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그의 손이 잘게 떨리는 벨라의 어깨를 살며시 쓸어내렸다. 서서히 격해지는 숨을 내쉴 때마다 그녀의 입에서 희뿌연 입김이 피어올랐다. 입김이 사그라드는 순간순간에 그의 붉은 눈동자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벨라를 씹어 삼키듯 샅샅이 훑어 내리고서야 다시 입을 뗐다.
“에릭, 벨라를 데려가.”
에릭은 잠시 망설였으나, 주인의 명령을 거부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지금의 최선은 가능한 한 빨리 벨라를 방에 데려다 놓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아가씨, 제가 모시겠습니다.”
벨라는 그제야 제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면 지금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도저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제 손목을 쥐고 있지 않았더라면 필시 무너져 내리고 말았을 것이다.
“아가씨.”
에릭은 차마 그녀에게 손을 댈 수 없어 한 번 더 나지막이 채근했다. 벨라는 그제야 작은 숨을 토해 내며 필사적으로 걸음을 뗐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눈앞에 잘린 손목의 잔상이 떠다녔다. 혹한의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선연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적셨다. 속이 너무 울렁거렸다.
“괜찮을 겁니다.”
겨우 몇 걸음 떼었을 때, 에릭이 조용히 읊조렸다. 위로의 말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전혀 위로가 되진 않았다. 지금 벌어진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는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벨리아르는 칼을 내던지고서 로샨의 앞으로 다가갔다. 잘린 손목을 부여잡은 채 울부짖는 모습은 그리 흥미로운 것이 아니었기에 그의 표정은 여느 때처럼 무감했다.
“네 이놈……! 네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고통으로 얼룩진 로샨의 목소리가 처절한 울림을 남겼다. 그는 제 손목을 부여잡은 채 잔뜩 흥분한 꼴로 벨리아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휘어 올라간 무렵.
짜악──!
살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하!”
맞은 충격에 휘청이다 넘어질 뻔한 로샨을 알레이가 다급히 다가와 부축했다. 벨리아르는 저를 노려보는 로샨을 서늘히 가라앉은 눈빛으로 찍어 눌렀다.
“지금 네 처지를 이리 만든 건 저기 나뒹구는 네 손과 그 눈치 없는 혓바닥이다. 송장으로 고국에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그 눈깔도 조심해야 할 텐데.”
그가 다시 한번 손을 쳐든 때였다. 벨라가 다급히 달려와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만하세요, 공작님!”
그의 표정이 짜증스럽게 구겨졌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저를 올려다보는 벨라의 모습에 그의 손이 서서히 내려왔다.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네? 공작님…….”
“벨라, 놔.”
벨라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무리 제국의 권세를 손안에 틀어쥐고 있는 그라 하더라도 다른 나라와의 분쟁은 위험했다. 더욱이 왕족을 건드리는 것은…….
“아니요.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곧이어 모르가타의 병사들이 몰려와 일제히 칼을 빼 들었다. 그들은 처참한 왕자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고, 곧 분노에 휩싸였다. 공작을 향해 겨눈 칼끝에 더욱 힘이 실렸다.
그리고, 그들을 포위한 성의 기사들 역시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다. 언제 누군가의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수많은 칼끝의 중심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온 에릭이 병사들을 훑으며 말했다.
“이 자리에서 주군을 잃고 싶지 않으시다면 모두 칼을 거두십시오. 그래야 의사를 부르지 않겠습니까. 이런 의미 없는 짓에 시간을 쏟다 보면 왕자 전하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정중한 말투였으나 속뜻을 보면 엄연한 협박이었다. 칼을 거두지 않는다면 의사를 들이지 않겠다는 뜻이었으므로 모르가타의 병사들이 잠시 주춤거렸다. 그래도 차마 칼을 거두진 못하는 모습이었다.
에릭의 말이 아주 협박만은 아닌 것이,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로샨의 숨이 점점 가빠지고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그때, 로샨을 부축하고 있던 알레이가 자국의 병사들을 향해 지시했다.
“……모두 칼을 거두어라.”
그나마 빠르게 상황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제야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칼을 거두었다. 알레이가 이를 꽉 깨물며 화를 억누른 채 청했다.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 주십시오.”
그 말에 에릭은 허락을 구하듯 벨리아르를 바라봤다. 그가 허락의 뜻을 내비치자마자 에릭은 성의 기사에게 눈짓으로 지시했다. 능숙하게 뜻을 알아챈 기사는 의사를 부르기 위해 자리를 벗어났다.
“절대 이대로 끝내지 않을 겁니다. 이 일은 추후에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알레이가 주먹을 꽉 틀어쥐고 하는 말에 벨리아르는 희미한 조소를 내비쳤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형형하게 얼어붙자 에릭은 재빨리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 이곳은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제발 더 이상 날뛰지 말고 물러나 달라는 간곡한 청이었다. 벨리아르는 짧은 숨을 내쉬곤 여전히 제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는 벨라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벨라, 네가 놔줘야 내가 가지.”
그의 말에도 벨라는 요지부동이었다. 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듣지 못한 척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저를 계속 끌어안고 있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굳이 두 번 말할 생각은 없었다.
* * *
침실에 들어오자마자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히 커프스를 푸는 벨리아르의 모습에 벨라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늘 제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공포, 불안, 하다 하다 이젠 분노와 걱정까지 더했다.
“왜…… 왜 그러셨어요?”
아직도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최대한 목에 힘을 줘 봤지만, 늘 그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뭐를.”
“왕자님이시잖아요……. 근데 그렇게…….”
“왕자인 게 뭐. 왕자면 그따위로 네 손목 붙잡고 헛소리 지껄여도 돼? 아니면, 내가 끼어들어서 아쉽기라도 했어? 왕자랑 혼인할 기회였는데 내가 망쳐 놓은 건가?”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순간 답답함에 언성이 높아졌음에도 그는 나무라는 대신 가까이 다가와 손을 뻗었다. 부드럽게 뺨을 감싸 쥐는 손길에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사고가 모두 흩어져 버렸다.
“그럴 땐 욕을 하든 뺨을 후려치든 했어야지.”
무엇 때문에 그리하지 못했는데. 정말, 이토록 그가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공작님은 정말…… 아무런 걱정이 없으세요?”
“내가 무슨 걱정을 해야 할까.”
“타국의 왕자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행동해 버리시면…… 대체 뒷감당을 어쩌시려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누워.”
그는 틈만 나면 자신을 재우려 했다. 아니, 지금 같은 때엔 맞춰 주기 귀찮아서 재우려 한다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아직 낮이잖아요. 저는 밤새 푹 잤고요. 전혀 안 졸려요.”
“재워 달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는 기어코 벨라를 침대로 끌고 가 앉혔다. 가만히 내려다보는 눈빛이 ‘누워.’ 하고 말하는 듯했다.
“공작님.”
“왜.”
“화나셨어요?”
“그럼 화가 안 났을까?”
눈빛은 서늘한데 입매만 늘어진 것을 보니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벨라는 고개를 내린 채 꿋꿋이 물었다.
“……왜요? 왜 화가 나셨어요?”
“우유 한잔 마시고 잘래?”
부드러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언뜻 잠이 오는 것 같기도 했다. 서서히 몸의 긴장이 풀리는 탓이다. 그럴수록 벨라는 눈에 바짝 힘을 주었다.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저는 공작님 대답이 듣고 싶어요. ……무엇 때문에 화가 나신 건지 말씀해 주세요.”
“내가 왕자의 손목을 잘라서 슬퍼?”
물음이 하도 황당해서 허튼 숨이 새어 나왔다
“공작님께서는 제가 지금 슬퍼하는 것처럼 보이세요?”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마를 새 없이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을 기어코 들키고 말았다.
“화가 난 것 같은데.”
그의 엄지가 발갛게 부어오른 눈 밑을 뭉근히 쓸었다. 떠미는 손길에 갈 곳을 잃고 밀려난 눈물방울들이 그의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울고 싶으면 울어.”
“……아직 울고 싶지 않아요. 공작님께 답을 듣지 못했잖아요.”
그가 낮게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세요?”
“왜? 나는 지금 상당히 기분이 좋은데.”
“저는 화가 나요.”
“그러니까. 그래서 내가 기분이 좋다는 거야, 벨라. 네가 슬퍼하는 게 아니라 화를 내니까.”
늘 그가 어이없이 웃었는데, 이번엔 벨라가 한숨처럼 짧게 헛웃음을 쳤다.
“저는 정말 공작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요. 공작님께선 정말…….”
벨리아르는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따위로 기어오르는데, 화가 나지 않았다. 되레 왜 이리 기분이 상쾌한지 모를 노릇이었다.
“벨라.”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면 늘 눈부신 햇살에 잠기는 기분이 들곤 한다. 지금 서 있는 곳이 무수히 엉킨 나뭇가지 사이로 바스러지는 햇볕 아래인지 헷갈릴 만큼. 푸른 녹음의 향이 번졌다.
“나는 네게 닿는 모든 것이 싫어. 그걸 네가 알았으면 해.”
가끔은 너를 비추는 햇살마저 거두고 싶을 정도로. 한 번 참았으니 이번은 좀 넘어가 주었으면 하는데.
그는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삼키는 벨라를 끌어안고 가만히 등을 도닥였다.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비로소 속이 후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