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아, 아가씨.”
딱 봐도 낭패라는 듯 기사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표정을 보자 벨라의 마음속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다.
“방금 하신 말들…… 혹시, 이안 얘기인가요?”
“……죄송합니다. 저희는 아가씨께 드릴 수 있는 말씀이 없습니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잠시만요! 그냥 대답 한 번은 해 주실 수 있잖아요. 아니면 고갯짓이라도 해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간절한 마음으로 붙잡아 봤지만, 기사들의 태도는 확고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들은 애초에 그녀와 눈을 마주칠 생각조차 없었기에 그녀의 간절함이 그들에게 닿을 리 없었다. 단호하게 자리를 뜨는 기사들을 보며 벨라는 옷자락을 꽉 그러쥐었다.
“이 성안에서 네가 가지 못할 곳은 없지. 심심하면 지하도 구경하러 가도 돼.”
저를 놀리려 한 말이었겠지만, 이때만큼은 그 말을 착실히 들을 생각이었다.
벨라는 왔던 길로 몸을 틀어 바삐 발을 움직였다. 걸음이 빨라질수록 그만큼 마음이 달아 심장이 격동했다. 가빠진 숨을 따라 희뿌연 입김이 짙어졌다.
지하로 통하는 건물에 가까워졌을 무렵, 옆에서 저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에릭의 모습이 보였다.
“아가씨.”
벨라는 그의 부름을 무시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가 향하는 곳이 지하 쪽이라는 것을 눈치챈 에릭이 재빨리 뛰어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아가씨!”
무리해서 몸을 움직인 탓에 벨라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에릭을 올려다봤다. 한창 움직일 땐 몰랐는데, 이리 가만히 서 있으니 열 때문인지 시야가 살짝 흐릿했다.
“지금 어딜 가시는 겁니까?”
“……에릭 경.”
그는 붕대가 칭칭 감긴 벨라의 손을 보곤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상처가 벌어져 피가 밴 붕대도 문제지만,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파리한 안색이 가장 문제였다.
“상처가 깊습니다. 이리 돌아다니지 마시고 침실로 돌아가 쉬세요. 거울은 보셨습니까? 지금 당장 쓰러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안색입니다.”
“……비켜 주세요.”
“안 됩니다. 이번엔 어설프게 넘어가 드릴 생각 없으니 고집 피우지 마세요.”
“저를 감시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지키시는 건가요?”
“평소엔 감시하는 게 맞았고, 지금은 정말 걱정돼서 이러는 겁니다. 날씨가 차니, 안으로…….”
벨라는 에릭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어제…… 이안은 어떻게 됐어요?”
“별일 없었습니다.”
담담한 대답이 차마 믿기지 않았다.
벨라는 갈라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입안이 바싹 마르며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그만큼 내뱉는 숨이 뜨겁고 건조했다. 열기 품은 눈동자가 에릭을 담았다.
“정말요?”
“……예. 그러니까 걱정 마시고 침실로 돌아가세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거짓말. 한 치의 틈도 없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찰나에 머뭇거린 그 태도마저 원망스러웠다. 그럼에도 꿋꿋이 제게 거짓을 말하는 것이.
벨라는 저를 향해 뻗는 손을 피해 한 걸음 물러섰다.
“경의 말은 믿지 못하겠어요.”
“……아가씨.”
이 성안에 제 편은 아무도 없었다. 늘 알고 있었고, 또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오늘은 그것이 조금 서러웠다.
에릭은…… 그래도 에릭은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빛바랜 종이 쪼가리처럼 무참히 구겨졌다.
“경께서도 결국은 공작님의 사람이잖아요.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제가 걱정되는 게 아니라, 공작님이 화를 내실까 걱정되는 거라고요.”
물론 에릭은 철저히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 이건 애꿎은 원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러운 제 마음을 다독일 여유가 없었다.
에릭이 낮은 숨을 내쉬며 설핏 미간을 좁혔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제 그런 난리를 겪고도 또 이리 멋대로 행동하시는 게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 자꾸 주인님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십니까? 그럴수록 아가씨만 고생하신다는 걸 정말 몰라서 이러시는 겁니까?”
“……그럼 다시 물을게요. 정말 이안이 무사한가요?”
답답한 듯 빠르게 말을 쏘아 내던 에릭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차라리…… 끝까지 아니라고 딱 잡아뗐다면 그 말을 믿었을까.
벨라는 답답한 숨을 내뱉곤 그를 지나쳐 갔다. 에릭은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이내 그 뒤를 따랐다.
대체 이 성에서 무엇을 기대한 건지. 안온한 삶에 안주하다 보니 너무 주제넘은 희망을 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뒤따라오는 에릭의 존재가 마치 온몸을 칭칭 휘감고 있는 쇠사슬처럼 느껴졌다. 벨라는 결국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다시 멈춰 섰다.
이대로라면 어차피 목표하는 곳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사슬이 바짝 당겨질 것 같았다.
“……전 에릭 경도 제 친구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친구로서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이번 한 번만 못 본 척 넘어가 주세요.”
“어차피 지키는 기사들이 있으니 혼자 가셔도 만날 수 없습니다. 제가 못 본 척 넘어가더라도, 그 기사들까지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 기사들은 주인님께서 물으시면 무엇이든 답할 텐데요.”
“에릭 경도 무엇이든 답하실 거잖아요.”
어떠한 기대도 담겨 있지 않은 벨라의 눈빛에 에릭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그들은 각오가 되어 있지 않고, 저는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게 다르죠.”
벨라가 그 말의 의도를 온전하게 파악하기도 전에 에릭은 그녀를 지나쳐 지하 쪽으로 걸음을 뗐다.
“따라오세요.”
그는 지하로 가는 입구에 다다라선 지키고 있던 기사들을 모두 물렸다.
이 성에서 에릭의 권한이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건 벨리아르 공작이 달가워할 행동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잠시 에릭에 대한 걱정이 스쳐 갈 무렵, 그가 지하로 통하는 문을 열어 주었다.
“짧게 얼굴만 보고 나오세요.”
간결하게 말한 에릭은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벨라는 그가 말을 고르는 짧은 시간을 잠시 기다려 주었다.
“……주인님께 들킬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아가씨의 상태가 걱정돼서 그럽니다. 안에서 에드레이즈의 상태를 보고 너무 놀라지도 마시고요. 겉보기와는 다르게 며칠 쉬면 나을 정도입니다.”
“……고마워요.”
아무리 에릭이 미리 언질을 주었다 한들, 소중한 친구가 다친 모습엔 어떠한 다짐도 바람 앞에 등불처럼 연약했다.
힘없이 쓰러져 있는 이안의 모습을 본 순간, 벨라는 낮은 숨을 토해 내며 주저앉았다.
* * *
“예상했던 대로 모르가타에서 주위 나라들에 도움을 요청한 정황이 발견되었습니다. 그중 페렌 왕국은 제국의 북쪽과 경계가 닿아 있어 병력이 분산되는 건 불가피한 일입니다.”
로드릭의 말에 에릭이 덧붙였다.
“페렌 입장에서는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일 겁니다. 셋째 공주가 모르가타에 있으니 힘을 보태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기도 힘들 테고, 그렇다고 제국에 반하는 건 더욱 내키지 않을 테니까요.”
“그럼 페렌에서는 모르가타를 외면할까요? 왕이 셋째 공주를 특히 예뻐했다던데…….”
“대충 힘을 보태는 척 시늉만 하겠죠. 적당히, 잃어도 타격 없을 정도의 군사만 파견할 뿐 그리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의외로 대응하기는 쉬울 수도 있겠습니다.”
“제 생각엔 군사를 서쪽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페렌 쪽으로…….”
에릭이 테이블 위로 넓게 펼쳐진 지도를 가리키며 이번 전쟁의 전략을 설명했다. 냉정한 판단에 로드릭이 관심을 보이며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정작 모든 결정권을 쥔 벨리아르의 생각은 전혀 딴 곳을 향하고 있었다.
“……주인님?”
그가 전혀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에릭이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톡, 톡. 그의 손끝이 테이블 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일정하게 울렸다. 살짝 눈치를 살피던 로드릭이 넌지시 덧붙였다.
“모르가타에서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을 테니, 아직 시일이 여유로운 편입니다.”
그러니 굳이 지금 이 회의를 이어 나갈 이유는 없다는 소리였다. 로드릭 역시 벨리아르의 심기가 어지러운 이유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결국, 벨리아르는 회의 자리를 파했다. 에릭이 로드릭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눈빛을 보내고, 둘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 전, 벨리아르와 벨라가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난 후였다. 에릭은 여느 때처럼 차분히 보고를 이었다.
“죽이지는 말라고 하셔서 기사들에게 본보기가 될 정도로만 처리했습니다. 의사도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이라 하기에 지하에 두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벨리아르는 잠든 벨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짧게 답했다. 살짝 눈길을 돌리니 붕대를 칭칭 감은 손이 시야에 걸렸다.
그 날카로운 칼을 그대로 쥔 탓에 상처가 상당히 깊었다. 붕대에 스민 핏자국을 바라보던 그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주인님.”
에릭이 살짝 머뭇거리는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불렀으니 마땅히 말을 이어야 함을 알지만, 순간 당황하여 말을 잃고 말았다. 그 침묵은 곧 벨리아르의 얄팍한 인내심을 건드렸다.
“왜. 불렀으면 말을 해.”
에릭은 차마 벨리아르의 목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헛것이라도 본 듯 눈을 여러 번 깜빡여 봤지만, 기다란 상처는 지극히 생생했다.
여태껏 그의 몸에 난 상처를 본 적이 있던가? 상처는 많이 봤지만, 그건 상처가 난 순간일 뿐이었다.
“그 상처……. 괜찮으십니까?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불편하시면, 제가…….”
처음 겪는 일이라 단순한 상처일 뿐인데도 에릭은 적잖이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벨리아르는 짤막한 숨을 내쉬며 목에 난 상처를 쓸어내렸다. 길게 베인 상처를 매만지는 손길이 퍽 낯설었다.
“필요 없어. ……곧 사라질 테니까.”
사라지겠지. 속으로 한 번 더 곱씹은 말이 버석한 모래알처럼 씁쓸했다. 그는 살짝 인상을 구긴 채 짜증 섞인 기색으로 말을 덧붙였다.
“됐으니까 나가 봐.”
“예,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쉬십시오.”
모든 소리가 가라앉은 고요한 방 안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만이 잔잔히 스몄다.
벨리아르는 쓰러지듯 잠든 벨라의 모습을 지켜보다 이내 고개를 떨궜다. 낮은 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한바탕 불이 타오른 자리엔 온통 시꺼멓게 타 버린 재만 남았다. 차갑게 식은 머리로 생각해 보면 그리 화를 내고 날뛸 만한 일도 아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방향을 잃고 튀어 나가는 감정들이 잘 통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심엔 늘 벨라가 존재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말도 안 되는 우연으로 제 이성을 붙잡고 시험했다. 하필 그 오두막에서, 하필 그 이름이 새겨진 손수건을 떨구고.
벨라.
그 이름 하나가 뭐라고 자신을 이토록 망가트리는지 모를 노릇이다. 언제까지 그 이름에 이리 묶여 있어야 할까 싶지만, 그는 답을 알고 있었다.
저는 이미 벨라라는 늪에 온전히 잠겨 버린 지 오래였다. 저항하지 않았으니 오롯이 제 의지였다.
그는 이미 제 모든 시간을 벨라에게 주었었다.
하여, 사라지지 않는 목의 상처를 애써 외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