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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33)화 (133/180)

133화

한바탕 시원하게 울고 나니 진이 다 빠져 몸에 힘이 없었다. 엘리아스가 건네준 손수건을 흠뻑 적시고서야 눈물은 겨우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던 그가 무언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물이 없네요.”

물뿐만이 아니라 이 방 안에는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가구도 침대와 작은 테이블, 그리고 의자 하나가 끝이었고 흔한 장식 하나 없어 삭막하기만 했다.

“……이따가 공작님께서 가져오실 거예요.”

항상 정신을 차리면 타는 듯한 갈증이 따랐지만, 그가 주는 물밖에 받아 마실 수 없었다.

여전히 못됐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엘리아스가 볼 것도 없는 방 안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조금 신기한 눈치였다.

“정말 꼭꼭 숨겨 놨네요. 이번엔 저도 찾아오기 힘들었어요.”

“……엘리아스,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왜요?”

“그야…….”

이리 갇히게 된 것은 모두 그 몰래 엘리아스를 만나서였다. 그런 단순한 이유로 이토록 화를 내는 것을 보니 분명 엘리아스와 그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이라 짐작했었는데, 그 생각이 맞는 것 같다. 둘은 분명 서로를 알고 있었다.

“앞으로는 엘리아스와 만나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말아 주세요. 앞으로도 쭉…….”

누군가를 거절한다는 것이 그녀에겐 그 무엇보다 힘든 일이었다. 해 본 적도 없고,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싶다는 욕구는 당연하니까.

지금 제게 주어진 상황과는 별개로 엘리아스는 정말 좋은 친구였다. 그래서 벨라는 엘리아스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마지막을 이야기했다.

자신이 좀 더 나은 사람이고, 다른 곳에서 다른 식으로 만났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냥 다 자신이 망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가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거절당하니까 생각보다 마음이 꽤 아프네요.”

서운함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마음을 콕콕 찔러 댔다. 너무 마음이 켕겨서 여전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벨라는 애꿎은 손수건만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한껏 혹사당한 입술이 따끔거렸지만, 생채기 가득한 마음에 비하면 아프다고 느낄 정도도 아니었다.

잠시 후, 침대가 살짝 출렁였다. 무심코 옆을 보니 침대 한쪽에 걸터앉아 저를 보며 빙긋 웃는 엘리아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럼 오늘이 마지막이라 치죠. 마지막이니까, 얼굴 좀 더 보고 가면 안 될까요?”

엘리아스가 오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문득 든 생각에 다시 불안이 짙어졌다. 벨라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문 쪽을 흘긋거렸다.

“시간이…….”

“충분해요. 절대 들키지 않을 테니까, 날 믿어요.”

이상하게 믿음이 생기는 말이라 벨라는 겨우 마음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아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고마워요. 벨라는 늘 저를 좋게 봐주네요.”

“제게 너무 과분한 친절을 베푸니까요.”

엘리아스는 나직이 웃을 뿐 다른 말을 더하지 않았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그는 자연스레 다시 대화를 이끌었다.

“옛날이야기 하나 들려줄까요?”

“동화 같은 건가요?”

“그렇게 몽글몽글한 이야기는 아닌데. 조금 슬픈 동화라고 생각하고 들어요.”

슬픈 이야기라니. 안 그래도 기분이 저 밑까지 가라앉아 있는 터라 그다지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데, 엘리아스가 불쑥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에, 아주 오래전에. 아, 그리 오래전은 아니네요. 고작 이백여 년 전이니까. 아무튼 그때 벨리아르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전혀 생각지 못한 이름이 나오자 순간 눈이 커졌다. 관심 없던 이야기에 절로 신경이 쏠렸다.

“……공작님께요?”

그녀가 몸을 틀어 앉으면서까지 관심을 보이자 엘리아스는 조용히 웃었다.

“이젠 내 이야기에 관심이 좀 생겼나요?”

“……계속해 주세요. 듣고 싶어요.”

그가 사랑하는 사람……. 사랑이라는 감정은 절대 품지 않을 것 같은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라니. 궁금하고, 또 마음이 조금 시렸다.

엘리아스는 정말 동화를 읊어 주는 것처럼 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가 처음 어떻게 여자를 만났고, 그 여자와 어떤 시간들을 보내고, 어떻게 사랑하고, 어떤 미래를 그렸었는지.

듣기 괴로운 이야기들이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의 모습이 지금 자신을 대하는 모습과는 너무 달라서. 이야기를 전해 들을수록 제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비참해졌다.

더군다나 이리 망가진 모습으로 앉아 있으니, 더욱 쓸모없어 버려진 인형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영원하지 않죠. 쉽게 흔들리고, 쉽게 물들고, 쉽게 바뀌니까.”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여자한테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거든요.”

“아…….”

저 말을 듣는 순간, 어떤 마음이 먼저였을까. 분명한 것은 어떤 마음이든 다 못나기만 했다.

“그 와중에 둘이 약속했던 결혼식 날은 점점 다가왔어요. 어차피 축하해 주는 사람도 없던, 둘만의 결혼식이었지만.”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엘리아스의 물음에 문득, 이따금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이 방에 처음 갇혔던 날에도 꾸었던.

“……벨리아르, 나 당신이랑 결혼하는 거…… 싫어. ……아니, 끔찍해.”

“나…… 나 이제 당신 사랑하지 않아. 아니, 애초에 사랑한 적 없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 꿈이 그의 기억 속 한 장면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더라. 아마…….

“여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나요?”

“…….”

내내 부드럽던 엘리아스의 표정이 사뭇 굳어졌다. 그는 말없이 오묘한 시선으로 벨라를 꿰뚫듯 바라봤다.

뭔가 잘못 말했나?

괜히 섣부르게 말해서 엘리아스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건 아닌가 싶어 눈치가 보였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냥…… 넘겨짚어 본 거예요. 혹시 그러진 않았나 싶어서.”

“둔한 줄 알았는데……. 이럴 때 보면 또 촉이 좋은 것 같고. 아니면, 뭐 생각나는 거라도 있어요? 알지 못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다거나.”

벨라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저 꾸었던 꿈이 생각난 것뿐이었다.

“아니요, 없어요. 정말 그냥 찍은 거예요.”

그렇게 말했음에도 여전히 굳은 시선으로 벨라를 바라보던 엘리아스는 이내 풀어지듯 가볍게 웃고 말았다.

“잘 찍었네요. 벨라 말대로 여자는 결국…… 결혼식 날에 벨리아르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왜 그렇게까지…….”

“그만큼 그와 결혼하는 게 싫었겠죠.”

“그래도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인데……. 전 이해가 안 가요.”

“다른 이의 마음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단순히 자신이 꾼 꿈일 뿐인데, 자꾸만 그 애틋했던 상황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자신의 꿈속의 여인은 엘리아스가 말했던 마음과는 조금 달라 보였는데. 왜 그랬을까.

벨라는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이내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 꿈이 제대로 된 기억도 아니고, 정말 단순히 꿈일 뿐인데. 당연히 엘리아스의 말이 더 정확하겠지.

“……그럼 공작님은요? 그 뒤로 공작님은 어떻게 되셨어요?”

“여전히 그 여자를 잊지 못하고, 또 사랑하고 있죠.”

“……지금도요?”

“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쭉.”

못 박듯 확고한 대답에 조금 울적해졌다. 아니, 조금 많이 울적해졌다. 그럼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의 마음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전혀 없다는 뜻이니까.

엘리아스는 조용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허리께에서 노니는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벨라는 그 여자와 닮았어요. 은은하게 보랏빛이 도는 머리카락도 닮았고, 보라색 눈동자도 같아요. 공교롭게도…… 이름도 같네요.”

“이름이 같다고요?”

꿈속에서 그가 제 연인을 ‘벨라’라고 부르던 건 단순히 자신의 꿈이라서 그런 줄 알았다. 동그래진 눈으로 묻자, 엘리아스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아, 내가 그 말을 안 했구나. 그 여자 이름도 벨라였어요. 신기하죠?”

신기한 일은 맞는데…….

살짝 놀란 마음에 멍하니 입만 벙긋거리고 있자 엘리아스는 지분거리던 머리칼을 한 줌 쥐어 그녀의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래서 벨리아르는 당신을 지나치지 못했을 거예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과 닮았으니까.”

……아. 그래서 그날 나를 살려 두었구나.

분명 그는 제 권역에 멋대로 들어온 사람을 살려 둘 성정이 아닌데, 나중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여자를 닮은 사람이 또 한 명 있었어요.”

“……누군데요?”

“폐위된 프리스틴 황녀요. 당신이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닮고 이름이 같다면, 프리스틴은 그 여자와 생김새가 좀 닮았었어요. 단순히 우연이겠지만.”

벨라는 내내 의미 없이 만지작거리던 손수건을 꽈악 쥐었다.

“벨라, 내가 왜 이 이야기를 당신에게 해 주는 건지 알아들었어요?”

벨라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다. 아니, 알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순간 엘리아스의 입을 막을까, 아니면 제 귀를 막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의 선명한 목소리는 속절없이 그녀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애초에 벨리아르가 당신에게 주었던 모든 것은 당신이 그의 첫사랑과 닮았기 때문이라고요. 내가 말했잖아요. 그의 마음이 절대 진심일 리 없다고.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건 오로지 옛 연인뿐이에요. 당신은 그 대용품일 뿐이고.”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감히 그의 마음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수없이 되새겼지만, 사실 수 없이 기대하고 있었다.

그가 저를 다정한 손길로 다독여 줄 때마다, 마치 소중하다는 듯 부드러운 입맞춤을 할 때마다, 순간순간마다 기대하고 바스러지길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크고 반짝거렸던 제 마음은 어느새 투박하게 뭉그러져 못난 조각이 되고 말았다.

그 마음조차 소중해 꾸역꾸역 끌어안고 있었더니, 결국 이리저리 찔려 온통 피투성이다.

“벨리아르가 프리스틴에게 약했던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결국은 가차 없이 버렸잖아요. 왜 그랬을 것 같아요?”

엘리아스는 빙긋 웃으며 또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 벨라는 그 답을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당신을 찾았으니까.”

엘리아스는 제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빗어 내렸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새로 마음에 드는 인형을 찾았으니까, 헌 인형은 버려야죠.”

……결국 프리스틴 황녀도 저도, 모두 그가 잊지 못한 연인의 대용품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벨라도 항상 긴장해요. 또 어디서 새로운 대용품이 나타나 그의 관심을 끌어갈지 모르잖아요. 그럼 그땐…….”

당신도 프리스틴처럼 버려지겠죠.

엘리아스는 말끝을 흐렸지만, 분명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대가를 받아 가지 않았네요. 오늘이 마지막일 텐데.”

제 속을 마구잡이로 휘저어 놓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말투였다.

“……제 소중한 기억이나 마음을 받아 간다고 하셨죠.”

“네. 잘 기억하고 있네요.”

소중한 기억이나 마음……. 여태껏 엘리아스에게 대가로 줄 것을 정하지 못했었다. 소중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뿐이어서.

비록 거짓이었겠지만, 그가 저를 데리고 나가 꽃을 사 주었던 날의 기억은 아무리 할퀴어도 찬란한 빛을 잃지 않았다.

품고 있을수록 아프기만 한데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기억마저 없으면…….

“그렇게 괴로워요? 그 기억이 사라지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것 같아요?”

엘리아스가 나긋한 목소리로 묻자 벨라는 입술을 꾹 짓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기도 했다.

“……못하겠어요. 그 기억이 없어지면…… 온통 괴로운 기억뿐이잖아요. ……자신이 없어요.”

그는 조용히 웃으며 그녀의 손 위로 제 손을 얹었다.

“그럼 그냥, 그를 온전히 지워 버리는 방법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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