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그녀는 무릎 위로 가지런히 놓은 손을 천천히 말아 쥐었다. 그러곤 남은 용기를 끌어모아 겨우 말을 붙였다.
“혹시…… 밖에서 기분 안 좋은 일 있으셨어요?”
“글쎄.”
“저…… 공작님 안아 드리고 싶어요. 아니면 저를 안으셔도 좋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에 말끝이 흐려졌다. 그는 그제야 책을 손에서 놓고 그녀에게로 몸을 틀었다.
“안아 달라고? 이젠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가르친 보람이 있네.”
절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다분히 노골적인 말에 그녀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확 달아올랐다.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제가…….”
허둥지둥 말을 덧붙이는 사이, 그가 눈짓으로 제 밑을 가리켰다.
“가까이 와.”
벨라는 잠시 머뭇거리다 무릎을 움직여 앞으로 조금 나아갔다. 그의 발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면, 지금은 발끝에 닿을 정도였다. 그 상태로 올려다보니 그는 설핏 인상을 찌푸리며 나직이 지시했다.
“더.”
여기서 더 가려면…… 그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야 했다. 전날의 악몽 같은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가며 피가 식었다. 피가 굳어 딱지가 앉은 입가의 상처가 따끔거렸다.
머뭇거리는 찰나의 시간마다 숨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거세졌다. 결국, 벨라는 눈을 질끈 감고서 그의 안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굵은 손마디가 머리칼을 얽으며 들어와 뺨을 감싸 쥐었다. 그는 다정히 뺨을 쓰다듬으며 지그시 힘을 실었다. 자연스레 그의 허벅지로 뺨을 기댄 꼴이 되었다.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옅게 웃었다.
“네 자리는 딱 여기야, 벨라.”
나긋한 목소리가 몽롱하게 번졌다. 코끝으로 스미는 그의 체취는 마치 피를 잔뜩 머금은 거대한 나무 같았다.
저를 쓰다듬는 이 손에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을까. 가늘게 내뱉은 숨이 잘게 떨렸다.
자신이 알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본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를 향한 소문들은 다 잔혹하기 그지없었으니. 요즘 그는…… 악마라고 부르기에도 모자랐다.
“이리 먼저 와서 무릎 꿇으니까 예쁘네.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해. 내 기분 풀어 주려고 그런 거야?”
“……네.”
“기특하네.”
그의 입매가 비스듬히 휘어졌다. 그 미소를 보니 숲에서 그의 손에 잡혔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그는 이리 잔혹하게 웃었다.
“그럼 더 해 봐. 아직 내 기분이 풀리려면 멀었어.”
뭘 어떻게 더 하라는 건지 몰라, 벨라는 그를 올려다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벨라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안기기라도 할까. 그는 자신이 먼저 품으로 안겨드는 것을 즐겼으니까.
어떻게 할지 정한 벨라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으나 무언가 발목을 콱 붙잡는 바람에 휘청이며 다시 엎어졌다.
아, 족쇄.
뒤늦게 차가운 쇳덩이의 존재를 상기하고 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발이 족쇄에 연결된 사슬을 빠듯하게 밟고 있었다.
“네 자리는 여기라고 했을 텐데.”
“아…….”
그제야 그가 제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깨달았다.
그는 벨라의 뒷머리를 움켜쥐고서 제 아래쪽으로 꾹 눌렀다.
“흐윽.”
짧게 신음하는 벨라의 위로 서늘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배웠잖아. 다시 가르쳐야 할까?”
벨라는 삽시간에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짓씹었다. 진득한 모멸감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 오므라든 발끝까지 전해졌다.
억지로 그의 손에 휘둘릴 때가 차라리 나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직접 움직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잔인한 지시였다.
“공작님…….”
벨라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애원하듯 부르자 그는 움켜쥔 머리칼을 잡아당겨 고개를 젖혔다.
절망과 공포, 그리고 지독한 모멸감이 스민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일렁였다.
“안 움직여?”
“모, 못하겠어요…….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뭐. 도와줘? 어떻게 도와줄까.”
그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저를 바닥까지 끌어내리려는 모습에 일순 공포가 목을 죄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 엽서들을 들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애초에 태워 버렸어야 했는데.
고작 손바닥만 한 그 그림이 아깝고 욕심이 나 헛된 짓을 했다. 왜 항상 제겐 작은 욕심조차 허락되지 않을까.
엘리아스와 처음 만났던 날, 그에게 사실대로 말했다면 지금과는 달랐을까.
이제 와 생각해 봤자 무의미한 가정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가만히 순응하면 그의 화가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했다. 며칠만 견디면, 저를 이 방에서 꺼내 줄 거라고.
“앞으로 평생, 너는 오로지 나만 보며 살아가야 한다는 거지.”
그는 제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었지만, 저 말만큼은 거짓일 거라 믿었다.
벨라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대로 가다간 그가 정말 저를 짓밟아 망가트릴 것 같았다.
그러다 속이 터지면 꿰매고, 또 터지면 또 꿰매고. 평생 이 방 안에 갇혀 그의 욕정을 받아 내는 인형으로 살기는 싫었다.
결국, 조용히 흘러내린 눈물이 뺨을 적셨다.
“……공작님,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그는 제 허벅지 위를 이리저리 배회하며 바들바들 떨리는 작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바지를 꽉 쥐었다가, 또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서는 손이 제법 애처로웠다.
그 손을 다정히 붙잡아 손등에 입을 맞춰 주고 싶기도 했고,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꽉 쥐고 싶기도 했다. 겉으론 건조한 물음이 더해졌다.
“뭘 잘못했는데.”
“다시는 공작님을 속이지 않을게요. 이번에도 절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냥 단순히 이야기만 나누었을 뿐이에요. 공작님을 속이려고 하거나 그런 건……. 아무도 만나지 말라고 하시면 그렇게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이곳에서 나가게 해 주세요…….”
막혔던 둑이 무너진 것처럼 울음에 뭉개진 말이 술술 넘쳤다. 범람한 서러움이 그의 마음까지 적셨을까.
그가 아무런 반응 없이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자 벨라는 불쑥 애가 달았다.
여전히 사슬이 짧아 발목은 움직일 수 없으니, 무릎을 딛고 반만 일어선 채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저 때문에 많이 화나셨다는 거 알아요. 그래서 최대한 참으려고 했는데…….”
그는 울먹거리며 조곤조곤 말하는 벨라의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제 품에 파묻은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고, 어디 하나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그는 마땅히 그녀를 끌어안은 채 부드러운 머리칼을 지분거리며 태연하게 토로했다.
“나도 조금 아쉽긴 해. 우리 벨라는 참 쓸모가 많았는데. 밖에 풀어 두니 왕자를 꾀어내서 이렇게 제국에 좋은 기회도 가져다주고, 이안 에드레이즈 같은 훌륭한 인재도 끌어오고.”
안타깝지만, 그는 벨라를 이곳에서 내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유롭게 두면 또 어떤 것을 그 사랑스러운 마음에 품으려고. 비틀린 생각이 또 멋대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단정한 입매가 비스듬히 휘어 올라갔다. 무엇을 떠올리는지 붉은 눈동자 역시 점점 짙어졌다. 머나먼 기억을 투영할수록 그날의 분노가 오랜 시간을 가로질러 고스란히 현재로 넘어왔다.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손길이 급격히 돌변해 뒷머리를 확 움켜쥐었다. 그는 집어삼킬 듯 벨라의 눈을 맞추며 사납게 몰아세웠다.
“엘리아스한테도 이딴 식으로 굴었어? 예쁘게 웃고, 아양 떨면서 안겨들고?”
“……엘리아스와 저는 정말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그저 친구일 뿐이었…….”
친구라는 말에 그가 대놓고 헛웃음을 흘렸다.
“아, 친구. 우리 벨라한테는 친구의 의미가 조금 다른 모양이네. 이렇게 예쁘니까 자꾸 주위에 벌레 새끼들이 꼬이나 보다. 그 사내새끼들이랑 다 친구란 말이지?”
뒷머리를 움켜쥔 손에 빠듯이 힘이 들어갔다. 벨라의 얼굴이 옅게 일그러졌다.
“흐윽……. 공작님, 아파요…….”
“엘리아스 그 새끼가 뭐라 하던. 이번에도 날 죽이고 저랑 살자고 해? 칼은 어디에 숨겼지?”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저랑 엘리아스는 정말 단순히──!”
사슬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그는 벨라를 일으켜 세워 침대로 끌고 가 내던졌다.
“옷 벗어.”
갑작스러운 명령에 벨라는 제 옷자락을 꽉 그러쥐었다. 오늘은 무사히 넘기나 했더니. 또다시 그를 받아 내야 한다고 생각하자 울음이 목 끝까지 차올라 숨을 막았다.
“그놈이 준 칼을 숨기고 있을 거 아니야. 확인해 봐야겠으니까 벗어.”
대체 왜 자꾸 자신이 엘리아스에게 칼을 받았다고 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는 매번 거칠게 저를 안으며 엘리아스에 대한 말을 했다.
이럴 땐 그저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것이 그를 자극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숱한 경험으로 터득했다.
벨라는 꾸역꾸역 치미는 울음을 삼키며 손을 움직였다. 최대한 손끝에 힘을 주어도 멋대로 떨려 대는 통에 옷을 벗는 속도가 한없이 느릿했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 손길을 더하지 않았다. 살이 드러날 때마다 그의 눈빛이 뜨겁게 달라붙었다. 그는 손을 대지 않고도 제 목을 틀어쥐고 숨통을 죄었다.
얇은 속옷만 남았을 때, 벨라는 머뭇거렸다. 애원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니 느릿하게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벗어.
무언의 지시가 내리꽂혔다. 스스로 옷을 벗고 있으니 질척한 흙바닥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기어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되었을 때, 그는 더욱 잔혹한 지시를 내렸다.
“엎드려.”
“공작님……!”
“말 안 들어? 자꾸 두 번 말하게 하지.”
굳이 그를 거역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자 큼직한 손이 단번에 그녀의 허리를 잡아챘다.
그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벨라를 손쉽게 뒤집어 엎드리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