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벨라는 어느새 놓쳐 버린 꽃다발을 찾아 바삐 눈을 움직였다. 그러나 벨리아르는 그새를 못 참고 그녀의 엉덩이를 세게 내려쳤다. 따끔히 번지는 아픔에 벨라가 또 한 번 바르작거렸다.
“아! 진짜 아파, 아프다니까…….”
“아프라고 하는 거야. 말없이 나가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말을 안 듣잖아. 그럼 혼나야지.”
냉정한 말과는 달리, 손은 그녀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아픔을 달래 주었다. 그러다 엉덩이를 터트릴 듯 꽉 쥐며 그녀의 목에 코를 박고, 체취를 깊게 들이마셨다.
엉덩이가 아팠지만 목에서 느껴지는 그의 숨결이 간지러워 벨라는 몸을 움츠리며 작게 웃었다.
“아……. 좋은 냄새 나지?”
아니. 개 같은 냄새가 나는데. 그가 눈가를 확 찌푸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엘리아스 만났어?”
아, 이번엔 진짜 화났네.
벨라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가만히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건 두 가지였다. 제 허락 없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과 엘리아스를 만나는 것.
둘은 형제이고, 또 사이가 그리 나빠 보이지도 않는데 유독 자신이 엘리아스를 만나는 건 달가워하지 않았다.
오늘 의도치 않게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켜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풀어 줘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진 순간, 어디선가 섬뜩한 목소리가 뇌리를 파고들었다.
[그를 죽여.]
순간 화들짝 놀란 벨라가 저도 모르게 그를 확 밀쳐 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가 순순히 물러나면서도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래?”
“……어?”
잘못 들은 건가? 벨라는 벙벙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들렸던 목소리를 상기하자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착각이라기엔 너무…….
[그를 찔러. 너를 망가트릴 거야. 그를 죽여야 해. 지금 죽여. 어서!]
“악!”
또다시 강하게 파고드는 목소리에 벨라는 소리를 내지르며 귀를 막았다. 급격히 가빠진 숨소리가 귀를 가득 메웠다. 그가 사뭇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벨라, 왜 그래. 괜찮아?”
그의 목소리가 제대로 담기지 못하고 흐릿하게 흩어져 버렸다. 벨라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귀를 꽉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뇌리를 파고드는 목소리는 선명해졌다.
[당장 그의 심장을 찔러. 가까이 있잖아.]
[그를 죽여야만 해.]
[죽여. 죽이란 말이야.]
실체 없는 목소리가 새까만 어둠 속에서 멋대로 형체를 만들어 냈다. 눈을 질끈 감아 보았으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붉은 형체가 저를 향해 확 달려들었다.
순간, 모든 세상이 허물어지며 끝을 알 수 없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허억!”
번쩍 눈이 떠졌다. 벌컥 터져 나온 숨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웠다. 흐릿했던 눈에 점점 초점이 돌아왔다.
꿈이었구나. 다행히, 꿈이다.
실제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벨라.”
머리맡에서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안개가 또 한 겹 걷혔다. 벨라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은연중에 나온 행동이었다.
아직 꿈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잔뜩 겁을 집어먹은 심장이 빠르게 뛰어 댔다.
“……공작님. 어, 언제…….”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헐떡이는 벨라를 가만히 품에 끌어안았다.
“괜찮아. 천천히 숨 쉬어.”
낮게 다독여 주는 목소리가 꿀처럼 달았다.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모습이라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 다정함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안도하고 기대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벨라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무서운 꿈을 꿨어요.”
앞의 행복했던 장면이 모두 잊혀질 만큼 마지막이 너무 강렬했다. 워낙 작은 목소리에다 발음도 뭉개졌지만, 그는 착실히 알아듣고 등을 쓸어내렸다.
“꿈일 뿐이야.”
“……네.”
벨라의 세상에서 그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말에 안도하며 차분히 숨을 내쉬었다.
“언제 오셨어요? 저도 모르게 잠들었었나 봐요. ……죄송해요.”
그는 가끔 들어왔을 때, 잠들어 있는 그녀를 깨워 매섭게 질책하곤 했다. 그래서 벨라는 자는 동안에도 편하게 잠들지 못하고 옅은 무의식 속에서 헤매기 일쑤였다.
수없이 반복되는 꿈엔 늘 그가 나왔다. 꿈속에서 저는 늘 그가 오면 옷을 벗었고, 무릎을 꿇었고, 잘못을 빌었다. 가끔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했다.
“밤이니까, 잘 시간 맞아.”
그럼에도 그녀는 하염없이 그를 기다렸다. 그 무엇보다 가장 두려운 것은, 그에게 버림받는 것이기에.
“……안 오실까 봐 걱정했어요.”
“내가 오지 않았던 적이 있어?”
“며칠간 안 오셨잖아요.”
그는 분명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를 찾았다. 시간 개념이 사라진 방 안에서는 일분일초가 유독 느리게 흘러갔다. 그를 기다린 것은 고작 몇 시간이었지만, 벨라에겐 며칠 같은 긴 시간이었다.
“벨라, 한동안 너를 찾지 않을 거야.”
“……왜요?”
“멀리 다녀와야 할 곳이 있어. 아무리 빨라도 몇 주는 걸릴 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잘할 수 있지?”
아니요, 못하겠어요.
“……네.”
몇 주라니. 며칠, 아니 하루도 힘든데. 정말 얌전히 기다리면 그가 다시 올까? 이대로 저를 버리려는 건 아닐까.
“새로 마음에 드는 인형을 찾았으니까, 헌 인형은 버려야죠.”
……설마. 저를 찾지 않은 동안 정말 어디서 또 다른 사람을 찾기라도 했으면 어떡하지. 그래서 제게 흥미가 식어 버린 거라면…….
“……기다리고 있으면, 정말 오실 거죠?”
“그래.”
거짓말.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건네 확답을 받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더 묻지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가만히 눈을 감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녀는 외딴 섬으로 유배를 보낼 거야. 평생 홀로 썩어 가도록.”
지금 황녀와 제 처지가 다를 게 뭘까. 저 역시 그가 만든 곳에 갇혀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빛도 보지 못하고 있다.
제게 했던 것처럼, 또 누군가에게 찾아가서 다정히 말하지 않을까.
그 아이는 빛도 안 들고, 아무도 찾지 않는 방 안에 가둬 놨어.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곳에서 평생 홀로 썩어 갈 거야.
벨라는 그의 옷깃을 간절한 손길로 꽈악 틀어쥐었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손이 바들바들 떨리며 뼈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그 순간, 섬뜩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를 죽여.]
벨라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잠잠하던 심장이 다시 격동했다.
꿈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다.
* * *
끼이익.
에릭은 지하의 철장 문을 열며 나는 귀를 찢는 소리에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전쟁이 끝나면 사용인들을 시켜 경첩에 기름칠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듣기 싫은 소리에 철장 안에 있던 몸뚱이도 반응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거센 눈길로 저를 노려보는 이를 보며 에릭은 짧게 혀를 찼다.
“나와.”
“……벨라는, 무사합니까?”
상처는 거의 나았겠지만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며칠간 이 지하에 처박혀 있으면 상태가 절로 나빠졌다. 몸이든 정신이든 말이다.
그 와중에도 벨라의 안위부터 묻는 이안을 보며 에릭은 짧게 헛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건 벨라가 어디에 갇혀 있는지, 대충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뿐이었다. 그 사실만으로 유추한다면…… 그다지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
안 그래도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갑자기 제 주인의 심기가 그리 뒤틀려 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더불어 티는 내지 않았지만, 에릭 역시 벨라가 걱정되어 몹시 속이 단 상태였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고 싶다면, 그 이름은 더 이상 입에 담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에릭은 차갑게 말하며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칼을 이안의 발치에 던져 놓았다.
장인의 손길로 벼린 품질 좋은 칼이었지만 이 성안에서는 모든 기사가 쓰는 흔한 칼일 뿐이었다.
“너는 이번 전쟁에서 최전방에 배치될 거다. 거기서 어떻게든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해.”
칼을 쥔 이안의 눈빛에 서서히 생기가 돌았다.
“살아 돌아오면요.”
“뭐, 그땐 적어도 아가씨를 걱정할 기회는 주어지겠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넝마처럼 널브러져 있던 이안이 벌떡 몸을 일으켜 에릭의 가까이 다가섰다.
“벨라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에릭은 가차 없이 이안의 배를 걷어찼다. 겨우 움직였던 몸이 다시 구석으로 처박혔다.
“윽…….”
“살아서 돌아오는 게 먼저라니까. 주제넘은 짓을 하려면, 눈앞의 산부터 넘어.”
그 순간에도 에릭의 머릿속엔 수많은 고민이 답을 정하지 못한 채 방황했다.
* * *
“주인님, 이쯤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날 새벽, 모르가타의 군사가 접경지역인 셀리온으로 쳐들어왔다. 제국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른 시점이었다.
그들의 생각보다 모르가타의 군사들은 준비가 잘되어 있었다. 다행히 제국 역시 미리 군사를 파견해 놓은 상태지만, 쉽사리 승리를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공작가의 기사들이 합류하는 것이 급한 건 아니었다. 이미 황실 기사단장이 셀리온에 파견되었고, 벨리아르의 명령 역시 전달된 상태였다.
그러니 이리 서두를 필요는 없는데,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기사들을 이끌고 진군했다.
가혹한 훈련을 버텨 낸 기사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가히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결국, 기사들의 상태를 보다 못한 에릭이 살며시 말을 얹은 것이다.
“아직 반도 가지 못했어. 이 속도로 가다간 모르가타군을 수도에서 마주치겠군.”
“……그 전에 기사들이 먼저 쓰러질 겁니다. 아무리 잘 훈련된 기사들이라도 주인님의 체력을 따라가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벨리아르는 눈가를 찌푸리며 짧게 혀를 찼다. 마침 저 멀리 임시로 머무르기 좋은 곳이 눈에 띄었다.
“저곳에 막사를 펼쳐.”
소식을 들은 기사들이 오아시스라도 만난 것처럼 기쁘게 환호했다.
그는 마련된 막사로 들어가자마자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불편한 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에겐 일분일초가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성을 떠난 시점부터 그의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건 오로지 벨라였다.
그리고 그는 또 한 번 다짐했다.
모르가타의 수도를 함락하게 되면 이 사태를 만든 왕자 놈의 목을, 반드시 가장 먼저 베어 버릴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