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홀로 멍하니 앉아 있는 이안 옆으로 무언가 툭 떨어졌다. 종이로 싸맨 빵이었다.
칼리드가 제 손에도 빵 하나를 들고서 이안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는 이안이 처음 성에 들어왔을 때부터 알게 모르게 챙겨 주던 사람이었다.
“죽은 줄 알았더니.”
“목숨 줄은 질긴가 봅니다.”
이안은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예상대로 텁텁할 뿐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모래를 씹어 먹어도 별다르지 않을 터였다.
“어린놈이 할 말이냐?”
“걱정하셨습니까?”
“걱정 같은 소리 하네. 죽은 줄 알았던 놈이 살아 돌아온 게 신기해서 그러지.”
모두가 이안은 죽을 것이라 했다. 아니,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놈이 멀쩡히 전열에 합류했으니 신기할 만도 했다.
하지만 아무런 경험도 없는 신임 기사를 전쟁의 최전방에 내던진다는 건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전장은 노련한 기사라 할지라도 굵직한 상처를 달고 오는 곳이었다. 아무리 훈련을 열심히 했다고 한들, 실전과 가상 훈련은 천지 차이였다.
해서 이안을 바라보는 칼리드의 눈빛엔 연민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곧 죽을 놈. 모두의 시선엔 이안이 딱 그랬다.
“벨라 아가씨에 대한 소식 좀 알려 주시면 안 됩니까?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뭐든 좀 말해 주십시오.”
그렇게 고초를 겪고도 또 그녀를 입에 올리는 모습에 칼리드가 이를 빠득 갈았다.
“이놈이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기어코 땅에 묻혀야 그딴 소리 안 할래?”
“어차피 지금 듣는 사람도 없잖습니까.”
“하, 이놈 보게……. 네가 지금 그 아가씨 걱정할 때야? 곧 전쟁터에서 죽을 놈이. 그 아가씨 소식이 그렇게 궁금해?”
“제겐 그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어차피 죽을 텐데, 소중한 사람의 소식 좀 궁금해하는 게 그렇게 잘못된 일입니까?”
“……너, 정말 그 아가씨와 내통이라도 한 거야?”
칼리드가 한껏 진지하게 묻자, 이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제 마음은 극히 일방적이었다. 저 역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더욱 착잡했다.
하지만, 때로는 그 사실이 저를 움직이기도 했다.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어떻게든 기회가 있을 테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지금 동쪽 깊은 곳에 갇혀 있다는 것밖에 몰라. 그마저도 내 동기 녀석이 그곳을 지키는…….”
‘갇혀 있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이안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뭐라고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동기 녀석?”
“아니요, 그 전에 말입니다.”
“동쪽 깊은 곳에 갇혀 있다고……?”
또 그 말이 나오자, 이안이 이번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게 사실입니까?”
“앉아, 인마. 아무리 갇혀 있다고 하더라도 각하께서 그렇게 아끼시는 아가씬데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으려고. 그냥 각하께서 조금 화가 나신 모양이지.”
“……그걸 어떻게 장담합니까.”
지금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데.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얼마나 슬퍼하고 있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칼리드는 이안의 손에서 찌그러진 빵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말했지. 넌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저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 무엇보다 소중하다고요. 지금 제 목숨이 대수겠습니까?”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이안을 바라보는 칼리드의 눈빛은 황당함과 신기함, 두 감정만이 공존했다.
“……너도 참, 정상은 아니구나. 하, 이런 놈이 뭐가 예쁘다고 신경을 써 대는지. 내가 제일 미친놈이지.”
“지금 저희가 어디쯤 왔습니까?”
칼리드는 지금 이안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묻는지 뻔히 알았다. 그는 빵을 베어 먹으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멀리 왔어. 돌아가지 못할 만큼 아주 멀리. 그러니까, 허튼 생각하지 말고 앉아라.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어차피 죽을 놈인데 마지막으로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칼리드는 빵 조각을 뜯어 이안에게 던졌다.
“너는 내 말 들을 생각이 없지?”
* * *
미친놈. 아, 진짜 미친 새끼.
칼리드는 제 속도 모른 채 옆에서 태연히 무기를 정비하고 있는 이안을 보며 끊임없이 욕을 지껄였다.
“지금이라도 생각 바꿔.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고, 허락 없이 전열을 이탈하는 기사는 즉결 처형 대상이야.”
이안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작은 단검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상처라도 하나 내십시오. 그래야 도망치는 저를 붙잡으려 했다, 핑계라도 댈 것 아닙니까.”
칼리드는 황당한 얼굴로 이안을 쳐다봤다. 진짜, 하도 어이가 없어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칼리드에게 이안이 칼을 눈짓하며 진지하게 물었다.
“도와드릴까요?”
이안이 제 고향에 있는 동생만 닮지 않았어도. 저 맹랑한 눈빛이 제게 바락바락 대들던 동생만 떠올리게 하지 않았어도.
칼리드는 이 뻔뻔한 놈의 뒤통수를 한 대 휘갈기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날 그렇게 생각해 주다니, 참으로 고맙다. 이왕 생각해 줄 거면 지금 얌전히 막사로 돌아가는 것도 방법인데.”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이런 놈을 돕겠다고 불침번 순서까지 바꿔 가며 새벽에 이런 난리를 치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안이 잡히면 저 역시 무사하지는 못할 터였다.
“제발 내 눈앞에 시체로 돌아오진 마라. 내가 너 은근 아꼈어. 알아?”
그 말에 이안은 어느 때보다 밝게 웃었다.
“그 부탁은 꼭 들어드리겠습니다.”
칼리드는 제 시야에서 이안의 모습이 무사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부디, 이 새벽이 고요히 지나가길.
그러나 칼리드의 바람과 달리, 이안은 얼마 가지 못해 커다란 장애물과 맞부닥쳤다. 그는 허리춤에 찬 검을 빼 들며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아데인 경.”
이안이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혹여 누군가 더 있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도 에릭 홀로인 듯했다. 사실 다행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어폐가 있었다.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인 그를 자신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에릭은 제게 겨눠진 칼을 보며 느릿하게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나와 겨룰 생각인가?”
그는 칼을 뽑지도 않은 채였지만, 이안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칼을 쥔 손에 더욱 단단히 힘을 실었다.
“제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니까요.”
에릭은 성큼성큼 발을 내디뎌 주저 없이 이안과의 거리를 좁혔다. 당황한 이안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칼끝에 바짝 긴장을 실었다.
“정원에 난 길을 무시하고 동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장미 넝쿨로 감긴 건물이 나와. 거기 꼭대기 층으로 가면 방이 하나 있지.”
에릭은 고저 없는 높낮이로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이안의 표정이 사뭇 흐트러졌다.
“……지금, 무슨 말씀을.”
그사이 둘의 거리는 고작 두 뼘 정도로 좁혀졌다.
“그 층에 방은 하나뿐이니 헷갈릴 일은 없을 거다. 지키고 있는 기사는 둘인데, 그건 알아서 처리해. 설마 그 정도도 처리 못 하면서 내게 칼을 빼 든 건 아니겠지.”
에릭이 손등으로 가볍게 이안의 칼을 쳐 냈다. 이미 힘이 모두 빠져 버린 칼은 손쉽게 아래로 떨어졌다.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습니까?”
“내가 눈감아 주는 건 이번뿐이야. 다음에 또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된다면, 그땐 주저 없이 네 목을 벨 거다.”
이안이 망부석처럼 멀뚱히 서 있자 에릭은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아까운 시간 버리지 말고 어서 움직여.”
그제야 이안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칼을 다시 챙겨 넣고선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에릭을 지나쳐 갔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다시 뒤돌아 물었다.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의문이 있었다.
“……왜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에릭은 대놓고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 너를 돕는 게 아니라, 벨라 아가씨를 돕는 거다.”
“그럼 제가 벨라를 대신해 고맙다는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이제 벨라를 만나지 못하실 테니까요.”
에릭은 짜증스러운 숨을 내뱉었다. 묘하게, 아니 대놓고 기분이 나쁘고 짜증 나는 말이었다.
벨라가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어떻게 저딴 식으로 하지.
에릭은 진심으로 다음에 이리 마주치면 가차 없이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부디, 아가씨께서 네 목숨을 몇 번이나 살리셨는지 알길 바란다.”
* * *
이안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들은 로드릭은 급하고, 또 은밀하게 에릭을 찾았다.
곧이곧대로 공작에게 보고를 올렸다간 어떠한 기회도 없음을 알기에 눈치껏 그를 찾은 것이었다.
“주인님께는 제가 보고할 테니 경은 그대로 쭉 모른 척하고 계세요. 기사들 사이에서 말이 도는 것도 좀 막아 주십시오. 아, 그리고.”
에릭은 죽어도 상관없을 기사 두 명만 추려 달라고 하려다가 상대가 로드릭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을 멈췄다. 그에겐 이유 없이 죽어야 할 사람이라는 건 없을 테니까.
하도 인정 없는 사람들과만 일하다 보니 가끔 로드릭의 올곧은 가치관을 잊곤 했다.
“아닙니다. 앞에 말한 두 가지만 신경 써 주십시오.”
“……괜찮겠습니까?”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각하께서 아시면 아무리 아데인 경이라도 가볍게 넘어가지 않을 텐데요.”
아마 그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제 목이 잘릴지도 모르겠다. 난생처음 주인에게 반하는 일이라 저 역시 조금 긴장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별로 후회되지는 않았다. 수없이 고민해서 내린 선택이었다.
고작 몇 번의 산책, 그리고 의미 없이 주고받았던 실없는 대화들이 이리 제 벽을 야금야금 갉아먹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럼 제가 에릭 경의 친구가 되어 드려도 괜찮을까요?”
에릭은 제 하나뿐인 친구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래서 친구를 잘못 사귀면 안 된다는 말이 있나 봅니다.”
셀리온까지 삼 분의 일 정도를 남겨 두고 있을 때, 에릭은 벨리아르를 찾아가 미뤄 두었던 보고를 올렸다.
“주인님, 이안 에드레이즈가 전열을 이탈했습니다.”
“언제.”
“전날 새벽에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 시간에 불침번 서던 놈들은 내 앞에 데려오고, 발 빠른 놈들로 추려서 그놈 쫓아. 잡는 데에 수단과 방법은 가리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에릭은 속으로 한 번 더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아무리 발이 느려도 지금쯤이면 베른 가까이는 당도했겠지.
여기까지가 자신이 손쓸 수 있는 한계였다. 그 이상은 오롯이 둘에게 달렸다.
“아, 숨은 붙여서 잡아 와.”
에릭은 늘 그렇듯, 이때까지도 두 가지 마음이 공존했다.
제 주인에게 잡혀 고통받는 벨라가 가여워 무사히 도망갔으면 하는 마음 반, 어떻게든 그와 벨라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행복해졌으면 하는 마음 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