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겁먹은 채 얼어붙어 있는 벨라를 노려보던 그는 이내 화를 삭이려는 듯 깊은숨을 내쉬었다.
“밖에 다녀올 테니까 소화시키고 있어.”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곤 또다시 그녀를 방 안에 홀로 두고 나가 버렸다. 서러움이 북받친 벨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밥을 먹이니 먹었고,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싫은 내색도 하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원래도 그랬지만, 요즘은 정말 그의 속내를 조금도 헤쳐 볼 수 없었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폭풍의 한가운데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벨라는 침대에 올라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은 채 하염없이 밀려드는 슬픈 기분을 꾸역꾸역 삼켰다. 소화되기는커녕 급히 삼킨 우울 때문에 체할 지경이었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지 희미하게 정신이 돌아왔다. 분명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가지런히 이불까지 덮고 누운 채였다.
힘없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곁에 앉아 저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큼직한 손이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선 이마를 덮었다. 단순한 손길에 또 버릇처럼 기대하고 희망을 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구제 불능이었지만, 이미 저는 철저히 그에게 길들어 버렸다.
“벨라, 기분이 어때.”
그가 눈을 감기듯 눈두덩이 주위를 살살 매만졌다. 그 손길을 따라 나부낀 머리칼들이 연한 피부를 간지럽혔다. 벨라는 손으로 긁는 대신 그의 손에 이마를 살짝 비볐다.
“……창문이 없어서 답답해요. 지금이 몇 신 줄도 모르겠고……. 그래서 조금 우울해요.”
사실은 매우 슬퍼요. 혼자 있으면 그냥 울고만 싶고, 공작님이 어서 빨리 저를 꺼내 주셨으면 좋겠어요. 밖에 나가서 바람을 맞고 싶어요.
기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가 좋아하지 않을 말들을 골라내고 나니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렇게 고르고 골라 말을 해 놓고도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더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가녀린 발목을 감싼 투박한 족쇄를 만지작거리며 짧게 물었다.
“이건.”
“불편해요. 무거워서 발목도 아프고요.”
벨라는 그가 허락한 범위 내에서만 투정을 부렸다. 그의 심기가 불편해지지 않을 정도로만.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그의 화를 돋우지 않는 방법들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어떻게 하면 그의 화가 가라앉을지도.
그는 희미하게 입매를 비틀며 낮게 중얼거렸다.
“불만이 많네.”
그 말에 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벨라는 다급히 말을 골랐다. 정신없이 돌아간 머릿속치곤 제법 느릿한 말투였다.
“……그래도 괜찮아요.”
“괜찮다고?”
“네, 제가 잘못한 거니까…….”
이런 시간을 버텨 내어 그의 기분이 풀어진다면 얼마든지 순응할 수 있었다.
“…….”
벨라는 무심코 떠올린 생각을 조금 고쳤다. 얼마든지까지는 아니고…… 앞으로 조금, 조금은 더 버틸 수 있다고.
그녀가 홀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벨리아르는 나직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정말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괜찮다고.
그녀의 대답을 입안에서 한 번 더 굴려 보니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태까지 벨라는 정말 착하게도 제 말에 순응했고, 단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았다.
이리 가둬 두고 묶어 두는데도 괜찮단다. 저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 풀어 달라고 난리 쳐도 모자랄 판에.
변명하지 말라며 입을 틀어막은 건 저였지만, 모순적이게도 그녀가 제게 뭐든 변명하길 바랐다.
엘리아스와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그런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고, 모두 제 오해라고.
그것이 설령 모두 거짓이더라도, 그래도 그 말이 듣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 변명을 종용하지 못하는 것은……. 벨라는 이미 한 번 저를 배신한 적이 있었다. 한번 똬리를 튼 불신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엉켜 들었다.
“……나, 당신을 만난 걸, ……후회해.”
그녀는 알까. 숨을 놓는 마지막 순간에 쥐어짜 낸 그 말이 이토록 오래 살아남아 숨 쉬는 줄.
먼 날의 기억을 떠올리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지독한 배신감에 흐려진 이성이 곧장 몸을 움츠렸다. 그는 거칠게 벨라의 어깨를 쥐고 침대로 내리눌렀다.
“잘못했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겠네. 그렇지?”
아픔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벨라는 입술을 짓씹을 뿐, 다른 말을 더하지 않았다.
먼지처럼 날아다니는 이성이 상처로 붉어지는 입술을 보며 가벼이 날뛰었다. 하지만 워낙 무게가 가벼운지라, 그의 뒤틀린 마음을 돌려놓기엔 역부족이었다.
“내게 더 할 말 있어?”
말해. 엘리아스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나를 속인 것이 아니라고. 나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고.
“……없어요.”
없다고. 벨리아르는 그녀의 대답을 또 한 번 곱씹었다. 이토록 예쁜 벨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조리 버석한 모래알처럼 텁텁하고 깔끄러웠다.
그는 한 손으로 벨라의 가녀린 두 손목을 그러쥐어 머리맡으로 고정하곤 위로 올라타 움직이지 못하도록 몸을 눌렀다. 이어 다른 손으로는 턱을 쥐어 저를 보도록 만들었다.
“입 벌려.”
살짝 힘을 주자 작은 입이 맥없이 벌어졌다. 그는 슈미즈를 걷어 올려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
“흐, 으읍……!”
그의 아래 깔려 버둥거리느라 사슬에서 철그렁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입이 막힌 채 그를 올려다보는 벨라의 눈매가 서러움이 가득 차올라 눈물로 뭉개졌다.
그는 벌써부터 겁을 먹고 그렁그렁한 눈가를 손끝으로 지그시 눌렀다. 뒤이어 퍽 다정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지금은 좀 참아야지. 많이 울게 될 텐데, 벌써부터 이러면 목쉬어.”
또 다른 지옥의 시작이었다.
* * *
“뭐라고?”
서늘한 일갈에 에릭은 잠시 숨을 골랐다. 저 역시 이런 말을 다시 꺼내고 싶진 않았지만, 주인께서 되물었으니 답을 해야 했다.
“이안 에드레이즈를 풀어 전쟁에 참전시키는 건 어떻겠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놈을 살려 둬라? 언제 찢어 죽일까 고심하던 참인데.”
에릭은 벨리아르 앞에만 서면 자신을 과소평가하곤 했다. 밖에선 정중한 망나니처럼 굴어도 주인 앞에서는 긴장하고 공손해진다고.
그건 분명한 착각이었다. 에릭은 벨리아르 앞에서도 가끔, 때때로 혀 밑에 품은 칼을 잘 숨기지 못했다.
누군가 그 냉소적인 말투를 탓해도 어쩔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자라며 보고 들은 것이 오로지 벨리아르 공작인데 어쩌겠는가.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죽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찢어 죽이는 건 고심만 하셨죠. 속으로는 이미 몇천 번이고 찢어 죽이셨는데, 막상 실행에 옮기진 못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가씨 때문에요.”
“에릭, 내가 지금 널 봐줄 만한 상태가 아니야.”
그래도 에릭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존재가 그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가 이마를 짚으며 나직이 경고하자 에릭은 얼른 본론을 덧붙였다.
“최전방으로 배치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전쟁에 나가서 죽는 건 기사로서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입니다. 누구는 명예로운 일이라고도 하죠. 그러면 아가씨께서도 슬퍼하시긴 하겠지만, 주인님을 원망하진 않을 겁니다. ……주인님께선 아가씨께 미움받는 게 두려우신 것 아닙니까.”
에릭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벨리아르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오늘 도가 지나치게 건방지다는 생각은 안 들어?”
그저 태도만 나무라는 것을 보니 제안이 아예 통하지 않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에릭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조금 더 욕심내어 살짝 벨라의 근황을 물어보려던 에릭은 빠르게 마음을 접었다.
“제게 화풀이를 해서 기분이 나아지신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십시오. 또한, 제가 주인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그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여전히 입만 살아서.”
* * *
점점 그가 주는 벌이 버거워졌다. 이 방에 갇힌 지 며칠째더라……. 하도 정신을 잃었다 깨기를 반복하니 시간 개념이 완벽히 사라져 버렸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다양하고 잔혹하게 벨라를 탐했다. 한번 시작하면 기어코 정신을 잃고 쓰러질 때까지 몰아붙이니 벨라는 점점 색을 잃은 낙엽처럼 생기가 사라졌다.
여느 때처럼 예고 없이 방문이 열리자 벨라의 몸이 흠칫 굳어졌다. 그녀는 옆으로 누운 자세 그대로 시선만 들어 올렸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가 저를 옭아매자 혀가 굳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자 벨라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숨을 죽였다. 높낮이 없는 건조한 음성이 귓가로 파고들었다.
“공작님, 오셨어요, 해야지.”
그의 말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곤 겨우 입을 움직여 목소리를 냈다.
“……공작님, 오셨어요…….”
말을 할 때마다 혹사당해 찢어진 입가가 쓰라렸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짧게 칭찬했다.
“옳지.”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자연스레 아래로 내려왔다. 동그란 이마를 지나 오뚝하게 솟은 콧등을 쓸고, 기어코 입가의 상처로 닿았다.
살살 매만지던 손길에 서서히 힘이 실렸다. 결국, 아픔을 참지 못한 벨라가 짤막하게 신음을 흘렸다.
“아…….”
“아파?”
“네.”
묻고 대답한 것이 무색하게 그는 일부러 입가의 상처를 뭉근하게 괴롭혔다. 감히 그의 손을 쳐 낼 순 없으니 조심스레 말을 꺼내 보았다. 그럼 손을 거둬 주지 않을까 싶어서.
“오늘은…….”
“오늘은 뭐.”
그가 까슬하게 대꾸했다. 다행히 상처를 지분거리던 손은 떨어졌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원래는 오늘은 왜 저를 건드리지 않냐는 질문을 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그런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듯싶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뒤로도 그녀의 상태를 이리저리 살핀 그는 말없이 방 한쪽에 놓인 테이블로 가 자리를 잡았다. 이어 태연히 다리를 꼰 채 차를 따르곤 책을 펼쳐 들었다.
불안에 떨리는 시선으로 그 모습을 좇던 벨라는 이내 조용히 이불 속에 몸을 파묻었다. 따끈한 차향이 금세 번져 방 안을 은은히 덥혔다.
오늘은 왜 이리 쉽게 물러서실까. 혹시, 하루는 쉬게 해 주려는 걸까? 아니면, 지금 제 태도를 시험해 보고 있다거나…….
그와 한 공간에 있으니 온갖 상념이 덮쳐드는 바람에 편히 쉴 수도 없었다. 그동안 그가 그녀의 몸에 새겨 놓은 공포는 착실히 제 역할을 다했다.
결국, 벨라는 천 근 같은 몸을 일으켜 조심스레 침대 아래로 발을 디뎠다. 몇 걸음 안 되는 짧은 거리인데도 이리 걷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벨라는 가만히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공작님.”
“왜.”
그는 벨라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성의 없이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