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그날은,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지상으로 추방되던 날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담기엔 인간의 몸이 한없이 나약했기에, 한동안은 불에 타들어 가는 생생한 고통에 고스란히 파묻혀 있어야 했다. 폐부를 틀어막는 지상의 탁한 공기가 미칠 듯이 역겨웠다.
그러다 가끔 산뜻한 풀 내음을 머금고 불어오는 바람이 열기를 식혀 주곤 했다. 점점 이성을 차릴수록 그 바람을 기다렸다. 더 잦게, 더 거세게 불어와 제 품으로 적셔 들기를.
처음 눈을 떠 지상의 모습을 담으며 그는 본능처럼 그 바람을 좇았다.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 고개를 빼꼼히 내미는 작은 생명체를 발견했을 때, 저것이 그 산뜻한 바람이었음을 깨달았다.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하는 시선을 오롯이 느끼던 벨리아르는 나무에 기대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오려면 오고 가려면 가던가.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작정인지.
나무 뒤에 몸만 숨기면 알아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생명을 으스러트리고 싶은 충동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안 그래도 지상으로 추방당한 것 때문에 마구잡이로 분노가 들끓는 터라 지금은 뭐든 손에 잡히면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이 저 산뜻한 바람이라면, 더없이 시원할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여자가 드디어 나무에서 나와 야금야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코끝으로 스미는 파릇한 내음이 짙어졌다. 반쯤 감긴 시야에 여자의 머리카락이 운명의 실타래처럼 나부꼈다.
그는 별 가루를 흩뿌려 놓은 것처럼 반짝이는 은빛 머리칼을 느른하게 바라보았다. 파도가 다가오듯 여자가 너울거렸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과 순수한 걱정을 담은 보랏빛 눈동자가 저를 향했다.
인간처럼 추악한 욕망에 사로잡혀 억겁의 시간 동안 불멸로 고통받으리.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저주가 불길처럼 날뛰었다. 저 눈동자가 가지고 싶었다.
“괜찮아요? 정신 좀 차려 봐요.”
조금만, 조금만 더 다가오면 손에 잡힐 것 같은데.
팔을 뻗으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여자는 망설였다. 벨리아르는 일부러 몸에 힘을 쭉 빼고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여자를 응시했다. 그 시선에 얽매인 여자는 살며시 그에게로 다가왔다.
제 범위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망설이지 않고 여자의 목을 틀어쥐었다.
“허억, 흑…….”
아직 처벌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몸이 수만 갈래로 찢기듯 소리 없이 아우성쳤다. 그래도, 저 눈동자를 가질 수만 있다면.
“끅……. 흐윽.”
작은 손이 필사적으로 그의 손을 떼어 내려 했지만, 의미 없는 몸부림이었다. 손안에 잡힌 목이 너무 가늘어서 조금만 힘을 주면 툭 부러질 것 같았다.
지금 이 목을 꺾고 눈동자를 도려낼까? 생명의 빛이 꺼진 후에도 이리 영롱하게 반짝일지 궁금했다.
그가 고민하는 동안, 여자가 옷 속에서 작은 칼을 꺼내더니 그의 팔에 푹 박아 넣었다. 생각지 못한 공격이 황당해 벨리아르는 저도 모르게 목을 놓았다.
“콜록, 콜록! 흐으…….”
여자는 한동안 바닥에 엎어져 괴로운 기침을 토해 냈다. 벨리아르는 제 팔에 박힌 단검을 뽑아 여자의 앞으로 내던졌다. 눈물로 얼룩진 눈동자가 원망과 공포를 한가득 담고서 저를 노려보았다.
문득,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칼이 박혔던 팔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아물어 있었다. 운명을 거스른 대가로 주어진 형벌은 착실하고 지독했다.
“괴물…….”
여자가 짓씹듯 내뱉은 말에 그는 힘없이 웃었다. 다시 움직여 손에 쥐기엔 제 나약한 몸이 아직 불구덩이에 처박힌 듯 치미는 고통에 울부짖고 있었다.
여자는 단검을 챙겨 울창한 숲 사이로 사라졌다.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아, 손에 잡혔을 때 놓지 말아야 했는데.
조금 아깝다고 생각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짙은 잔상으로 남은 여자의 향이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는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거슬려 다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쪼그려 앉아 저를 바라보는 여자를 발견하고서 그는 생각했다.
이건 진짜 어디 모자란 게 아닐까.
“……여기, 물 좀 마셔요.”
여자는 전처럼 가까이 다가오진 않고, 슬금슬금 거리를 유지하다 슬쩍 물그릇을 놓곤 빠르게 멀어졌다.
벨리아르는 여자와 눈을 마주치며 손을 내밀었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그라들었다. 여자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와 무릎 꿇었다.
그는 여자의 턱을 쥐고선 더 가까이 잡아당겼다. 생기가 돌아온 보라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진 채 깜빡였다.
보라색 눈동자는 가까이서 보니 더욱 탐스러웠다. 확실히 자아가 있을 때 더욱 반짝였기에 죽여야겠다는 마음은 조금 옅어졌다.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헤스티아의 보물 같아.”
여자가 맹하게 되물었다.
“……칭찬이죠?”
그는 대답 대신 턱을 놓아주었다. 여자는 물그릇을 더 가까이 옮겨 주곤 잠시 머뭇거리다 자리를 떠났다.
이후 또 해가 한 바퀴 돌았을 때, 여자는 어김없이 그를 찾아왔다.
“배고플 것 같아서 들고 왔는데……. 좀 먹어 볼래요?”
이번엔 음식을 챙겨 들고 온 모양인지 여자가 조심스럽게 그릇을 내밀었다. 생소한 냄새가 역하게 느껴져 그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치워.”
동시에 짜증스러운 손길로 그릇을 쳐 냈다. 바닥에 엎어진 음식을 보며 여자가 홀로 씩씩댔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노려보다 울컥 소리쳤다.
“당신, 대체 뭐야? 사람이 걱정돼서 챙겨 주는데! 이럴 거면 내 눈에 안 띄는 곳으로 가던가! 왜 자꾸 신경 쓰이게…….”
제 발로 꾸역꾸역 찾아와 놓고선.
그는 속상한 듯 울상 짓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코끝에 남은 역한 냄새를 다른 향으로 덮고 싶었다.
“이리 와 볼래?”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며 손을 뻗으니 여자는 머뭇거리면서도 착실히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 허벅지 위로 앉혀 놓고, 말캉한 입술을 베어 물었다.
잘 익어 꿀이 흐르는 과육처럼 단내가 진동했다. 그는 그제야 며칠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여자의 입술을 빨아 삼켰다.
허기가 온전히 채워질 때까지, 한참이나 물고 빤 탓에 여자의 입술이 통통하게 부풀어 올랐다. 마음껏 탐하고서야 놓아주니 열기로 가쁘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다.
“무, 무슨……!”
여자는 혼란스러운 숨을 색색 내뱉더니 홀랑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발 달린 사과 같아서 그는 홀로 웃었다. 한번 맛을 보았더니, 전보다 허기가 더욱 짙어졌다.
이제는 다시 해가 뜨면 여자가 불퉁한 얼굴로 나타날 것을 확신했다. 어느덧 몸이 풀리고 있었다.
역시나 여자는 그의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번엔 둥근 냄비를 끌어안고서 입을 삐죽 내민 채 그의 앞에 나타났다.
목에 남긴 흔적이 사라져서 아쉽던 참인데, 퉁퉁 부어오른 입술을 보니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그건 또 뭐야?”
“……이제 좀 배고픈가 보지?”
“그러네. 가져와 봐.”
역겹게만 느껴지던 음식 냄새가 조금은 괜찮게 느껴졌다. 이젠 몸을 움직여도 아무렇지 않았다. 여자가 건넨 숟가락으로 정체불명의 음식을 한 입 떠먹었다.
“어때? 괜찮아?”
여자가 한껏 기대하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물었지만, 그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들은 다 이런 쓰레기를 먹고 사나.
옆을 보니 제 표정을 확인한 여자가 잔뜩 울상 짓고선 물었다.
“……별로야?”
“……아니. 그냥, 먹을 만해.”
“이건 산딸기고, 이건 쑥인데……. 이거 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귀한 거야.”
“그래, 알았어.”
그 이후로도 여자는 매일 음식을 들고 왔다. 벨리아르는 미각을 포기한 채 여자가 가져다주는 음식을 군말 없이 먹어 치웠다.
여자는 여느 날처럼 옆에 쪼그려 앉아 그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저기, 이름이 뭐야?”
“벨리아르.”
“그렇구나.”
여자는 조금 버릇이 없었다. 먼저 이름을 물었으면 알아서 제 이름을 밝히는 것이 마땅하지 않나. 여자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곤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네 이름은.”
“음, 난……. 이름이 없어.”
그 사실이 부끄러웠는지 여자는 작게 웅얼거리곤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사랑받지 못했구나.”
“……그걸 그렇게 대놓고 말해야겠어?”
이름이 없다는 건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다는 증거이니 그는 기분 좋게 웃었다. 곧바로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아 제 무릎에 앉혔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다. 누가 들어도 벨리아르의 것이구나, 생각할 만한 이름이 무엇일까 하고. 그는 어둠 그 자체인 제 이름에서 여자의 이름을 따왔다.
“네 이름은 이제 벨라야.”
언젠가 어머니가 그러셨다. 이름을 준다는 건 정말 특별한 일이라고. 그러니, 자신이 준 이름이 각인처럼 새겨져 그녀의 모든 것을 단단히 얽어매길 바랐다. 언제든 그 줄을 잡아당기면 찾을 수 있도록.
벨라. 그가 나직이 그 이름을 다시 한번 읊조리자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뭐야, 방금 되게 대충 지은 것 같은데.”
“싫어, 벨라?”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온전히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삐져나와 그녀의 입꼬리로 스며들었다. 벨라는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어깨에 뺨을 비볐다.
“벨리아르, 나랑 살래?”
“내가 이름을 주었으니, 너는 영원히 내 거지.”
영원히.
그 말이 이리도 달콤한 줄은 몰랐다.
벨라는 자신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고, 자신은 그녀에게 이름을 주고. 우리는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하나씩 채워 주었다.
벌이라기엔 심히 안온한 시간이었다.
* * *
한없이 평화롭고, 마냥 달기만 한 시간이 이어졌다. 이런 순간들이라면 영원의 시간 동안 잠들지 못한다 해도 기꺼울 만큼.
그는 제 품에 오롯이 안긴 벨라를 느릿하게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머리칼에 입술을 묻었다. 그녀의 온몸에 배어 있는 숲 향은 온종일 맡아도 질리지 않았다. 분명 지상의 모든 것이 역겨웠는데, 벨라는 한없이 달기만 했다.
그녀는 그의 살갗을 콕콕 찔러 보다가 끝내 꾹 꼬집었다. 아프진 않았지만, 벨리아르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눌렀다. 그러자 작은 뺨이 품으로 폭 기대어졌다.
“……벨리아르, 당신이 홀연히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
“왜 그런 생각을 해?”
“그야……. 그냥. 그냥 느낌이 그래.”
“안 사라져.”
“거짓말.”
벨라의 단호한 대꾸에 그는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여태껏 한 번도 그녀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었는데. 조금 억울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투정을 부려.”
“당신이 좋아서, 당신이 너무 좋아져 버려서…… 그래서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어. 나는 말이야, 당신이 나를 버리는 게 가장 두려워.”
우습게도 그녀의 불안한 마음이 그의 뒤틀린 욕망을 채워 주곤 했다. 벨리아르는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며 부드러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안 버려, 절대.”
“거짓말.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해.”
“그럼 약속할게.”
“무엇을?”
어둠으로 똘똘 뭉친 제게도 어머니가 남겨 주신 빛이 조금은 스며 있었다. 그는 제 안에 남은 빛을 모조리 끌어모아 오롯이 그녀를 위한 맹약을 읊조렸다.
“내 삶을 네게 줄게. 약속해. 나를 죽일 수 있는 건 벨라, 너뿐이야.”
신의 맹약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던 어머니의 가르침은, 오늘에서야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벨라의 불안함을 어루만져 주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욕망에 사로잡혀 미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사라질 걱정은 하지 마. 네가 날 죽이지 않는 한, 난 영원히 네 곁에 있을 테니까.”
“영원히?”
“응, 영원히.”
“우린 언젠가 죽을 텐데.”
“기다릴게.”
네가 다시 내게 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