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지난날 일 때문에 에릭에게 미안한 마음과 약간의 어색함이 들어 고민하고 있던 무렵, 고맙게도 그가 먼저 찾아와 주었다.
“아가씨, 오랜만에 산책은 어떠십니까? 어제보단 날씨가 덜 춥습니다.”
벨라는 기꺼이 그를 따라나섰다. 물론 그의 지시가 있었겠지만, 에릭과 산책하는 시간은 순수하게 즐거웠다.
“어제는…… 고마웠어요. 그리고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말을 막 한 것 같아서……. 혹시 많이 기분 나쁘셨어요?”
“괜찮습니다. 그런 거 하나하나 담아 두고 신경 쓰지 마세요. 머리 아픕니다. 그리고…….”
그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적당한 말을 골랐다.
“에드레이즈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정말로 걱정하실 만큼 심각하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지하가 워낙 어두워서 이안의 상태를 자세히 살피진 못했지만, 에릭이 그렇게 말하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평소엔 에릭이 벨라를 바라보고, 그녀는 땅을 보며 걸었다. 그러나 오늘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벨라는 이상하게 저와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 에릭의 표정을 빤히 살피며 걸었다.
그러다 앞으로 에릭의 팔이 불쑥 나타나기에 짧게 숨을 들이켜며 멈춰 섰다. 밑을 보니 제법 큰 돌덩이 하나가 발치에 놓여 있었다.
저도 모르게 다친 팔을 뻗은 바람에 에릭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곧바로 표정을 지우긴 했지만 벨라는 그 찰나의 흐트러짐까지 보고 말았다.
그녀의 시선이 팔로 닿자 에릭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의 돌덩이를 발로 밀었다. 당연한 질문이 뒤따랐다.
“혹시, 팔 다치셨어요?”
오른손잡이인 그가 요즘은 주로 왼손을 쓰고 있으니 아무리 눈치 없는 벨라여도 곧장 맞힐 만큼 쉬운 문제였다.
순간 에릭의 머릿속에 연무장에서 그에게 매듭 장식의 존재를 들킨 것이 떠올랐지만, 그날의 이야기를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훈련 중에 살짝 긁힌 것뿐입니다.”
“에릭 경께서도 다치시는군요.”
“가끔요. 저도 사람이니까요.”
벨라는 그 말에 벨리아르 공작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역시 목에 상처를 입었었는데…….
그날 이후로 며칠간 마주치지 못해 상처를 살필 겨를도 없었다. 그저, 피곤해하는 에릭을 보며 그가 매우 화가 났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벨라는 잠시 머뭇거리다 넌지시 물었다.
“공작님께선 괜찮으세요?”
“아니요, 안 괜찮으십니다.”
“아…….”
너무 단호해서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예의상이나마 괜찮다고 할 줄 알았는데. 에릭 역시 제법 직설적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날은 정말 오해였어요. 이안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공작님을 화나게 할 만한 일은 절대 없었어요.”
“예, 알고 있습니다. 주인님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근데 왜 그러셨을까요? 요즘 공작님께서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원래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요즘은 더욱 그 심리를 알 수 없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요즘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에릭은 나름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는 벨라를 보며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예전엔 저 역시 그녀와 같은 의문을 가졌으나, 이젠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아무리 감정에 둔한 저라도 말이다.
“아가씨, 전에 사냥대회에서 그러셨죠. 에드레이즈가 아가씨를 잊고 평범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고요. 아가씨와 엮이면 불행해질 거라고.”
“……네, 그랬었죠.”
“그 말이 현실이 되었네요.”
넌지시 사실을 말하자 벨라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이안을 만난 건 좋은데…… 걱정되는 마음이 더 커요. 그래서 아직도 이안이 저를 잊었으면 하는 마음은 바뀌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무언가 할수록 자꾸 어긋나는 것 같고…….”
“그럼 아가씨께선 여전히 에드레이즈가 떠나길 원하신다는 거죠?”
“……네. 무사히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걸로 충분해요.”
“알겠습니다.”
에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벨라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자신이 놓친 말이 있었나 되짚어 보았지만, 분명 저는 내내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떤 것이……?”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 네.”
대체 무엇이 충분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어정쩡히 대꾸했다.
“주인님과는 계속 그렇게 지내실 생각이십니까?”
“아직도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서……. 그리고 조금, 아주 조금…… 원망스럽기도 하고요.”
벨라는 조심스레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이렇게라도 속풀이를 할 곳이 에릭뿐이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세요. 주인님의 심기를 거슬러서 아가씨께 좋을 건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친구를 돕고 싶다면, 오히려 주인님을 잘 구슬려 회유책을 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공작님을 잘 구슬리라고요? 제가 구슬릴 수 있을 만한 분이 아니신 것 같은데요.”
“아니요, 아가씨는 하실 수 있습니다. 아가씨께서도 잘못한 건 없으시니, 조심스럽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 보세요. 아마 주인님께선 좋아하실 겁니다.”
“……그럴까요?”
재차 묻는 말에 에릭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 거짓말 안 합니다.”
* * *
벨리아르는 그날 이후로 침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집무실에 틀어박혀 일에만 몰두하려 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떠올리지 않으려 할수록 벨라의 모습이 더욱 선명해졌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애원하는 모습, 제가 주는 쾌락에 따라 착실히 흐느끼던 모습, 팔을 벌리면 당연한 듯이 다가와 안기는 그 작은 몸이.
더 이상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머릿속은 온통 벨라였다. 하지만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그 많은 모습 중에 벨라가 자신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건 안개처럼 흐릿하다는 것이다.
꽃다발을 주었을 때 아이처럼 기뻐하며 웃던 모습. 희미하게 떠오르는 그 모습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연기 같았다.
똑똑.
그때, 단정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밖에 선 에릭이 미처 존재를 밝히기도 전에 그는 반사적으로 허락했다. 에릭이 들어와 말을 붙일 때까지도 그의 머릿속은 온통 벨라뿐이었다.
“오랜만에 아가씨와 산책을 할까 합니다.”
“허락을 구하는 거야, 아니면 통보야?”
“제가 감히 주인님께 어찌 통보를 하겠습니까? 산책해도 괜찮겠냐고 여쭤보는 겁니다.”
“근데 왜 짜증이 나지.”
“저 때문이 아니라, 지금 주인님께선 아가씨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다 짜증이 나실 겁니다.”
“어째서?”
“……저도 잘 모르겠지만, 그냥 느낌이 그렇습니다.”
“요즘 자꾸 기어오르려고 하네. 혹시, 삶이 지루해?”
“설마요. 저는 주인님을 오래 모시고 싶습니다.”
제 속을 긁어 놓고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에릭의 모습에 그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흘렸다.
제가 아니면 누가 주인님의 그 성질을 받아 내겠습니까.
단정하고 충실한 태도로 저를 바라보는 에릭의 눈빛이 그리 말하는 듯했다. 그는 결국 서류로 시선을 내리며 알아서 하라는 투로 허락했다.
“날씨 차니까, 너무 오래 끌고 다니지 마.”
에릭이 “예, 알겠습니다.” 하고 나간 지 고작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잠시 밀어 두었던 벨라가 어김없이 머릿속에 자리를 꿰찼다.
한겨울인데 무슨 산책이야. 어제는 열이 올라서 쓰러지다시피 한 애를. 손의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았을 텐데.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또 며칠을 앓아누우려고.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벨라는 추위에 코끝이 빨개진 채 기침을 하고 있었다.
……목도리랑 외투 좀 잘 챙기라고 할걸 그랬나.
결국, 그는 답답한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침실까지 향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연히 벨라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문 앞에 섰을 땐 희미하게 마음이 동요했다. 그럼에도 문을 여는 손길엔 거침이 없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주인 없이 비어 있어야 할 침대 위로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그의 심기를 단번에 흩트려 놓을 만한 아주 짜증 나는 것이.
낯설지 않은 새였다. 아주 오래전에도 저만 보면 삑삑거리며 부리로 쪼아 대기 바쁘던, 주인을 닮아 버릇없던 새.
그 새가 제 몸집만 한 엽서를 물고서 벨리아르와 눈이 마주쳤다.
“또다시 내 눈앞에서 알짱거려. 그땐 그 날갯죽지를 꺾어 버릴 테니까.”
말귀는 귀신같이 알아들어서 그 뒤로는 제 앞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그때 했던 말을 마땅히 지킬 생각이었다.
그가 발을 성큼 내딛자 새는 황급히 날개를 펼쳤다. 창밖으로 날아가다 물고 있던 엽서를 놓치고 말았는지 작은 종이가 팔랑팔랑 침대 위로 내려앉았다.
벨리아르는 저 멀리 날아가는 새를 서늘하게 노려보다 떨어진 엽서로 눈길을 돌렸다.
정말 허둥지둥 도망치다가 놓친 건지, 아니면 일부러 저 보란 듯이 놓고 간 건지는 모를 노릇이다.
그는 단정한 손길로 엽서를 주워 들었다. 안을 빼곡히 채운 까만 글씨가 그의 눈길을 사정없이 잡아끌었다.
[벨라, 잘 지내고 있어요? 나는 아주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마음 여린 벨라가 혹여 걱정할까 봐 이렇게 편지로 남겨요. 요즘 이리저리 갈 곳이 많았거든요.
먼 땅의 바다를 보았는데 벨라 생각이 났어요. 나중에 같이 가기로 했던 약속, 잊지 않았죠?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작은 엽서에 담기엔 부족하니 조만간 만나러 갈게요. 그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요. 내가 보고 싶더라도 꾹 참고요. 나도 벨라가 너무 그리워요.]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단정한 필체를 씹어 삼키듯 하나하나 주워 담았다. 잔잔하게 타오르는 열기가 점점 그를 뒤덮었다. 당장 엽서에 불씨가 옮겨붙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분노였다.
[아, 이 편지는 꼭 버리세요.]
기어코 거대한 불씨에 화약이 내던져졌다.
천천히 돌아간 그의 시선이 침대 옆 서랍으로 향했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는 거침없이 서랍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길이 가장 많이 닿았을 곳을 열었다. 생각했던 그대로 조촐한 내용물이 드러났다.
그녀가 포웬에서 사 왔던 지도, 그리고 벨라의 이름이 적힌 손수건. 착실히 제 통제 안에 있는 것들인데, 조금 뭉툭해 보이는 손수건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는 고민 없이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성격대로 조심스럽게 꽁꽁 싸매 놓은 손수건을 풀자 작은 엽서 여러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벌어진 입술 새로 바람 빠지듯 헛웃음이 샜다.
“……벨라.”
그는 누구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겪어 봤으니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미쳐 가는지, 어떻게 망가져 가는지.
그러니 더 이상 그녀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또다시, 어쩌면 여전히, 벨라를 사랑했다.
“벨라, 너는 정말…….”
그리고 벨라는 여전히, 저를 미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