 멍하니 생각을 굴리다 제 팔을 힘껏 꼬집었다. 고스란히 느껴지는 고통에 나직한 신음이 흘렀다.

“아…….”

지금은 꿈이 아닐 텐데. 그럼 방금은 뭐였지.

아무래도 자신이 정말 미쳐 버린 모양이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하고,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미친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가 저를 버렸나? 아, 그런가 보다. 이리 볼품없이 망가져 버려서.

“하하…….”

그에게 무언가 헛소리를 하진 않았나 싶어 기억을 되짚어 보다 보니 제 상태가 우스워 절로 웃음이 났다.

그러다 다시 열린 문으로 시선을 주었을 때, 서서히 웃음이 멎었다. 다시 멍하니 문밖을 바라보고 있으니 또 이안이 나타났다. 이번엔 검이 아니라 손에 도끼를 든 채였다.

이안은 빠르게 다가와 망설임 없이 도끼를 휘둘렀다. 벨라는 반사적으로 몸을 둥글게 웅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퍽! 퍽!

도끼가 무언가를 내리치는 굉음이 연거푸 방 안을 울렸다. 이안은 끊어진 사슬이 제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거세게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선 그녀의 가녀린 발목을 감싸고 있는 저 빌어먹을 족쇄도 끊어 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는 둥글게 몸을 만 채 떨고 있는 벨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벨라, 나랑 가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벌벌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당연히 목소리도 함께 떨렸다.

“……꿈이지?”

“꿈 아니야. 너 데리러 온 거야.”

이안은 죄스러운 마음에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게 더 힘이 있었더라면. 너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이렇게 아파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저 안일하게 힘들겠지, 생각했다. 근데 이렇게, 이렇게 심히 아파하고 있을 줄은…….

모두 제 잘못이었다. 그때 헤버튼에서 어떻게든 그녀를 지켰어야 했는데. 곁에 있어 주겠다고 해 놓고선 정작 필요할 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벨라를 이리 만든 것이다.

이안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간절히 손을 내밀었다. 차마 텅 빈 눈동자를 마주할 수 없어 고개가 자꾸만 아래로 떨궈졌다.

“……제발, 벨라.”

벨라는 아득한 눈을 깜빡이며 이안을 빗겨 나간, 빈 허공을 응시했다.

나가고 싶다.

이 숨 막히는 공간에 한순간도 있고 싶지 않았다.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공기가 사라지는 듯했다. 이러다 결국은 숨이 콱 막혀 죽어 버리진 않을까 하는 불안에 숨을 쉬는 것도 불편하고 꺼려졌다.

당장 이안의 손을 잡고 싶은데, 마음과는 달리 자꾸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혀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안 돼……. 난 갈 수 없어. 공작님께서 화를 내실 거야. 계속 말을 안 들어서 정말 날 버리시면 어떡해……?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안 돼……. 공작님께서 화를 내실 텐데…….”

벨라는 계속해서 멍하니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텅 비어 버린 눈동자가 이안의 손을 갈망하듯 바라봤다. 끊임없이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행동은 손을 뻗고 있었다.

이안은 느릿하게 뻗어 오는 손을 기다리다가 손끝이 닿았을 무렵에 참지 못하고 꽉 붙들었다. 벨라는 손끝으로 그의 손을 살살 매만지며 희미하게 웃었다.

“……꿈이 아닌가 봐. 네 손이 너무 따뜻해.”

“내가 꿈 아니라고 했잖아. 이제 내 말 믿어지지?”

“응…….”

“나랑 같이 가자.”

이 방 안에 갇힌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엘리아스가 준 칼로 그를 찌르는 것.

하지만 지금, 또 다른 선택지가 손을 내밀었다.

벨라는 그의 눈을 맞추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머릿속이 황량한 사막 같았다. 살짝 스치는 바람에 모래가 섞여들어 눈앞이 그저 뿌옇게 물들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벨라는 이안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떼다가 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우뚝 멈춰 섰다.

“왜 그래?”

“……이안, 나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그녀가 끊긴 사슬을 가리키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이거……. 발이 묶여 있잖아. 묶여 있는데 어떻게 나가? 난 못 가…….”

이안의 표정이 또 한 번 일그러졌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벨라, 사슬은 내가 끊었어.”

“아니야. 이렇게 묶여 있잖아. 여기서 더 가면 넘어질 텐데…….”

이안은 입술을 한 번 꾹 깨물곤 방 안에 널브러져 있는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이미 끊어진 사슬을 다시 한번 내리쳤다. 이번엔 그녀가 똑똑히 보았는지 확인까지 했다.

“봐, 내가 끊었지? 이제 괜찮아.”

그는 벨라의 시선이 닿는 곳에 끊긴 사슬을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벨라는 여전히 사슬이 놓여 있던 바닥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안 넘어져. 이 방도 나갈 수 있고, 네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어.”

이안은 먹먹히 잠기는 목소리를 또렷하게 끌어내려 애썼다.

그럼에도 그녀가 꼼짝없이 제자리에 서 있자, 이안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맥없이 휘청인 몸이 결국 스스로 그어 놓은 선을 넘었다. 이안이 또 한 번 이끌자 이번엔 어렵지 않게 문틀을 넘었다.

“……정말…… 이네?”

신기하다는 듯 공허하게 감탄한 벨라는 그제야 이안의 손을 잡은 채 그의 뒤를 따랐다.

이안은 엉망인 벨라의 상태에 복잡한 감정이 치밀었지만, 애써 묻어 둔 채 성을 빠져나가는 것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다행히 깊은 새벽이라 별다른 마찰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둘은 숲과 연결된 문을 통해 고요히 잠든 성을 빠져나갔다.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했을 때, 이안은 벨라를 적당한 바위에 앉혔다. 그러곤 허리를 숙여 최대한 눈높이를 맞춘 채 차분히 설명했다.

“아마 교대 시간 전까진 다른 기사들이 우리가 빠져나간 사실을 모를 거야. 여유롭진 않지만, 그렇게 시간이 빠듯하진 않아. 조금 천천히 가도 돼. 많이 힘들어?”

“……나가고 싶어.”

자신은 아직 그녀를 밖으로 꺼내 주지 못했구나. 다시 굳센 결심을 다진 그가 대답했다.

“……그래. 꼭 나가자.”

이안은 다시 벨라의 손을 잡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벨라는 그가 이끄는 대로 멍하니 발을 움직였다.

겨울바람에 건조해진 낙엽들이 밟히는 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그녀는 살며시 멈춰선 채 숲을 살폈다.

닫힌 문이 보이지 않았다. 벽의 모서리도 보이지 않았고, 그가 앉아 있던 테이블도 없었다.

달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비켜나자 울창한 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숲이다. 그 지옥 같던 방이 아니라, 정말 숲이었다. 자신이 숲을 딛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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