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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23)화 (123/180)

123화

벨라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저, 이안과 함께 있던 것이 불씨가 되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이안과는 다신 만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겁도 없이 거기서 밀회를 즐기고 계셨어요.”

벨리아르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파고들 때마다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이성을 대체 어찌 붙잡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런 꼴을 보려고 그놈을 살려 둔 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자비를 베풀었던 건, 오로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벨라가 마음 아파하며 우는 꼴을 두 번은 보고 싶지 않아서. 그것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존재 때문이라는 것이 미치도록 싫어서.

“내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넌 지금쯤 그 새끼랑 바닥에 뒹굴고 있었겠네. 어쩔까, 아쉬워서.”

“공작님께서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정말 모르겠어요. 대체, 왜 그런…….”

“내가 너무 물렀지. 몰래 숨어서 이딴 짓거릴 하는 줄도 모르고.”

……하. 그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정말, 하도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그곳에서 그 자식과 키스를 나눌 생각을 했을까. 하필 그곳에서.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을 찾아 몰래 그놈의 손을 이끌었을 벨라를 떠올리니 미친 듯이 속이 뒤집혔다.

그는 벨라의 머리칼을 움켜쥐어 뒤로 젖혔다. 눈물 젖은 보랏빛 눈동자가 오롯이 저를 향하도록.

“그 새끼가 무슨 말로 우리 벨라를 꾀어냈을까. 여기서 빼내 주겠다고 했어? 그놈도 네게 혼인하자고 하던?”

벨라는 더듬더듬 그의 팔을 붙잡으며 공포에 얼어붙은 혀를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아니요……. 아니에요. 그런 말은 전혀……. 오해하시는 거예요. 그저 빵을 나눠 먹고 있었을 뿐이에요. 아, 그리고…….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서 이안이 빼내 주던 것뿐이에요. 정말이에요.”

아무리 울음에 젖어 발음이 뭉개졌다고는 하나,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벨리아르의 귀엔 아무것도 담기지 못했다.

그저 다른 놈 때문에 울며 애원하는 벨라의 모습만 비칠 뿐이었다. 아까는 그깟 빵 쪼가리 하나 들고 그리 웃더니.

제 소중한 친구가 다칠까 전전긍긍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놈을 눈앞에 데려와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을 만큼.

애새끼 하나 어쩌지 못하고 이리 속으로만 분노를 삭이는 제 꼴에 절로 웃음이 났다.

대체 어쩌다 이리되었을까.

벨라의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희망을 완전히 짓밟아 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더는 허튼 생각을 하지 않으리라고.

그는 요즘 벨라를 볼 때마다 느꼈던 제 감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를 흔드는 그녀의 존재가 두렵고, 제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렵고, 그래서 또다시 저에게서 도망가려 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 벨라는 제게 두려운 존재였다.

그는 벽 한쪽에서 검을 뽑아 들어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고는 작은 두 손에 검을 단단히 쥐여 주었다.

“……공작님.”

벨라는 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멍하니 시선을 올렸다. 어딘가 텅 빈 듯, 그래서 평소보다 더 공허하게 느껴지는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는 칼을 쥔 벨라의 손을 움직여 칼날을 제 목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다급히 소리쳤다.

“공작님!”

“벨라, 잘 들어. 네가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벨리아르는 언젠가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안 버려, 절대.”

짧게 대답했지만 가볍게 던진 소리는 아니었다.

자신은 이제 결코 벨라를 버릴 수 없었다. 그러니.

“날 죽이는 것뿐이야.”

네가 날 버려.

충동적인 도박이었다.

“공작님, 제발……. 제발 이러지 마세요.”

벨라는 그의 목에 칼날이 닿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손에 힘을 주고 버텼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그의 힘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어코 그의 목으로 칼날이 닿아 기다란 상처를 내고 말았다. 붉게 배어 나오는 피를 본 순간, 심장이 쿵 무너져 내렸다.

“공작님! 제가 잘못했어요. 다신 그러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칼을 거두어 주세요. 다치시잖아요. 제발…….”

이러다간 정말 칼날이 그의 목을 베어 버릴 것 같았다. 그저 얕은 상처가 났을 뿐인데도 칼을 쥔 손으로 그 느낌이 생생히 전해지는 듯했다.

그가 힘을 주고 있지만, 그를 베는 칼은 명백히 제 손에 있었다. 이게 그의 심기를 건드린 대가라면, 그 무엇보다 끔찍한 벌이었다.

벨리아르는 제 살이 찢기는데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시린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에게 이런 상처쯤은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이 칼이 목을 반쯤 꿰뚫고 들어오면 조금 다를까? 그는 태연한 생각으로 더욱 힘을 주었다.

칼날이 여지없이 그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 장면을 생생히 담고 있던 벨라는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날카로운 칼날을 그대로 부여잡았다. 그 행동은, 내내 무감하던 그의 표정을 한순간에 무너트렸다.

“──벨라!”

그는 곧바로 손에 힘을 빼며 벨라의 손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혹여 강제로 칼을 뺐다가 더 깊은 상처로 이어질까 봐 힘을 주진 못했다.

여전히 칼을 꽉 쥐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벨리아르는 거세게 일갈했다.

“당장 손 놔!”

그가 이리 언성을 높이는 경우는 생을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만큼 마음은 급한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런 무력감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벨라, 놓으란 소리 안 들려? 말 안 듣지.”

직전보다 한껏 낮아진 목소리였지만 언뜻 초조한 기색이 스몄다. 벨라는 물기에 어그러진 눈동자로 그를 직시했다.

“공작님께서…… 먼저 놔주세요. 그럼 놓을게요. 그전까진 놓지 않을 거예요.”

그는 이를 꽉 물며 손을 뗐다. 그제야 벨라 역시 칼날을 쥐었던 손을 폈다. 피를 듬뿍 머금은 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으로 추락했다.

“아…….”

그녀의 손을 온통 붉게 물들인 피가 뚝뚝 흘러내려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다. 그 장면이 벨리아르의 눈동자로 고요히 스며들었다.

누군가 찬물을 쏟아부은 것처럼 심장이 서늘히 얼어붙었다. 덕분에 거센 불길처럼 날뛰던 이성 역시 순식간에 잠잠히 가라앉는다.

그는 벨라의 손바닥 전체를 가로지른 깊은 창상을 보며 나직이 험한 말을 읊조렸다.

차갑게 얼어붙은 분노가 모조리 저를 향했다.

* * *

아픔이 잠을 깨운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겨우 손끝만 까딱였을 뿐인데 손바닥 전체에서 쓰라린 통증이 번졌다.

“으…….”

절로 끙끙 앓는 신음이 샜다. 손에 난 상처 때문에 그리 느껴지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몸살이 난 건지 상태가 영 엉망이었다.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오니 어제의 일이 머릿속에 흘러갔다. 겁도 없이 그의 칼을 손으로 쥔 순간까지 떠올랐을 때, 벨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하아, 진짜…….”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 뒤늦게 이안이 떠올랐다. 벨라는 순간 모든 아픔도 잊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벨라!”

저를 부르는 이안의 목소리가 생생히 귓가를 맴돌았다. 정확한 상황이 떠오르진 않았지만, 드문드문 기억나는 장면들이 있었다.

안타깝게 일그러진 얼굴로 제게 손을 뻗는 이안이나, 그런 이안을 거칠게 잡아 누르던 에릭의 모습…….

자신이 그렇게 끌려간 이후, 이안이 무사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벨라는 허둥지둥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갑작스레 움직인 탓인지 바닥을 디디고 선 순간, 잠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벨라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최대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어떻게든 이안이 무사한 모습을 봐야겠다는 집념만이 가득 헤엄쳤다. 벨라는 침대에 앉아 숨을 고른 후,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픔에 더뎌진 손길로 겨우 나갈 준비를 마치고서야 밖으로 나섰다. 처음엔 열을 식혀 주는 찬바람이 반가웠으나, 점점 혹독하게 스며드는 추위가 버거워졌다.

오로지 이안을 걱정하는 마음만이 무거운 발을 움직였다. 설령 이안이 무사하더라도 마음은 온전치 않을 터였다.

눈앞에서 그렇게 사라졌으니 또 얼마나 놀랐을까. 이번엔 그 누구도 아닌 벨리아르 공작에게 직접 끌려가는 모습을 봤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아마 잠을 제대로 자긴커녕 밤을 지새웠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성의 북쪽으로 향하니 점점 눈에 보이는 기사들의 수가 늘어났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지나가니 당연하게도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일부러 구석진 곳으로 길을 돌아가는데, 어딘가에서 기사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벨라는 그 소리를 따라 벽을 더듬어 갔다.

“신입 녀석, 간도 커. 어떻게 그 아가씨를 건드릴 생각을 한 건지.”

‘신입’이라는 말에 절로 걸음이 멎었다. 이안 말고도 다른 신임 기사들이야 많겠지만, 자신과 접점이 있는 것은 이안뿐이었다.

“간이 큰 게 아니라 멍청하고 막무가내인 거지. 이곳에 들어온 이상, 분위기를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난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칼리드도 속 많이 썩겠어. 후임이라고 나름 열심히 챙기더니. ……근데, 그 신입 녀석 살아 있긴 한 거겠지?”

“그 정도로는 안 죽어. 죽일 거였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처리했을 테니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설마…….

좋지 않은 상상이 머릿속을 스치자마자 벨라는 기사들 앞으로 불쑥 나섰다. 생각을 따져 볼 겨를조차 없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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