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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27)화 (127/180)

127화

그림을 짓이기자 놀리기라도 하듯 물감에 스며 있던 엘리아스의 흔적이 번졌다. 이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곧이곧대로 화가 치밀었다.

엽서는 총 다섯 장이었다. 그림 옆에 적힌 짧은 편지를 읽어 보니 한 번에 다섯 장을 건네준 것도 아니었다.

편지엔 꽤 사사로운 내용이 담겨 있었고, 둘의 사이는 제법 가까워 보였다. 애틋한 이성 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정도의. 친구, 그놈의 친구.

최소 다섯 번 이상의 만남이 이어졌다. 그동안 둘은 제법 많은 대화를 나눴을 테고, 벨라는 제게 단 한 번도 낯선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니지, 꺼낸 적이 있던가.

“……아, 갖고 싶은 거 말고…… 보고 싶은 건 있어요.”

“바다요. 바다가 보고 싶어요.”

바다, 바다라……. 갑자기 왜 바다를 보고 싶어 하나 했더니.

입술 새로 나직한 조소가 스몄다.

“……네. 바다 아니면 사막도 좋아요. 저번에 모래시계 선물해 주셨던 그 사막이요.”

제가 준 사막은 그다음이었다. 바다 다음. 자신이 먼저 주었던 모래시계를 밀어내고, 그딴 그림이 자리를 꿰찼다.

자신이 보여 주었던 사막의 모래보다 그놈이 그려 준 바다를 먼저 떠올린 것이다.

엘리아스가 먼저, 자신은 그다음. 엘리아스가 먼저…….

그 작은 머리통을 오롯이 저로 채워 넣어도 모자랄 판에, 쥐새끼 한 마리가 야금야금 파고들었다. 그것도 꽤 오래.

그는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그림엽서가 그의 손안에서 거침없이 구겨졌다.

구겨진 와중에도 색을 잃지 않고 생생하게 파도치는 바다가 더욱 그를 비웃었다.

* * *

벨라는 오늘 직접 만든 음료가 든 유리병을 끌어안고 성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 발단은 에릭의 말이었다.

“집무실로 찾아가 보세요. 오늘은 아마 계속 성안에 머무르실 겁니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며칠간 집무실에서 안 나오시거든요.”

그래서 열심히 그가 좋아할 만한 것을 만들어 집무실로 찾아갔더니, 그가 없었다. 나름 머리를 굴려 도서관도 가 보고 연무장도 기웃거려 봤지만 어딜 가도 그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사냥을 가신 걸까?’

묵직한 유리병을 들고 넓은 성안을 돌아다니느라 지친 벨라는 그냥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사냥을 나간 모양이라고.

결국, 어두운 저녁이 되어서야 침실로 돌아왔다. 그는 며칠째 침실을 찾지 않았으니 당연히 오늘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침실의 문을 열자마자 무거운 분위기에 숨이 억눌렸다. 창밖을 보며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본 탓이다. 반사적으로 몸이 긴장했다.

“……공작님.”

벨라는 조심스레 그를 부르며 유리병을 꼬옥 붙들었다. 자칫하다가 유리병을 깨트릴까 불안했고, 괜스레 손바닥의 상처가 쓰라렸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은 건지, 그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벨라는 조금 더 용기 내어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공작님, 언제 들어오셨어요? 안 그래도 공작님을 뵈려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다 오는 길이에요.”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갈 때마다 공기의 압력이 높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래도 최대한 의연하게 행동하려 애썼다.

“에릭 경께 들으니 공작님께서 겨울엔 끓인 포도주를 즐겨 드신다고 하셔서…… 만들어 봤어요. 처음 만들어 본 거라 입맛에 맞으실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하면 무언가 반응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는 그저 손에 든 무언가로 시선을 내릴 뿐이었다. 요즘 전쟁 때문에 많이 예민한 상태인 것 같았다.

벨라는 눈치껏 입을 다물며 유리잔에 끓인 포도주를 따랐다. 넘실대며 채워지는 포도주가 유독 느리게 보였다.

실수로 책상 위에 떨어트린 포도주 한 방울에 짧게 숨을 들이켜던 그때, 그의 목소리가 알맞게 파고들었다.

“아직도 바다가 보고 싶어?”

“네?”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그는 여전히 저를 돌아보지 않았다. 벨라는 잠시 멍해졌던 정신을 얼른 다잡았다.

“……아, 네. 보고 싶어요.”

의미 없는 대꾸였다. 벨라는 그제야 그의 질문을 다시 곱씹었다. 단순히 바다가 보고 싶다기보단, 그와 함께 여행을 가서 함께 바다를 보고 싶었다.

그사이 다가온 벨리아르가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갔다. 생각보다 훨씬 신경질적인 손길이라 당황스러움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봤다. 붉은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역시, 아직 화가 풀리지 않으신 거구나.

그렇게 생각할 무렵, 그가 손을 들어 유리잔을 거칠게 내던졌다.

“──!”

빠르게 날아간 유리잔이 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자그마한 파편들이 날카롭게 흩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먹먹한 울림을 남겼다.

잠시 참았던 숨을 토해내자 심장이 거세게 날뛰었다.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잘 파악이 되지 않았다.

“……공작님.”

멍하니 그를 부르며 올려다보는 벨라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반면, 조금의 동요 없이 짙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이 벨라를 꽉 붙들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방금 유리잔을 내던진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한 태도였다.

천천히 내려간 벨라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것으로 닿았다. 일부러 보란 듯이 펼쳐진 물건은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의 손을 통해서라면 더더욱.

“이건…….”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조금 지친 듯해 보이기도 하는 낮은 목소리가 느릿하게 그녀의 숨을 옥죄었다.

“말했었지. 네가 나를 속이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고.”

벨리아르는 치미는 화를 억누르려 최대한, 정말 있는 힘을 다해 노력했다. 까딱 정신을 놓는 순간 그녀의 목을 틀어쥐어 꺾어 버릴 것만 같았다.

엽서를 보며 당황하는 벨라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파묻혀 있던 몹쓸 기억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물론, 그날의 더러운 기분까지 모조리 끌고 와 사정없이 몸을 덮쳤다.

왜 하필 엘리아스여서. 왜 하필. 다른 이였어도 눈이 돌아갈 판에, 엘리아스라니.

아직도 선명한 목의 상처가 쓰라렸다. 그 아픔을 상기할수록 지독한 배신감이 너울졌다.

“제가…… 제가 다 말씀드릴게요. 그건…….”

“벨라.”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부른 그가 짧게 숨을 골랐다. 자꾸만 터져 나와 그녀를 짓누르려 하는 성질을 죽이려는 무던한 노력이었다.

“입 다물어. 변명하지 마. 네가 날 속인 이유로 무엇을 말하든, 나는 너를…….”

버릴 수 없을 테니까.

죽이고 싶을 테니까.

그는 입안 가득 맴도는 말을 겨우 삼켰고, 벨라는 그의 마음을 멋대로 해석했다.

들릴 듯 말듯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그는 벨라의 손목을 잡아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동쪽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사람의 흔적이 사라지고 삭막한 분위기가 짙어졌다.

“아, 아파요, 공작님……. 제발 손 좀…….”

붙들린 손목이 부러질 듯 아파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의 배려 없는 보폭에 위태롭게 끌려가던 벨라는 결국 땅 위로 풀썩 엎어졌다.

오돌토돌한 땅 위로 쓸린 무릎의 쓰라림을 달래기도 전에 그의 손이 다가왔다. 찰나에 헛된 기대가 스쳐 갔지만, 그는 억센 손길로 저를 들쳐 메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공작님!”

살짝 발버둥 치던 벨라는 순간 땅과의 높이가 상당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다 그가 저를 내팽개치기라도 한다면 어디 하나 부러질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결국, 벨라는 그의 옷자락을 꽉 붙든 채 차오르는 흐느낌을 꾸역꾸역 삼켰다.

높은 나무의 꼭대기에 앉아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새가 하늘로 날았다.

그가 어떤 방으로 들어가 저를 던져 놓았을 때, 벨라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이제야말로 정말 그가 저를 버릴 거라고. 죽는 것보다 그게 더 무서웠다.

버린다. 죽인다. 그에겐 같은 의미일 텐데 제겐 너무나도 다른 의미였다.

그가 다가올수록 눈앞이 흐릿해졌다.

* * *

“……벨리아르, 나 당신이랑 결혼하는 거…… 싫어. ……아니, 끔찍해.”

“나…… 나 이제 당신 사랑하지 않아. 아니, 애초에 사랑한 적 없어.”

“……나, 당신을 만난 걸, ……후회해.”

또 악몽을 꾸었다. 이따금 꾸는 꿈이었지만, 이번엔 여인이 죽고서도 꿈이 이어졌다. 전날의 일 때문인지 엘리아스가 나왔다.

“벨라는…… 나를 사랑했어. 그녀를 죽음을 내몬 건 너야, 벨리아르.”

“아니야, 그게 아닌데…….”

잠에서 깨어나며 벨라는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니 방금 했던 말인데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방 안이 어두운 듯해 버릇처럼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마땅히 있어야 할 창문이 없었다. 나풀거리는 커튼도 없고, 그저 하얀 벽이었다.

그에게 끌려가 어떤 방까지 들어온 건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깔끔하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의든 타의든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입안이 바싹 마르고 갈증이 일어 조심스레 상체를 일으켰다. 발목에서 둔하고 무거운 느낌이 들어 살짝 눈가가 찌푸려졌다. 아무래도 어제 넘어지면서 발목을 접질린 모양이다.

벨라는 무거운 숨을 내뱉으며 이불을 젖혔다. 그리고, 제 발목을 확인하자마자 낮게 탄성을 흘렸다.

“……아.”

어째 발목이 무겁다 했더니 단단하게 채워진 족쇄 때문이었다. 처음 이 성에 끌려왔던 그 날처럼 족쇄는 긴 쇠사슬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도 의외로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니 머릿속이 한결 차분해진 덕일까.

벨라는 버릇처럼 제 손을 더듬거려 반지를 꼭 감싸 쥐었다. 반지가 있다는 건, 아직까진 그가 저를 버릴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것은 그가 주는 벌이었다.

엘리아스와 몰래 만나면서 그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분명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정도인가 싶은 마음은 들었다.

살짝 억울하다는 생각이 싹을 틔웠을 때, 방문이 열렸다. 전혀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단정히 걸어오는 그를 보고 있자니 어제의 난리 역시 꿈이었나 싶은 착각이 들었다.

“잘 잤어?”

그는 태연히 지난밤의 안부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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