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공작님.”
퍽 다정했던 물음과 달리 다가와 턱을 쥐는 손길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벨라가 아파서 살짝 고개를 빼려 하자 그는 단호한 힘으로 턱을 들어 올렸다.
“흣…….”
“고개 돌리지 말고 똑바로 눈 마주쳐.”
서릿발 같은 음성이 내려앉았다.
차라리 시선을 마주치지 말라고 지시했다면 쉬웠을 텐데, 그는 불안과 공포에 얼룩진 눈동자를 얽매는 것을 즐겼다.
두려움에 자꾸만 아래로 향하려는 시선을 애써 그에게 두었다. 반사적으로 눈가에 차오르는 물기가 지금만큼은 반가웠다. 베른의 겨울을 닮아 매섭게 시린 저 눈동자가 조금이라도 흐릿해진다면.
그는 또다시 차분해진 목소리로 조목조목 말을 이었다.
“잘 들어, 벨라. 이제부터 네 방은 여기고, 에릭은 더 이상 널 살피지 않을 거야. 식사든 무엇이든 모두 내가 챙길 거고, 너는 여기서 나갈 수 없어. 문 앞은 항상 기사들이 지키고 있을 테니 허튼 생각 하지 마.”
벨라가 물기 어린 눈을 몇 번 깜빡이자 눈물이 조용히 동그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손끝으로 눈물방울을 훔치곤 동그란 뺨을 톡톡 건드렸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그가 말한 것들이 작은 조각들로 부서져 마구 흩어졌다. 별로 주워 담고 싶지 않은 조각들이었다.
“……조금은요. 그러니까…… 절 여기에 가둬 둔다는 말씀이시잖아요.”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살짝 엇나간 답을 올바르게 고쳐 주었다.
“앞으로 평생, 너는 오로지 나만 보며 살아가야 한다는 거지.”
이제야, 그가 소문대로 살짝 미쳐 보였다.
* * *
“에드윈…… 아니, 폐하께서는 모르가타와의 분쟁을 하루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 하십니다. 아무래도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이런 일이 부담스러우신 거겠죠.”
에릭은 버릇처럼 황제의 이름을 불렀다가 로드릭의 존재를 의식하고 빠르게 말을 틀었다.
전혀 실수한 적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이어지는 말투가 상당히 뻔뻔했다. 물론, 로드릭의 생각이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페렌과 부딪칠 북쪽은 상대적으로 경계가 허술할 겁니다. 그래서 모르가타와의 접경지역엔 적당히 형식만 갖춰 군사를 보내고, 저희는 페렌 쪽으로 향하면 어떨까 합니다.”
이번 전쟁은 모르가타에선 단순히 국가적인 위상을 세우기 위한 수단일 뿐이겠지만, 제국 입장에선 달랐다.
언제 먹잇감이 미끼를 물까 기회만 노리고 있던 맹수로선 달려드는 먹잇감을 맛만 보고 놔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제국의 목적은 이번 기회에 모르가타의 수도까지 파고들어 제국에 유리한 협약을 맺는 것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섣불리 바깥으로 튀어나오면 어떻게 되는지 톡톡히 알려 줄 심산이었다.
지도를 살펴보던 로드릭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굳이 페렌과 맞붙으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페렌은 저희와 진심으로 싸울 생각이 없을 테니까요. 거래를 할 겁니다. 모르가타의 수도는 페렌과도 인접해 있으니 길을 열어 준다면 불필요한 유혈 사태는 일으키지 않겠다고요. 물론, 페렌의 셋째 공주의 안위는 보장해 주어야겠죠. 모르가타엔 대충 둘러대면 되니 페렌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일 겁니다.”
에릭의 작전을 가만히 듣고 있던 벨리아르가 지도에서 페렌 위에 세워진 깃발 모형을 가져갔다.
“페렌은 높은 산맥들이 많아 가로질러 가는 데에 시일이 너무 오래 걸려. 모르가타 하나 상대하는 데 굳이 시간 들여 돌아갈 필요는 없지.”
이번 전쟁을 완벽히 끝내려면 모르가타의 수도로 입성해야 하는데, 산맥에 막힌 곳이 많아 페렌을 통해 가거나 서쪽 국경을 무너트리는 수밖에 없었다.
에릭은 흘끗 그의 표정을 살폈다. 이미 제 주인은 결정을 마친 상태고, 그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방안이 있으십니까?”
“국경으로 바로 돌파한다. 북쪽에는 최소한의 군사만 파견하고 나머지는 모두 모르가타와의 접경 지역으로 보내.”
다분히 그가 선택할 만한 작전이었다. 그런 식으로 정면 돌파하게 된다면 장단점이 명확했다.
계획대로 접경 지역을 뚫고 들어간다면 수도까지 입성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빠르게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고, 아무래도 민가가 모여있는 곳이다 보니 그런 곳에서 거대한 전투를 벌이게 되면 제국민들의 피해가 그만큼 커진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절대 그가 황제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건 아닐 테니, 분명 다른 목표가 있다는 것이다.
벨라를 동쪽 깊은 곳에 가둬 놓은 뒤로 그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아마 최대한 전장을 크게 벌려 화풀이 삼아 날뛰고 싶으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별생각 없이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로서도 이 귀찮은 전쟁을 빨리 끝내는 건 반가운 일이었다.
평소라면 이렇게 회의가 마무리되었겠지만, 지금 이 자리엔 아주 올곧은 기사가 한 명 있었다.
“각하, 그렇게 되면 접경 지역의 제국민들이 너무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곳은 특히 민가도 많은 곳이고…….”
로드릭의 반박에 벨리아르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자신이 없나?”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각하께서 말씀하신 작전대로 한다면 분명 전쟁을 빠르게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건 맞지만──.”
“맞지만?”
말허리를 뚝 자르며 반문하자 로드릭은 잠시 말을 잃었다.
“내가 왜 그들의 안위를 생각해서 일부러 길을 돌아가야 하지?”
“그건…….”
“폐하께서 내게 바라시는 건 모르가타와의 분쟁을 서둘러 해결하는 것뿐이고, 제국민들을 살피는 건 황제 폐하의 몫이지. 그럼 나는 충실한 신하로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마땅할까.”
로드릭은 이를 꽉 사리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벨리아르 공작과 대화할 때마다 자신이 비겁한 위선자가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더 할 말이 있나?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만한 대안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도 좋아. 벨리아르 가문의 기사단을 통솔하는 자로서 이성적인 판단을 했으면 좋겠는데.”
이성적인 판단이라. 정말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이 작전을 따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페렌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제국민들의 피해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전쟁이 길어지면 그때 감수해야 할 피해도 생각해야 한다.
그의 말대로 빠르게 돌파하는 게 차라리 가장 나은 방법일 수도 있다.
로드릭이 말없이 고개를 숙이자, 그는 조용히 입매를 비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로드릭 경. 앞으로도 그렇게 쭉, 내게 반하는 의견을 내놓도록 해. 충분히 숙고해 주지.”
그가 집무실을 나가고 문이 거센소리를 내며 닫혔다. 에릭과 로드릭만 남은 자리에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 사이로 로드릭의 답답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원래 늘, 저런 분입니까?”
빠른 손길로 테이블 위를 정리하던 에릭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이때쯤 되면 깨달으셨을 텐데요. 그래도 교황 성하처럼 겉과 속이 다른 분은 아닙니다. 주인님께서는, 겉과 속이 똑같이 삐뚤어지셨거든요.”
로드릭은 마지막 문장에 격한 동의를 표했다. 둘 중에 누가 낫냐고 말한다면…… 우습게도 페이트 기사단에 있을 때보다 지금이 마음은 더 편했다.
하지만, 벨리아르 공작의 뒤틀린 성정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저와는 맞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건 경께서 걱정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어떻게든 맞추시는 분이라. 그냥 받아들이시는 게 마음 편할 겁니다.”
“그럼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두고 보는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까?”
“주인님께서는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려는 게 아니라, 그저…….”
거침없이 말을 잇던 에릭이 잠시 뜸을 들였다.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하신 거다, 라고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로드릭의 성격상 정말 사직서를 내던지고 뛰쳐나가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포장할 말을 고르고 골랐다.
“전쟁을 빠르게 마무리하시려는 겁니다. 폐하의 걱정을 하루빨리 거둬 드리려는 충심으로.”
정말 되지도 않는 말을 잘도 내뱉었다.
* * *
창문도 없고 바깥의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는 방 안에서는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저 멍하니 침대에 누워 상념을 이어 가는 것밖에는.
고작 하루가 지났던가? 해가 들지 않아 불을 밝혀 놓지 않으면 내내 어두워서 밤낮이 구별되지 않았다.
그가 오면 당장이라도 무릎 꿇고 사정을 말하며 빌어 볼까 싶다가도…….
“입 다물어. 변명하지 마. 네가 날 속인 이유로 무엇을 말하든, 나는 너를…….”
그 말이 떠올라, 마치 붉은 낙인처럼 혀를 찍어 눌렀다. 그러니 더욱 그에게 할 말이 없었다.
무언가 단단히 얽힌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하든 다 변명 같았다. 어찌 됐든 엘리아스의 존재를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 했던 건 사실이니까.
“앞으로 평생, 너는 오로지 나만 보며 살아가야 한다는 거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순간 화가 나서 그랬을 것이다. 조만간 기분이 풀어지면 다시 내보내 주지 않을까? 처음 이 성에 끌려왔을 때도 금방 족쇄를 풀어 주었으니까…….
언제까지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벨라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시트 자락을 그러쥐었다.
좋은 생각을 하자.
그가 제게 꽃다발을 선물해 주던 행복한 날을 떠올렸다. 거짓된 다정함일지라도 불안을 덮는 데에는 꽤 효과적이었다.
그렇게 애써 시간을 죽이고 있을 무렵, 드디어 문이 열렸다. 그는 살짝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다가왔다.
“……오셨──.”
미처 짧은 인사를 끝마치기도 전에 시야가 푹 꺼졌다. 그가 이불을 덮어씌운 탓이었다.
가만히 이불 속에서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식사 테이블을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정말 다른 사람들에게 저를 보이지 않을 심산이었다.
잠시 후, 그가 이불을 걷어 주니 너른 테이블을 가득 메운 요리들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가 한 손으로 의자를 빼 주며 눈짓했다.
“앉아.”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지만 벨라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움직일 때마다 사슬에서 나는 쇳소리가 신경을 긁어 댔다. 의자에 앉자 덩달아 그의 시선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벨라는 사뭇 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쥐었다. 흘긋 그를 살피니 여전히 냉정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속이 불편해서 먹고 싶지 않아요.
지금 분위기에 저 말을 꺼냈다간 무슨 일을 치를 것 같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얌전히 식사를 시작했다.
“잘 먹네.”
“……맛있어요.”
억지로 대답하니 그는 테이블에 살짝 기대며 저를 향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입안에 꾸역꾸역 넣은 음식이 한가득 있어 이번엔 고개만 끄덕였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시선 때문에 포크 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가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기며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포크를 빼앗아 갔다.
“죽으려는 방법도 가지가지지.”
무겁던 방 안의 공기가 일순 험하게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