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벨라는 저도 모르게 멍한 얼굴로 엘리아스를 빤히 바라봤다. 제법 멍청한 얼굴일 테니, 그가 낮게 웃는 것도 이해가 갔다.
“왜 굳이 하나가 기억의 한 조각이라고만 생각해요? 큰 덩어리일 수도 있지.”
“하지만…….”
“무언가가 당신을 괴롭게 한다면, 그 원인을 없애 버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엘리아스의 모습을 가득 채운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녀의 마음이 딱 그랬다.
그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잃는다. 그를 잊는다.
소중한 기억 한 조각은 내어 주기 그리 아까워했으면서, 통째로 다 달라고 하니 흔들리는 게 우스웠다.
그가 다정했던 기억을 잃는 건 너무나도 무섭지만…… 그를 온전히 잃는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깜깜해졌다. 새까만 어둠이 불안하기도 하고, 또 오히려 편하기도 했다.
“……잊을 수 있는 건가요? 아예 몰랐던 것처럼……?”
희망인지 불안인지 모를 감정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엘리아스는 품 안에서 작은 단검을 하나 꺼냈다. 은색으로 호화롭게 장식된 칼은 단번에 시선을 잡아끌 만큼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 채도가 낮은 방 안에서도 언뜻 빛이 나는 것처럼 반짝였다.
엘리아스는 그 칼을 벨라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건 기억을 담을 수 있는 칼이에요. 당신이 이 칼로 벨리아르를 찌르면, 서로의 기억이 모두 이 칼로 스며들 거예요.”
“……저더러 그를 죽이라는 거예요?”
“설마요. 이 칼로 찌른다 해도 기억만 사라질 뿐 그는 죽지 않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정말일까?
벨라는 조심스럽게 칼집에서 칼을 살짝 빼냈다. 얼핏 봐도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봐서는 일반 칼과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의심스러워하는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엘리아스가 칼을 톡 건드렸다.
“못 믿겠으면, 지금 날 찔러 봐도 좋아요.”
아, 그럼 지금 우리가 서로를 잊게 될 테니 조금 곤란하겠네요.
엘리아스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벨라는 곧장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엘리아스의 시선이 그녀의 손바닥에 난 긴 흉터를 스쳤다. 그는 벨라의 손을 덮으며 칼을 온전히 쥐여 주었다.
“벨라, 이 칼에 당신의 소중한 기억을 담아 오는 거예요. 아픈 상처는 도려내야죠. 이대로 계속 두면, 결국 당신을 집어삼키고 말 거예요.”
아픈 상처…….
그러고 보니 그가 오늘은 왜 이리 늦는 거지? 설마……. 정말 엘리아스의 말처럼 어디선가 또 옛 연인을 닮은 사람을 만난 건 아닐까?
알 수 없었다. 이대로 그가 돌아와 저를 화형대에 올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에게 그를 잊고 살아갈 기회가 주어지긴 할까. 그 전에 그가 저를 불길 속으로 던져 버릴지도 모르는 일인데.
나가고 싶다.
또 버릇처럼 치민 생각이 머릿속을 쾅 울렸다.
“……엘리아스.”
“네.”
“저……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너무 힘들어요.”
엘리아스는 제게 매달리는 그녀를 보며 안쓰러운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 칼로 벨리아르를 찌르는 순간, 제가 데리러 올게요. 약속해요.”
그럼, 이 칼로 그를 찌르기만 하면 이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엘리아스가 자애로운 신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그를 죽여야죠.”
따뜻한 손이 뺨을 감싸자 따스한 햇살이 부서지는 숲 한가운데에 놓인 것처럼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당신의 기억 속에서.”
* * *
코끝으로 스미는 파릇한 풀 내음에 이른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벨라는 곁에 잠든 벨리아르를 깨우지 않도록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새벽이슬을 한껏 머금은 숲은 맑고 청량한 내음이 가득했다. 벨라는 지그시 눈을 감고 팔을 벌린 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입가로 잔잔한 미소가 스몄다.
‘오늘은 작은 꽃다발을 엮어 벨리아르를 기쁘게 해 줘야지.’
벨라는 맨발로 숲속을 거닐었다. 촉촉한 땅을 고스란히 밟고 다니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작고 예쁜 들꽃과 풀을 꺾어 엮는 손길에 가벼운 콧노래가 얹어졌다.
그러던 와중, 눈앞으로 작은 새가 휙 날아갔다. 절로 고개가 돌아간 곳엔 저를 보며 미소 짓는 엘리아스가 있었다. 벨라는 들꽃처럼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달려갔다.
“엘리!”
혹여 풀 줄기에 걸려 넘어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 엘리아스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곧 손길을 거두며 조용히 입꼬리를 휘었다.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 거북했다.
“너무 예쁘게 웃는 거 아니야? 이러니까 벨리아르가 맨날 질투하지. 날 너무 싫어해.”
벨라는 불퉁한 얼굴로 기다렸다는 듯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벨리아르는 질투가 너무 심해. 내가 들고 있는 이 풀에도 질투한다니까? 어느 날은 햇빛 받는 게 싫다고 온종일 오두막에만 있게 했어. 하여튼, 성질 고약한 건 알아줘야 해.”
“그러게 조심하라니까.”
“엘리를 엘리라고 부르는 것도 엄청 싫어하길래 벨리아르도 벨리라고 불렀더니 그건 더 싫어하더라.”
“왜?”
“이름으로 온전히 불러 주는 게 좋대.”
엘리아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걔는 그럴 수도 있지.”
불평하면서도 그녀의 얼굴엔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생글한 미소가 가득 피었다.
“오늘 평소보다 더 기분이 좋아 보이네.”
“풀 향기가 너무 좋아. 맡아 볼래?”
벨라가 선뜻 들풀로 엮은 꽃다발을 내밀었다. 엘리아스는 기꺼이 향을 맡으며 싱그럽게 대꾸했다.
“그러네. 근데 웬일로 혼자 나와 있어?”
“벨리아르 잘 때 몰래 나왔지. 머리맡에 이 꽃다발을 놔 줄 거야. 일어나자마자 보면 기뻐하겠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순수히 기뻐하는 모습은 엘리아스의 눈에도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곧 걱정스러운 말을 얹었다.
“음, 그냥 일어나자마자 벨라가 있으면 좋아할 것 같은데? 반대로 일어났는데 벨라가 없으면 매우 화를 낼 것 같고.”
아. 그의 말에 무언가를 깨달은 듯 벨라가 짧은 탄성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지금 시간이 얼마나 흘렀더라?
온전히 해가 뜨지 않아 푸르스름하던 숲이 어느새 환했다. 뒤늦게 걱정이 일었다.
“……지금 일어났으면 어쩌지?”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돌아가야겠다. 벨리아르는 한번 심기가 뒤틀리면 정말 집요하게 괴롭혀 대니 말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제 허락 없이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마음이 급해져 허둥지둥 돌아갈 채비를 하는 벨라를, 엘리아스가 붙잡았다.
“잠깐만, 벨라.”
“응?”
“눈 감고 손 좀 내밀어 봐.”
얼른 가야 하는데. 마음이 달았지만 일단 엘리아스가 시키는 대로 했다.
“이렇게?”
“응, 잘했어.”
손 위로 무언가 딱딱하고 긴 물체가 얹어졌다. 눈을 감은 벨라의 표정이 살짝 꿈틀거렸다.
“자, 눈 떠도 돼.”
얼른 눈을 뜨자 보이는 건, 화려하게 장식된 단검이었다.
“이게 뭐야? 정말 예뻐!”
“단검이야. 작고 가벼워서 네가 쓰기에도 힘들지 않을 거야.”
벨라는 그의 말을 들으며 단검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날카로운 칼을 품고 있는 검집이 과하게 아름다웠다. 작고 하얀 보석이 콕콕 박혀 있어 빛에 따라 반짝이기도 했다.
정말 예쁘고 좋긴 한데.
“이걸 왜 나한테 줘?”
갑작스러운 선물이 뒤늦게 어리둥절했다. 선물의 용도를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게 필요한 물건 같지는 않았다. 그러다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보니 번뜩 생각이 스쳤다.
“아! 풀 뜯을 때 쓰라고 주는 거야? 이걸로 풀을 베기엔 좀 아깝긴 한데…….”
“벨라가 쓰고 싶은 대로 써. 근데 내 뜻은, 혹시 위험한 일이 생기면 이 칼로 너를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어. 선물이야.”
“에이, 여기서 내가 위험할 일이 뭐가 있다고. 이 숲에서 다른 사람은 본 적도 없어. 동물들도 다 순하고. 또, 뭐가 걱정이야? 벨리아르가 항상 곁에 있는데.”
“그래. 벨리아르가 있으니 별일 없겠지만, 그래도 주고 싶었어. 마음에는 들어?”
벨라는 온 힘을 다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자신이 가져 본 것 중 가장 화려한 물건이라 마음이 벅찼다.
“응, 정말 마음에 들어! 엘리가 준 거니까 소중히 품에 지니고 다닐게.”
그 말에 엘리아스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진심 어린 미소였다.
“둘이 결혼식은 언제 하기로 했지? 전에 벨라가 말해 줬었는데.”
“일주일 뒤에! 엘리도 와 줄 거지?”
“미안, 벨라. 그날은 시간이 안 될 것 같아.”
“아, 정말? 아쉽다…….”
“멀리서나마 둘의 사랑을 축복할게. 진심으로 둘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엘리……. 벨리아르랑 형제면서 어쩜 이리 다르지? 벨리아르도 이렇게 예쁘게 말하면 얼마나 좋을까.”
엘리아스는 즐거운 듯이 웃으며 벨라의 손에 들린 칼을 가리켰다.
“내가 준 칼, 꼭 지니고 다녀. 널 지켜 줄 거야.”
벨라는 엘리아스가 선물로 준 칼을 품 안에 꼭꼭 챙겨 넣은 뒤,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급한 마음에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나, 붉은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빡이며 저를 응시했다.
벨라는 차분히 숨을 내쉬며 그에게 사뿐사뿐 다가갔다. 그의 시선이 풀과 흙이 묻어 엉망인 벨라의 발을 물끄러미 훑었다.
거리가 좁혀지자 그는 벨라의 팔을 확 잡아당겨 제 품에 가뒀다. 순간 그녀의 사랑스러운 향이 싱그러운 풀 내음과 섞여 훅 끼쳤다. 그는 당장 옷을 벗겨 탐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나직이 물었다.
“어디 갔었어?”
벨라는 주름이 진 그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펴 주었다. 화가 난 모습이 그리 무섭진 않았지만, 그녀는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의 품으로 안겨 들었다.
“무서워, 벨리아르.”
뻔하고 어설픈 연기에 그는 기꺼이 넘어가 주었다. 조용히 입꼬리를 휘며 그녀를 힘주어 꽈악 끌어안았다.
“흐…….”
그러자 숨쉬기가 버거운지 작은 몸이 얕은 신음을 흘리며 버둥거렸다. 그는 힘을 살짝 풀어 주는 대신, 희게 드러난 목을 아프게 깨물었다.
“아! 아파!”
곧바로 앙칼진 목소리가 대꾸해 왔다. 그는 입가의 미소를 지운 채 나직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어디 갔었냐니까. 대답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