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탁, 탁.
처음엔 벽난로의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계속 들려오는 소리가 무언가 이질적이어서 귀에 거슬렸다.
벨라는 침대에 파묻혀 있던 몸을 살며시 일으켰다. 소리가 제법 가까이에서 들리는 듯해 무거운 몸을 일으켜 꾸역꾸역 창가로 다가섰다.
힘없는 손길로 커튼을 열어젖히니 드문드문 내리는 눈송이가 보였다. 그 사이로 누군가 열심히 팔을 흔들고 있었다.
“……이안?”
저도 모르게 그 이름을 불렀다가 지레 놀라 흘긋 방 안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는 요즘 밤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았고, 에릭 역시 어제부터 보이지 않았다. 벨라는 잠시 망설이다 겉옷과 목도리를 챙겨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이안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하지만 벨라는 그에게 눈짓을 보내곤 말없이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궁금해하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 뒤를 따랐다.
벨라가 향한 곳은 숲으로 향하는 문이 있는 곳이었다. 이 성에서 지내며 살펴본 결과, 이곳은 유일하게 다른 이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주위를 꼼꼼히 살피고 나서야 이안에게 말을 붙였다.
“여기는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괜찮을 거야.”
“이곳에도 문이 있는 줄 몰랐어.”
그는 마치 비밀 장소라도 발견한 듯이 신기한 눈으로 문을 쳐다봤다.
“……어차피 이 문으로는 못 나가. 성역이거든.”
“베른에 성역이 있다는 말은 들었어. 근데 이렇게 성과 가까울 줄은…….”
이안이 무심코 문으로 손을 뻗자 벨라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마자 순간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 황급히 손을 뗐다.
벨라는 이상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자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근데, 무슨 일이야?”
이안은 잠시 씁쓸한 미소를 삼켰다. 무슨 일이냐니. 그 물음이 새삼 낯설었다.
우리는 어쩌다 무슨 일이 있어야만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을까.
그는 서운한 기색을 숨기며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벨라, 이것 좀 봐봐.”
“이게 뭐야?”
“내가 밖에 나가면 너 좋아하는 거 사 오겠다고 했잖아. 여기도 이걸 팔더라?”
오랜 기억을 꺼내 든 이안의 얼굴은 금세 어린 시절처럼 천진한 미소로 물들었다.
그가 내민 종이 뭉치를 펴 보자 동그랗게 구운 빵이 나왔다. 헤버튼에 있을 때 이안이 종종 사 들고 오던 것이었다. 오렌지를 갈아 넣어 만든, 전혀 특별한 것 없는 호밀 빵이 그녀의 얼굴을 밝혔다.
“그러네. 이거 진짜 오랜만이다.”
“예전만큼 맛있을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네 생각나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
“고마워.”
“눈 오니까 방에 가져가서 먹어.”
괜히 방에 가져갔다가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벨라는 고개를 내저으며 담벼락 아래에 쪼그려 앉았다.
“아니야. 여기서 먹는 게 더 맛있을 것 같아. 옛날 생각도 나고.”
이안은 더 말리지 않고 그녀의 곁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한 입 뜯자, 아직 온기가 남아 있던 빵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벨라는 빵의 반을 떼어 이안에게 주었다. 그 모습이 바로 어제의 일상처럼 매우 자연스러웠다.
“언제 산 거야?”
“오늘 아침에.”
“갓 구운 거 사 왔나 봐? 아직도 따뜻하네.”
“식을까 봐 열심히 품고 있었지. 내가 네 닭이잖아.”
다분히 이안다운 대답에 벨라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옛날에도 그는 종종 먹을 것을 품고 오며 저런 말을 하곤 했다.
“베른은 어때?”
이안은 그녀의 머리칼에 붙은 빵 부스러기를 떼 주며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좋아. 네가 있잖아.”
벨라는 순간,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오른 탓에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손에 들린 빵으로 먹먹한 시선이 물끄러미 내려앉았다. 분명 기억하던 맛보다 훨씬 형편없는데, 사라지는 것이 너무 아까웠다.
이제 와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제게 돌아갈 곳이 있긴 할까.
이렇게 있으니 이안과의 추억이 너무 애틋하고 소중해서 마음이 벅찼지만, 그는 제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그저 어느 날 운 좋게 마주친 쉼터였고, 앞으로도 살아가고자 한다면 마냥 안온하게 안주할 수 없었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이리 아등바등 살아가려 할까.’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것조차 과한 바람이었던 걸까. 무언가를 욕심낼수록 점점 더 엉망이 되어 가는 듯했다.
벨라는 기분 좋은 미소로 검게 문드러지는 속내를 덮었다.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괜찮아?”
“응?”
분명 긍정의 대답을 했는데. 혹여 속으로만 생각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버린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 정도로 저를 보는 이안의 표정엔 안쓰러움과 걱정이 한가득했다.
“너 힘들어 보여.”
벨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도 들었다는 듯 싱거운 웃음을 내비쳤다.
“힘들긴. 내가 여기서 힘든 게 뭐 있겠어. 나는 괜찮아.”
“……괜찮은 얼굴이 아니잖아.”
“정말이야. 나는 괜찮은데…….”
괜찮다고 할 때마다 입안에 가시가 돋친 듯 까끌까끌했다. 정말 괜찮은데. 그 말이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떨궜다.
이안은 답답한 듯이 숨을 내쉬며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양어깨를 붙잡으니 가녀린 뼈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얼마나 속으로 앓은 건지 며칠 새에 눈에 띄게 해쓱해진 모습이었다.
“설마, 또 이상한 생각하는 건 아니지? 벨라, 그건 네 탓이 아니야. 잘잘못을 따지자면 먼저 잘못한 건 모르가타의 왕자고, 그다음은 섣부르게 행동한 공작 각하의 잘못이야. 너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지, 아무 잘못 없어.”
벨라는 이안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운이 나빴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불운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말이었다. 그러니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이 결코 위로가 되진 못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무렵, 바람이 불어와 촉촉한 눈가를 바싹 말려 놓았다. 바람에 고마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먼지도 함께였는지 눈을 깜빡이자 따끔한 통증이 이어졌다. 벨라는 눈을 감싸며 다시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을 본 이안은 한층 걱정 깊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벨라, 너……. 울어?”
“아, 그게 아니라…….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아.”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이물감이 느껴지며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버릇처럼 눈을 비비려 하자 이안이 손을 붙잡았다.
“내가 좀 불어 줄까?”
“으응.”
이안이 눈에 바람을 몇 번 후후 불어넣어 주자 신기하게도 거슬리던 통증이 말끔히 사라졌다.
“됐어? 빠진 것 같아?”
“응, 이제 안 아픈 거 보니까 사라졌나 봐. 진짜 바람 불어 주니까 바로 빠지네.”
개운함에 웃던 그때, 문득 시간이 제법 오래 지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이어 그가 혹여 일찍 돌아오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따랐고, 그는 사냥을 즐긴다는 것마저 연이어 떠올랐다. 그리고, 그를 처음 만난 날에도 그는 숲에서 총을 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곳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벨라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저를 직시하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했을 땐…… 심장이 얼어붙고 숨이 멎었다.
그가 제게 다가오는 짧은 시간이 마치 영원의 시간처럼 한없이 느리게 흘러갔다. 그동안 온몸이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각하.”
그를 발견하고선 일어서는 이안의 목소리가 부서져 먼지처럼 흩날렸다. 그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제 손목을 붙잡아 일으키자 숨죽였던 심장이 거세게 날뛰기 시작했다.
“벨라! 벨라!”
그녀는 그의 강한 힘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소리치는 이안의 목소리가 새된 비명처럼 날카롭게 귓가를 찢어 놓았다.
뒤따라온 에릭이 빠르게 이안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검집으로 앞을 가로막으며 나직이 덧붙였다.
“가만히 있어. 나서지 않는 게 도와주는 거니까.”
“하지만──!”
이안이 다시 뛰쳐나가려 했으나 이번엔 에릭이 그의 목을 틀어쥐어 벽으로 처박았다.
마치 숨통이라도 끊어 놓을 듯이 거센 손길이었지만, 죽일 거였다면 진작 검을 빼 들었을 것이다. 에릭은 제 시야에서 벨라의 모습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고, 공작님! 갑자기 왜 이러세요! 아파요. 이것 좀 놓고…….”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험한 분위기에 끌려가지 않으려 발악했지만,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 붙잡힌 손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절로 눈물이 모여 굵은 빗줄기처럼 흘러내렸다.
차오르길 반복하는 눈물 때문에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아 어떻게 방까지 끌려왔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는 침실에 들어오자마자 벨라를 벽으로 거칠게 몰아세웠다.
“흐윽…….”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그의 입술이 성급하게 맞물렸다. 애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벌을 주듯 고통스럽기만 한 행위였다.
어딘가에서 피가 터졌는지 입안 가득 비릿한 피 맛이 섞여들었다. 틈 없이 몰아세우는 탓에 결국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하지만 제 마음대로 울 수도 없었다. 그는 입안 곳곳을 헤치며 제 울음마저 모조리 삼켜 버렸다. 그녀는 제발 이 순간이 얼른 지나가길 기도했다.
제 목과 턱을 한 번에 움켜쥔 손길이 너무 두려웠다. 언제 숨통을 틀어막을지 모르는 막연한 공포에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입술이 새빨갛게 부어오르고 입안이 온통 얼얼해질 때까지 헤집히고서야 겨우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벨라는 숨을 헐떡이며 흐트러진 정신을 붙잡는 것에 급급했다.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온통 일그러졌다.
그 사이로 뻗어 온 손길이 거칠게 옷을 끌어 내렸다. 번뜩 정신이 든 벨라는 다급히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공작님, 제발…… 이러지 마세요. 싫어요. 흐윽, 공작님…….”
그에겐 간지러움조차 끼치지 못할 힘이었지만, 그의 손길을 멎게 할 정도로는 충분했다.
드러난 몸을 가린 채 흐느끼며 애원하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보던 벨리아르는 낮게 조소했다.
“왜, 이젠 몸을 지켜야겠어? 그 새끼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