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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18)화 (118/180)

118화

“엣취!”

내뱉는 재채기 소리가 어찌나 큰지 문밖을 뚫고 나갈 정도였다. 그러나 로샨은 알레이의 재채기 소리에도 이른 아침부터 지금까지 내내 심각한 얼굴이었다.

“어제 내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확실한 게냐?”

“……지금 제 상태를 보고도, ──으엣취!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알레이는 이제 대놓고 로샨을 향해 눈을 흘겼다. 상당히 불경한 태도였지만, 자신이 한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엉덩이를 걷어차여 타국인 앞에서 꼴사납게 엎어지게 만든 것도 모자라, 어제는 이 살벌한 추위에 온종일 밖에서 덜덜 떨어야 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너도 보지 않았더냐. 그저께 분명 나를 보며 웃었단 말이다. 그 수줍음에 붉어지던 얼굴은 절대 거짓이 아니었어.”

“……그 영애는 전하를 보고 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조심스레 사실을 전했으나 이미 로샨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분명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로샨은 상당히 심란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은 베른을 떠나 소만으로 향하는 날이었기에 바깥은 한창 분주했다.

이제 정말 곧 떠나야 할 시간인데.

하지만 도저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찌 마음에 품은 여인을 두고 떠난단 말인가.

로샨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던 중, 그가 창밖으로 무언가를 발견하고선 갑작스레 몸을 벌떡 일으켰다.

“출발 시각에 맞춰 돌아올 테니, 준비하고 있거라.”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로샨은 이미 문을 열고 있었다.

“어, 어딜 가십니까? 전하, 전하──!”

순식간에 홀로 남게 된 알레이의 재채기 소리만이 고요한 방 안을 울렸다.

* * *

“그 꽃은 뭐였습니까?”

창가에 앉아 독서 중인 그녀에게 에릭이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

“에릭 경, 그 질문 어제도 하셨어요. 원래 이렇게 끈질긴 분이셨나요?”

“예. 제가 말 안 했던가요? 저는 궁금한 건 못 참는 사람입니다.”

벨라는 흘끗 시선을 들어 에릭을 봤다. 그의 곧은 눈빛과 마주치자마자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가 들어올 때 급히 펼친 것이라 제목이 뭐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책이었다.

“……하지만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

에릭이 한 걸음 다가와 책을 한 장 넘겼다. 그는 이미 벨라가 책을 읽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헤르센 꽃이던데요. 그 꽃은 모르가타에서만 자생하는 꽃이고요.”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책을 탁 덮었다.

“다 알고 계시면서 왜 물으시는 거예요?”

“저는 그 꽃의 정보만 말했을 뿐입니다. 아가씨께서 그런 반응을 보이시는 걸 보니, 모르가타의 왕자와 관련이 있나 보군요.”

이쯤 되니 정말 헷갈렸다. 이미 알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자신을 떠보다가 알아챈 건지. 이러나저러나 그를 속여 넘기기엔 역부족임을 깨달았다.

“……그저께 마주쳤어요.”

“왕자와 말을 섞지도 말라고 말씀드릴 걸 그랬네요.”

“그날도 자그마한 사고가 있었을 뿐이에요. 이것도 공작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을 거예요. 그러려고 에릭 경께 그 꽃을 드린 거고요.”

에릭이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이번에도 입을 다물어야겠네요? 이러다 제가 먼저 주인님 손에 죽겠습니다.”

“……말씀하실 거예요?”

“글쎄요. 고민 중입니다.”

전혀 무언가를 고민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리고, 벨라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에릭이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모를까?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 건 있어도, 이 성안에서 그가 모르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고민하는 척하는 에릭의 태도는 매우 수상쩍었다. 무언가 제게 원하는 게 있지 않고서야 저럴 리가 없는데.

“혹시…… 제게 뭔가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요?”

살며시 물으니 그제야 에릭은 태연히 웃었다.

“제가 감히 어떻게 아가씨를 부려 먹겠습니까. 부탁 정도로 하죠.”

냉큼 나오는 대답에 벨라는 황당한 숨을 내쉬었다. 그냥 처음부터 제게 얘기했으면 될 일 가지고.

“무슨 일인데요?”

“숲의 오두막에 가셔서 주인님 좀 모셔와 주세요. 가는 길은 아시죠?”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벨라의 고운 미간이 흐트러졌다. 그 말은 지금…….

“……저더러 성을 나가라고요?”

“어차피 그 숲은 주인님의 권역입니다. 설마, 아직도…….”

에릭이 설핏 눈가를 찌푸리며 말끝을 흐리자 벨라는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지금 에릭 경께서 무엇을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틀렸어요.”

그녀의 대답에 가볍게 웃은 그는 이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타국의 손님들이 분주히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요. 그래도 명색이 왕위 계승자인데 적당히 예우는 해 드려야지 않겠습니까.”

벨라는 그제야 에릭이 왜 그를 찾아오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중요한 손님을 배웅하는 자리에 성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 건 꽤 실례였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리자니 그의 성미가 너무 오만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라면 충분히 제 기분에 따라 왕자를 무시하고도 남으니.

“근데, 왜 저를 보내세요?”

“저는 그 오두막에 가 본 적이 없는데, 아가씨는 발을 들이신 적이 있으니까요. 제가 가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매우 솔직한 대답이었다. 벨라는 말없이 에릭을 응시했다. 결국, 입술 새로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실 그 오두막엔 정말 가고 싶지 않았지만,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부터 에릭이 제게 일방적으로 지시했다면 싫다는 기색이라도 비쳤겠는데, 때로는 차마 거절할 수 없는 거래가 존재하는 법이다. 굳이 확실하지 않은 것에 도박할 필요는 없었다.

“……그 꽃, 버리셔야 해요.”

“예,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벨라는 방을 가로지르며 숲으로 통하는 문의 위치를 떠올렸다. 자세히 생각나진 않지만, 대충 서쪽으로 가다 보면 나왔던 것 같다.

“참, 아가씨.”

“네?”

“조심하세요. 요즘 주인님께서 상당히 심기가 어지러우시거든요.”

아마도 그 이유는 에릭보다 벨라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집무실에서 이안과 대화한 후로 그는 매우 이상했다. 그런 말을 하고도 이안이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니. 정말,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저를 죽이진 않으실 거예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무언가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그저 그 오두막에 가야 해서라고 생각했다.

차디찬 겨울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시간이 없다는 에릭의 말 때문인지, 벨라의 걸음은 평소보다 살짝 빨랐다. 그것도 아니면, 은연중에 혹여 그 왕자와 마주치는 일을 피하고 싶었거나.

지나가는 길마다 타국인들이 보이길래 일부러 인적 드문 곳으로 발길을 틀었다. 그래서 너무 섣불리 마음을 놓아 버린 게 문제였을까.

“영애!”

뒤에서 날아오는 부름에 걸음이 멎었다.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의 주인이 떠올랐지만, 벨라는 부디 제 기억이 틀리길 바랐다.

“왜 이리 걸음이 빠르십니까. 하마터면 이대로 놓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불안한 예감은 귀신같이 맞아 들었다. 천천히 뒤돌아서자 크게 숨을 고르는 왕자가 보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예 뛰어가 버리는 건데. 벨라는 어두운 표정을 감추려 공손한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모르가타의 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없는 격식까지 모조리 끌어모았다. 아무리 불편해도 상대는 이웃 나라의 왕자였다. 자신이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며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었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지금 급히 가 봐야 할 곳이 있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급한 건 사실이었기에 이번엔 여지를 주지 않고 바로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로샨이 성급한 손길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시면 됩니다.”

“아, 저…….”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란 이런 것일까.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낯선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벨라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옅은 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 섣부르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꼭 해야겠습니다. 저와 함께 모르가타에 가지 않겠습니까?”

“……뭐라고요?”

하도 이해가 되지 않는 말에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런 벨라의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로샨은 급히 말을 쏟아 냈다.

“당황스러운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도 지금 제 손을 잡으면 평생 후회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전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결코 외롭지 않도록 해 주겠습니다. 이곳이 아무리 제국이라고는 하나, 일개 귀족과 혼인하여 살아가는 것보단 왕족과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이 불쾌해 미칠 지경이었다. 손목에서 전해지는 압박감이 너무 소름 끼치고, 왕자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메스꺼웠다.

“……이것 좀 놔주세요.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살짝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 하자, 순간 악력이 더 세졌다. 아릿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라 그녀의 표정이 사뭇 일그러졌다.

“그대의 눈동자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대체, 그게 무슨…….”

“제국에서는 자색 눈동자를 지닌 자는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죠. 저와 혼인하면 그 누구보다 귀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자신이 있습니다.”

이쯤 되니 화가 났다. 한 나라의 왕자면 이리 무례하게 굴어도 되는 걸까. 그러나 상대가 상대인지라 벨라는 치미는 화를 꾹 억눌렀다.

마음 같아선 당장 그를 밀쳐 내고 싶었지만, 제 감정적인 행동이 그를 곤란하게 만들까 두려웠다. 그러다 화가 나서 저를 버릴까 봐. 희미하게 스쳐 간 상상일 뿐인데 목이 멨다.

“저는 싫다지 않았습니까. 제발, 이것 좀 놓고……!”

그 순간, 눈앞이 번쩍 튀었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빠르게 지나가고, 동시에 제 손목을 틀어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아…….”

방금까지만 해도 제 손목을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이, 어느 순간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광경이 몹시 이질적이고 위화감이 짙어 모든 사고가 멎어 버렸다.

온몸이 고장 난 듯 굳어 애꿎은 입술만 의미 없이 벙긋거렸다. 순간 그녀를 비롯해 모든 시간이 멈춰 버린 듯했다.

그 찰나의 적막을 깨트린 건, 누군가의 참혹한 외침이었다.

“──저, 전하!”

“아, 아……. 아아…….”

로샨의 허망한 목소리가 끊어질 듯 희미하게 이어졌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깔끔하게 잘려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제 손목을 정신없이 훑었다.

넘어질 듯 다급히 달려온 알레이가 제 주군의 손목을 살폈다. 아무리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것은 로샨의 손이 맞았다. 알레이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벨리아르 공작을 거세게 노려봤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어떻게…… 어떻게 이런!”

모든 상황을 지켜본 에릭은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끝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는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칼을 들고서 벨라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는 저를 끌어당기는 손길에 맥없이 딸려 갔다. 알레이의 처절한 울음소리, 로샨의 허망한 목소리가 모두 물밑에서 흐르는 듯이 푹 잠겨 있었다. 모든 게 엉망인 중심에서 그는 태연히 벨라의 손목을 살폈다.

“괜찮아?”

“……공작님…….”

옅게 붉은 자국이 남은 손목을 어루만져 주는 손길이 한없이 다정했다.

“저딴 개소리를 왜 듣고 있어.”

제발,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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