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나는 네게 닿는 모든 것들이 싫어. 그걸 네가 알았으면 해.”
그는 알까. 자신의 한마디가 누군가를 이리 집요하게 헤쳐 놓는 줄.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으니 텅 빈 하늘만 보였다. 구름 한 점 없이 고요한 하늘을 보고 있자니 시끄러운 제 속이 더욱 원망스러워지기만 했다.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의 잔혹한 성정에, 그에 대한 공포에.
하지만 끔찍했던 그날의 장면은 도통 흐려지지 않고 틈만 나면 멋대로 눈앞에 굴러다녔다. 치워도 치워도, 아무리 눈을 감아도 되레 선명해질 뿐이었다.
그러니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그냥, 차라리……. 그런 생각이 들 만큼.
“그러고 있으면 전쟁이 끝나기라도 해?”
내내 저를 괴롭혀 대던 목소리였기에 새삼 놀랄 것도 없었다. 가만히 돌아보니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가 당연한 듯이 제게 손을 뻗었다.
“……공작님.”
“뭐가 그리 힘들어.”
다정한 손길로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물으니 그저 다 답해 버리고 싶어진다.
당신이라는 존재가 너무 버겁지만, 또 감히 소중해져 버려서, 차마 내려놓을 수 없어서 너무 힘들다고. 아직도 제 세상은 여전히 당신이라 괴롭다고.
“전에…… 제가 원하는 것은 다 줄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전에 조건이 있었던 것 같은데.”
“여태껏 공작님 말씀은 다 순순히 따랐잖아요.”
제법 당당한 말에 그는 낮게 웃으며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양심이 없네. 이리 해쓱한 꼴로 그딴 말을 지껄이면, 내가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할까?”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벨라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그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니 또다시 그날의 새빨간 피가 시야 가득 번지는 듯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매번 입맛이 없다고 식사를 내치길래 요리사의 실력을 의심하던 중이라, 방금 지하에 처박아 두고 오는 길인데.”
손끝으로 벨라의 입술을 천천히 쓸어 보던 그의 눈빛이 한층 짙어졌다.
“그 쓸모없는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 내다 보면 우리 아가씨의 입맛을 돌려놓을 만한 요리를 내어놓지 않을까 해서.”
권태롭게 읊조리는 말투가 너무 나긋해서 내용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얼핏 정신을 빼놓고 들으면 우아한 동화 같았다.
전에는 그가 하는 말들이 그저 제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스스럼없이 하녀의 팔을 베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가벼운 경고에 불과했다. 그라면 충분히 목을 베어 버릴 수 있었다.
“……거짓말이세요.”
벨라는 그의 잔혹한 성정이 묻히길 바라며 멋대로 희망을 입에 담았다.
“그래?”
“안 그러실 거잖아요.”
“이상하네. 말대꾸는 가르친 적이 없는데.”
단정하던 그의 입매가 비스듬히 휘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 하자, 그가 턱을 쥔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아, 우리 벨라는 원래 조금 버릇이 없었지.”
나른하게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날카롭게 박혀 들었다. 벨라는 그 따가움을 애써 무시한 채 얼른 입을 뗐다.
“……모르가타와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공작님께 부탁이 있어요.”
“안 돼.”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는 단호히 잘라 버렸다.
“……아직 듣지도 않으셨잖아요.”
“네가 무슨 말을 할지는 뻔하지.”
벨리아르는 무성의하게 그녀의 말투만 흉내 내어 높낮이 없이 읊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제발 최대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쪽으로 숙고해 주세요.”
정말 딱 제가 하려던 말 그대로라 벨라는 잠시 말을 잃었다.
“……제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셨어요?”
가만히 올려다보니 그는 제 뒷머리로 손을 옮겨 갔다. 손마디에 얽히는 부드러운 머리칼을 기꺼이 매만지는 손길에서 나른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럴 때면 가끔, 그가 저를 예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실이 마냥 기쁘지 않아 비참할 뿐이었다.
그가 뒷머리를 지그시 누른 탓에 벨라는 자연스레 그의 배 쪽에 이마를 묻게 되었다.
“제가 모르가타에 가서 왕자님께 말씀드려 볼까요? 하다못해 서신이라도…….”
그의 심기를 건드릴 말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정작 손길이 조금 거칠어지자 본능적인 불안이 밀려왔다. 덕분에 흐릿해진 말꼬리가 연기처럼 사그라들었다.
“우리 벨라는 다른 건 다 서툴면서, 날 화나게 하는 재주는 어찌 그리 탁월한지.”
“……죄 없는 사람들이 다칠 거예요.”
“설마, 지금 그따위 이유로 이리 시위하고 있다는 소리는 아닐 거야, 그렇지?”
벨라는 대답하는 대신 살며시 입술을 짓씹었다.
그따위 이유…….
그는 절대 지금 제 마음을 짓누르는 죄책감이라는 돌덩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치워 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거겠지.
“내 울타리 안이 너무 편안하지.”
“……저 때문이잖아요.”
며칠이 지난 지금도 수없이 그런 생각을 반복한다. 그날 조금 더 단호하게 대처했더라면, 차라리 그 자리에서 화를 냈다면…….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대처했든 그때 그가 나타나는 것은 필연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어디로 돌아가든 결국은…… 애초에 제 존재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나 하는 종착지에 다다르고야 마는 것이다.
그가 낮게 조소했다.
“웃긴 소릴 하네.”
다정히 뒷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일순 매섭게 변해 머리칼을 쥐어 뒤로 잡아당겼다. 강제로 고개가 젖혀진 벨라는 속절없이 그의 붉은 눈동자에 묶였다.
“벨라, 내가 또 한 번 너를 이용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그는 늘 말로써 저를 베었다. 마음은 베이더라도 피가 나지 않기 때문일까. 참 매정하게도 혀를 휘둘렀다.
“과연, 오로지 너 때문에 이번 전쟁이 일어나는 걸까? 네가 뭐라고. 귀족 영애처럼 굴려면 끝까지 제대로 해. 같잖은 연민에 휩싸여서 어리석은 짓 하지 말고.”
“……이번에도 저를 이용하신 거예요?”
모르가타 왕자가 성에 방문하고, 자신이 왕자의 눈에 띄고, 그걸 알면서도 에릭이 자신을 왕자와 마주치도록 하고. 모두가 그가 그려 놓은 판 위라면, 그리하여 또 한 번 저를 그 그림에 새겨 넣은 거라면…….
이미 너절해진 제 마음에 생채기 하나 더 늘어난다고 티가 날까.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국경이 맞닿아 있는 이상 언젠가는 벌어질 전쟁이었어. 모르가타에서 먼저 덤벼드는 건 제국 입장에선 득이고. 그러니까 너는, 그딴 생각할 필요 없어.”
이렇게 그는 늘, 제자리를 벗어나려는 인형을 손쉽게 되돌려 놓고 만다.
* * *
벨리아르의 무감한 시선이 무기고 안을 천천히 훑었다.
“현재 모르가타의 군사력으론 접경 지역을 지나는 것조차 힘들 겁니다.”
그를 뒤따르며 일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건 에릭의 일상이었기에 자연스레 전쟁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의 관심이 어디로 쏠려 있는지 파악하느라 긴장하고 진땀을 흘리는 건 로드릭의 몫이었다.
“그건 본인들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 무작정 덤비진 않겠지.”
“이럴 땐 왕자의 여성 편력이 도움이 되네요.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 일부러 다른 나라들과 혼인 동맹을 맺어 왔나 의심될 정도입니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로드릭이 제법 차분한 목소리로 의견을 덧붙였다.
“모르가타와 연합한 나라들이 그쪽에 군사력을 보탤 테고, 특히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페렌에서도 공격해 올 텐데……. 병력이 분산되는 건 저희로서도 부담되는 일 아닙니까?”
벨리아르가 칼날의 상태를 확인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하고 작게 수긍하기도 했다. 그러다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친구 있나?”
“……예, 당연히 있지요.”
급히 주제를 벗어난 질문이라 로드릭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중엔 정말 소중한 친구도 있고, 가끔 안부만 전하는 그저 그런 친구도 있겠지.”
“친구라고 해서 모두 막역한 사이는 아니니까요.”
“그럼 하나 묻지. 적당히 소중한 친구가 갑자기 찾아와 자기를 좀 숨겨 달라고 해. 그럼 자네는 숨겨 줄 건가?”
“……일단 무슨 일인지 들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반역을 꾀하려다 실패해서 도망치는 중이라면?”
“그건…….”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로드릭을 보며 그는 짧게 웃었다. 그러고는 한쪽에 놓여 있던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에릭, 오랜만에 몸 좀 풀까?”
“좋습니다.”
순식간에 연무장으로 향하는 둘을 보고서야 로드릭은 그가 굳이 대답을 바라지 않고 한 질문임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말만 연합일 뿐 다른 나라들은 제국에 진심으로 대항하지 못할 거라는 말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병력이 분산되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페이트 기사단의 부단장 직으로 있었던 로드릭은 쉽사리 전쟁에 대한 걱정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그는 서로 진검을 꺼내 들고 대련 준비를 마친 둘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예나 지금이나 도통 공작의 의도는 짐작할 수 없었다.
둘은 익숙하게 검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에릭에게 검을 가르쳐 준 것이 벨리아르니 가벼운 대련이야 별로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지만, 에릭은 점차 당황하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그의 검이 무겁고 날카로웠다. 검술로는 웬만한 기사단장에 견주는 에릭이 버거워할 정도기에 지켜보던 로드릭은 불안함에 입이 바짝 말랐다. 그가 에릭을 이 정도로 몰아붙인 적은 드물었다.
치열하게 검을 맞대던 그때,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에릭은 재빨리 바닥을 확인했고, 그것이 자신이 흘린 물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에릭의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그 틈을 타 벨리아르의 검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챙!
칼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가늘게 메아리쳤다. 에릭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숨을 몰아쉬며 칼을 쥔 손에 꽈악 힘을 주었다. 주인의 칼이 제 목을 겨누고 있었다.
“검을 들었을 땐 한눈팔지 말라고 했을 텐데.”
에릭의 시선이 그의 발치로 향했다. 그가 발을 치우자 익숙한 매듭 장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옅은 조소와 함께, 그가 퍽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런.”
에릭은 저도 모르게 입안으로 욕을 삼켰다. 무슨 이유가 있든 제 주인의 심기를 어지럽혀 놓기엔 충분한 장면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선물을 거절하지 않았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로드릭 경.”
“예?”
급격히 얼어붙은 분위기의 이유를 알 수 없어 그저 지켜보기만 하고 있던 로드릭이 얼결에 답했다.
“이럴 땐 누굴 조져야 할까.”
그러나 이번 역시 답을 바라고 건넨 질문이 아니었다. 로드릭은 이번엔 꽤 빠르게 그 사실을 깨달았으나, 무언가를 하기엔 상당히 늦은 시점이었다.
에릭의 목을 겨누고 있던 칼이 빠르게 그의 팔을 베고 거두어졌다. 에릭은 이를 악물어 삐져나오려는 신음을 억눌렀다. 소리는 참았지만, 흐트러지는 숨까지 조절할 수는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화들짝 놀란 로드릭이 황급히 다가왔다.
“각하! 갑자기 어찌 이러십니까!”
에릭은 피가 흘러나오는 팔을 꽉 부여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럴 땐 쓸데없는 변명 대신 무조건 엎드리는 게 최선이라는 걸, 에릭은 오랜 경험으로 터득했다.
“막중한 일을 앞두었으니 몸 관리에 집중하도록 해.”
괜히 벨라 앞에서 다친 티 내지 말고 알아서 잘 처신하라는 소리였다.
“……예, 신경 쓰이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벨리아르는 바닥에 떨어진 매듭 장식을 주워 들었다. 발에 짓밟혀 일그러진 장식으로 그의 시선이 오래 내려앉았다.
“……저 매듭 장식 말이에요. 제가…… 만든 거예요.”
그날 이후 내내 제 검에 매달려 있던 장식이 오늘에서야 눈에 거슬렸다.
그는 처음으로 제 감정을 판단할 수 없음에 어떠한 두려움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