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하아……. 돌겠네, 정말.”
“그래서 땅이 꺼지겠어?”
높고 두꺼운 방문 너머로 희미한 말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다른 이의 목소리조차 이리 반갑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탁하게 가라앉아 있던 벨라의 보랏빛 눈동자에 살짝 이채가 돌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갑자기 확 작전을 뒤집는 게 어딨냔 말이야. 우리는 그저 체스보드 위의 말일 뿐인 거지. 이렇게 무식하게 정면 돌파하는 법이 어딨어?”
“……쉿, 목소리 좀 낮춰. 요즘 분위기 형형한 거 몰라?”
“답답해서 그런다, 답답해서. 그리고 내가 없는 말 지어냈어? 안 그래도 지금 우리 어머니 걱정 때문에 속 타 죽겠구만.”
“고향이 셀리온이었지?”
셀리온……. 언젠가 에릭에게 얼핏 들은 적이 있는 곳이다. 모르가타와 맞붙어 있는 접경지역이었다.
“……그래. 거기 우리 가족들이 다 있어. 어머니가 노쇠하셔서 거동도 불편하신데…….”
“각하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만…… 나도 사실 이번 전쟁은 회의적이긴 해. 당연히 그렇게 정면으로 맞붙으면 전쟁은 빠르게 끝낼 수 있겠지.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다치는 방법이야.”
가만히 기사들의 대화를 엿듣던 벨라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에릭이 분명 제국민들이 최대한 다치지 않는 쪽으로 전쟁의 판을 움직일 거라고 했다. 그래서 시일이 조금 더 걸려도 민가가 있는 곳을 피해 전투를 벌일 것이라고.
“주인님께서도 굳이 정면 돌파를 택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제국민들의 원성을 사는 건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이니까요.”
그런데, 왜…….
“셀리온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 정도야 각하껜 간지러운 정도지. 신경이나 쓰실까?”
몇 달간 성에서 지켜본 바, 기사들은 그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다. 그러나 지금 하소연하는 기사의 말엔 은근한 원망이 드러났다.
“……가족들한테 연락은 넣었어?”
“넣긴 넣었는데, 무사히 닿을지는 모르겠어. 지금 셀리온으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다고 하더라고. 무사히 도착하길 기도해야지.”
“그래도 폐하께선 제국민들을 챙기실 테니, 따로 셀리온에 지시하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미리 그 지역의 사람들을 대피시킨다 하더라도 그 많은 사람을 움직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루 만에 되는 일도 아니고.
게다가 모르가타에서 언제 치고 들어올지 모르니 시간이 충분한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당장 오늘 밤 평화롭던 셀리온이 불바다가 되고, 피와 시체가 즐비한 지옥이 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삶의 터전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평민들이 참혹한 전쟁통에 휘말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고, 또 불가피했다.
“하아, 이게 다…….”
자신의 탓이다.
기사는 원망의 대상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말끝을 흐렸지만, 벨라는 이 전쟁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제 어리석은 행동 하나가 이런 재앙을 불러온 것이다. 벨라는 헛숨을 토해 내며 고개를 떨궜다.
“됐어. 어차피 벌어진 일이야. 우리는 오로지 전쟁의 승리만 생각하면 돼.”
저 때문에 애꿎은 토끼가 죽고, 하녀는 팔을 다쳤다. 그리고, 치치가 죽고……. 황제 폐하께서도 변을 당하셨지.
다음으로는 모르가타의 왕자가 손목을 잃었다. 과한 응징이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그저 그런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었을 텐데.
그것들로 모자라 이젠 죄 없는 사람들이 전쟁에 휘말려 죽어 나갈 차례였다. 이 모든 것이 다 자신이 불러일으킨 재앙이다.
“보라색 눈의 마녀가 나타나 황제를 시해하려고 했다. 황제를 죽이고, 결국은 제국을 멸망의 길로 이끌 것이다.”
세간에서 떠도는 말을 황태자가 전해 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제국을 멸망의 길로 이끈다, 라……. 앞으로 자신이 또 어떤 재앙을 초래할까 싶어 두려웠다.
혹여 자신이 그를 망가트리고 있는 건 아닐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예언이 정말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정말 소문 속의 마녀고, 이런 식으로 그를 망가트리다가 결국 제국까지 무너트리는 건 아닐까.
그동안엔 단순히 보랏빛 눈동자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를 경멸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들이 나쁜 거라고.
그럼, 세상 사람들은 다 악한 걸까? 자신은 그저 억울하게 괴롭힘당하는 걸까?
어쩌면…… 그 반대가 아닐까 싶다.
마녀란 사람들의 생각처럼 특별하고 대단한 힘을 지닌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 별거 있나? 불행을 불러오고, 예언대로 흘러가면 그게 마녀겠지.
“하…….”
벨라는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헛숨을 터트렸다.
그래, 나는 마녀였구나.
* * *
타닥, 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벨라는 침대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멍하니 벽난로를 바라봤다.
일렁일렁 나무를 끌어안고, 천천히 새까만 재로 물들이는 불길은 가만히 보다 보면 아주 잔혹했다.
‘어머니도 저렇게 나무에 묶여, 불길에 휩싸였었는데.’
이를 악물고 버티던 어머니는 끝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끔찍한 마녀의 모습으로 변해 갔다.
……나도 그렇게 될까?
벨라는 힘없이 구부러진 손끝으로 불길 위를 덧그렸다. 금방이라도 화마가 손을 휘감고 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그러다 그 마녀처럼 내게 잡혀서 불에 타 죽을 수도 있겠다.”
언젠가 그가 제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은 진심이었을까? 어떤 표정으로 그리 말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저를 화형대에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느새 식은땀이 배어 나와 축축해진 손을 말아 쥐자 차가운 손끝이 살을 파고들었다. 점점 살갗이 서늘하게 물드는 듯해,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파묻었다.
혹한의 설원 위에 내던져진 듯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춥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레 열기를 머금고 치솟는 불길이 떠올랐다.
타닥, 타닥.
거센 불길에 나무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덩달아 심장 박동도 거세지며 걷잡을 수 없이 커다란 소리로 온몸을 울려 댔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가 제 목을 움켜쥐어 뜨거운 불길 속으로 처넣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벨라는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더욱 몸을 웅크리고 귀를 틀어막았다. 그래도 타닥거리는 장작 소리가 귓가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벨라.”
그 순간, 누군가 살며시 어깨를 쥐며 부르는 목소리에 벨라는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싫어! 싫어요, 제발…….”
공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도 더욱 어디론가 숨어들고 싶어 발악했다. 그녀는 하염없이 고개를 내저으며 알아듣기 힘든 말들을 중얼거렸다.
“잘못했어요……. 불은 싫어요. 끔찍해…….”
그녀의 상태를 보며 조용히 눈가를 찌푸린 엘리아스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단호히 흔들었다.
“벨라!”
엘리아스를 봤음에도 벨라는 제 상념에서 비롯된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시, 싫어요……. 저는 화형당하기 싫어요! 그렇게…… 그렇게, 고통스럽게 불에 타 죽고 싶지 않다고요…….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정신 차려요, 벨라. 나예요. 고개 들고 똑바로 봐요.”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아.”
그제야 벨라는 아픈 듯 눈가를 찌푸리며 숨을 들이켰다. 흐릿하던 눈동자에 점점 빛이 서렸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엘리아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엘리아스.”
“그래요, 엘리아스.”
그는 벨라가 멍하니 부른 제 이름을 되짚으며 확언해 주었다.
“엘리아스…….”
“네. 그가 아니니 안심해요. 천천히 숨 내쉬고.”
그제야 어지럽게 날뛰던 정신이 차츰 제자리를 찾았다. 벨라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꿈이 아닌 거죠?”
“괜찮아요? 꼴이 말이 아니네.”
엘리아스는 걱정스레 물으며 땀에 젖어 그녀의 뺨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 주었다. 하지만 벨라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꿈이…… 아니라고 말해 주세요.”
“꿈 아니에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단단히 숨기고 들어왔으니, 그가 알아채지도 못할 거예요. 그러니까 안심해요. 문밖에 지키고 있던 기사들도 재워 뒀으니까 걱정 말고요.”
그 말에도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떨리는 눈동자가 문 쪽을 흘긋거렸다. 눈을 마주친 엘리아스가 입꼬리만 휘어 싱긋 웃어 주자 그제야 미약한 안도가 스몄다.
벨라는 탁 풀어지듯 숨을 내쉬며 두 손에 고개를 묻었다. 이어 지친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제 꼴이 너무 추하죠.”
“인간은 나약해서 망가지기 쉬워요. 그리고 생각보다 티가 나지도 않고요. 벨라도 썩어 문드러진 속만큼 겉이 그렇게 나빠 보이진 않아요. 그냥, 조금 지쳐 보이네요.”
조금 지쳐 보인다는 말이 웅크려 있는 서러움을 그토록 쥐고 흔들 줄 몰랐다. 별것도 아닌 말에 쉽게 감정이 일렁였다.
결국, 벨라는 손에 고개를 묻은 채 조용히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엘리아스가 난처한 듯 눈썹을 기울였다.
“아, 울리려고 한 말이 아닌데.”
벨라는 황급히 눈물을 닦아 내며 울음을 삼켰다.
“……죄송해요. 얼른 그칠게요.”
괜히 꼴사납게 우는 모습을 보여서 엘리아스가 화를 낼까 봐 걱정되었다. 더불어 울음 그치라고 매섭게 다그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벨라는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고 눈을 질끈 감아 울음을 멈추려 애썼다. 그러자 엘리아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사과하라는 말도 아니었어요. 억지로 눈물을 참을 필요도 없고. 잠시 울래요?”
엘리아스는 부드럽게 물으며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벨라는 그가 내민 손수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을 감으며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받아 든 손수건은 엘리아스만큼이나 따듯했다.
“그냥 펑펑 울어요. 참지 말고.”
펑펑. 그의 말대로 벨라는 정말 아이처럼 소리 내어 펑펑 울었다. 그래 봤자 평생의 버릇이 남아 있어 그리 큰 소리를 내지도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 울었다.
그간 마음껏 울어 본 적이 없어서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나 실컷 울 수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그냥 짧게 울고 말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 눈물이 끊임없이 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