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에릭은 제 주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한숨을 삼켰다. 치료를 마친 왕자 일행은 곧바로 고국으로 향했다.
성안은 거센 폭풍이 휘몰아치고 지나간 듯 매우 어수선했다. 에릭에게는 유독 긴 하루였고, 여유롭게 미소 짓는 주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치미는 밤이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욱 건조하고 까슬했다. 한 번 입이 터지니 뒷말을 덧붙이는 건 쉬웠다.
“모르가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당연하죠.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왕자의 손목을 날려 버리셨는데요. 국왕의 총애와 신임을 한꺼번에 받는 아주 귀한 맏아들이라죠.”
“주인님, 참으셔야 합니다. 상대는 모르가타의 왕자입니다. 국가적인 분쟁으로 번질 우려가 있습니다.”
벨리아르가 칼을 빼 들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딜 때, 에릭이 옆에서 필사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무조건 참으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제발 적당히만 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무슨 짓을 하든 몸뚱이만 성히 보냈더라면 자신이 어떻게든 수습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지, 이건 모두 제 불찰이었다. 제 주인은 벨라의 손목을 잡고 놔주지 않는 왕자의 모습을 본 순간부터 이미 돌아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든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사태였다. 애초에 그녀를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벨리아르는 부드러운 천으로 칼날을 닦으며 태연히 대꾸했다.
“나는 마땅한 응징을 한 것뿐이야.”
“……적당하진 않으셨습니다.”
그는 바람 빠지듯 웃으며 불빛에 칼날을 비춰 보았다.
“네가 지금 내 성질을 건드려서 달라지는 게 뭐지?”
에릭은 본능적으로 그가 그리 화가 난 상태는 아님을 알아챘다. 평소라면 당장 목에 칼이 들어오고도 남았을 텐데.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하니, 미치는 건 자신이었다. 그러니 이럴 땐 뻔뻔하게 굴어야 했다.
“화풀이치고는 과하셨습니다. 적당히 겁만 주었어도 될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차라리 몇 대 패고 끝내지 그러셨습니까.”
“아. 손목을 자르는 것보다 차라리 패 죽이는 게 나았다, 이 말이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는데, 네가 가서 그 새끼 좀 다시 잡아 올래?”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정말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내 더러운 성질을 탓해야지, 어쩌겠어.”
“제법 큰 파장이 일 겁니다. 곧 모르가타에서 책임을 물어 올 테고…….”
그는 에릭의 말을 자르며 단호히 말했다.
“그쪽이 먼저 원인을 제공했으니 우리 쪽에서 굽히고 들어갈 일은 없어. 이 일로 대화를 하고 싶거든 먼저 사죄하라고 해. 그게 아니면 응대하지 마.”
엄밀히 따지자면 가장 먼저 잘못을 저지른 건 왕자 쪽이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목을 날려 버리는 건 어느 상식에도 맞지 않는 대응임은 분명했다. 에릭은 결국 내내 혀끝에만 맴돌던 걱정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사안입니다. 모르가타의 국왕이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아무 일 없이 넘길 리 없죠.”
“그럼 전쟁을 하면 될 일이지. 뭐가 걱정이야? 이참에 국경선을 넓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누가 들으면 전쟁이 한낱 놀음인 줄 착각할 만큼 태연한 어투였다. 그래서 순간 에릭 역시 자신이 상황을 너무 심각하게 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이십니까?”
“그럼 농담일까?”
에릭은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그저 제 주인의 뒤를 따르면 될 일이었다. 조금 아니, 많이 귀찮아진다는 것이 문제지만, 그 정도는 주군을 잘못 선택한 것에 대한 대가로 치부할 수 있었다.
“……에드윈에게 밀서를 보내겠습니다.”
“이제야 똑똑하게 구는구나, 에릭.”
* * *
모르가타에서 제국에 요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황제와 벨리아르 공작이 직접 모르가타에 방문하여 정식으로 사죄할 것. 그에 대한 공문을 보냈고, 답은 사흘 만에 돌아왔다.
“우리를 속국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일입니까? 저는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제국에서 보내온 답서의 내용이 공개되자 대신들은 하나같이 노발대발하며 크게 분노했다. 모르가타 국왕은 제국의 인장이 새겨진 답신을 바라보며 조용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좋은 뜻으로 방문한 자리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은 진정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하나, 시시비비를 가리자면 가장 먼저 원인을 제공한 것은 귀국의 왕자이므로 제국에 요구한 것은 행할 수 없음을 전합니다.
앞으로도 양국의 원만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귀국의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 한번 제국에 방문하는 것을 권유하는 바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우리에겐 잘못이 없으니 너희가 와서 먼저 사죄하라는 뜻이었다.
귀하디귀한 왕자의 신체를 훼손시켜 놓고 이리 뻔뻔한 태도라니. 화가 나는 것과 별개로, 국왕은 현실적인 걱정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폐하, 감정적으로만 생각할 문제는 아니옵니다. 제국은 대륙의 실권을 쥐고 있는 강대국입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섣불리 척을 졌다간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왕자 전하께서 그리 처참한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일개 귀족 영애에게 말 한마디 건 것이 그 정도로 잘못된 일이었습니까?”
“경들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국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남은 선택지는 전쟁뿐입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저희가 제국에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에 하나 승리를 거둔다 한들, 그것이 정녕 제대로 된 승리겠습니까?”
수많은 국민이 죽어 나갈 테고, 국토는 치열한 전투의 여파로 황폐해질 것이다.
“그럼 경께서는 이대로 제국에 고개를 조아려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무려 왕자 전하의 손목이 절단되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잠자코 있자니요!”
“……확실히 이번 일은 중대한 사안입니다. 불필요한 전쟁을 피하는 것은 옳지만, 마냥 몸을 웅크리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입니다. 국민들도 이런 무력한 나라를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폐하,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이런 무례한 요구를 받아들이신다면 모르가타의 국제적인 위상은 땅에 떨어질 것이고, 제국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위치가 될 것입니다. 정녕 그것을 원하십니까?”
국왕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분명 무모한 일이지만, 이대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짓이었다. 국왕으로서도 한 사람의 아비로서도, 이 일은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모르가타는 이미 이백여 년 전 일어난 거대한 정복 전쟁 때 제국에게 굴하지 않고 굳건히 버텨 낸 전적이 있다.
현재 제국은 더욱 몸집을 키운 상태니 정면으로 돌파해서는 승산이 없을 테지만, 가진 패를 적절히 이용한다면 그렇게 불리한 싸움도 아닐 것이다.
천천히 눈을 뜬 국왕이 엄중한 목소리로 뜻을 전했다.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할 것이다.”
* * *
화원으로 향하는 벨리아르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멀리서부터 진동하는 이 역겨운 냄새는 필시 제 형제의 것이었다. 일부러 흔적을 뿌려 저를 부르는 행태에 그는 낮게 조소를 흘렸다.
이리 애타게 부르는데, 기꺼이 응해야지.
화원의 문을 열어젖히자 블루벨 꽃들 사이에 뻔뻔히 서 있는 엘리아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이야.”
엘리아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벨리아르는 인사를 받는 대신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
“이제 충분히 논 모양이네. 죽고 싶은 모양이지? 이리 제 발로 기어들어 온 걸 보니.”
“이제 인간 다 됐구나. 그리 죽음을 입에 올리고 말이야.”
신도 인간도 아닌 애매한 불멸자 주제에.
숨길 수 없는 증오로 일렁이는 초록빛 눈동자가 그리 말했다. 벨리아르는 조용히 미소를 삼키며 그의 귓가에 나직이 읊조렸다.
“내가 진정 널 죽이지 못할까? 네 아버지도 죽였는데.”
엘리아스의 낯에 여유롭게 떠다니던 미소가 서서히 힘을 잃었다.
“네 아버지이기도 하지.”
그 말에 벨리아르는 과장된 표정을 보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지. 나는 아버지를 죽이고 추방당한 패륜의 신이었어. 잊고 있었네. 알려 줘서 고마워, 엘리.”
친근히 부르는 애칭에 엘리아스는 차갑게 조소했다. 저리 부를 때마다 얼마나 찢어 죽여 버리고 싶은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일부러 저리 부르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넌 그때 아버지의 손에 얌전히 사라졌어야 해.”
“내가 이리 존재하는 것 역시 운명이겠지. 아버지는 내가 당신을 없앨 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나를 없애려 한 것이니까. 결국은 운명대로 되었잖아. 너와 내가 지독한 악연으로 얽힌 것도.”
“네 운명은…… 영원히 질긴 인연에 묶여 고통받는 거야. 아직도 그 아이를 잊지 못했잖아. 어리석긴. 이름이…… 벨라였나?”
천천히 그 이름을 입에 담자 벨리아르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아주 죽여 달라고 발악을 하는구나.”
엘리아스는 그제야 기분이 좋아진 듯 자그맣게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제 형제가 분노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지상을 떠날 생각이 없어. 예전에 그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던 날,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초록색 눈동자가 모습을 감췄다가 천천히 드러났다. 눈을 감은 순간, 제 형제가 슬픔에 잠겨 괴로워하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나는 오로지 너의 괴로움만을 원해. 그리고 나는, 네가 가장 괴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어. 물론, 너도 알 테지.”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한 벨리아르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 들어 그대로 엘리아스의 심장에 내리꽂았다.
정확히 심장이 있는 자리에 칼이 꽂혔음에도 그는 여유롭게 웃었다.
“그 칼로는 날 죽일 수 없다는 거, 알잖아. 다음부턴 괜히 힘쓰지 마, 벨리아르.”
눈앞에서 모래처럼 흩어지는 엘리아스의 모습을 보며 그는 칼을 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너는 분명 내 손에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