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알레이는 이따금 소복이 쌓인 눈에 괜스레 발자국을 꾹 찍어 보았다. 품 안 가득 들고 있는 꽃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볼 것이라곤 땅의 눈밖에 없었다.
모르가타에도 겨울이 있긴 하지만 다른 곳보단 따뜻한 편이었다. 그러니 새하얀 눈도 신기하고, 살을 에는 추위도 낯설다 못해 이젠 괴로울 지경이었다.
“전하.”
“왜 그러느냐.”
“제 귀를 좀 봐 주십시오. 잘 붙어 있습니까?”
말할 때마다 뿌연 입김이 눈앞을 가리고 턱이 멋대로 떨려 이가 딱딱 부딪쳤다. 그 와중에도 로샨은 춥지도 않은지 여유로운 태도로 알레이의 귀를 살폈다.
“오냐. 아주 자알 붙어 있다. 그러니 헛소리 그만하고 꽃이나 제대로 들고 있거라.”
알레이는 두툼한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젖혀 하늘을 쳐다봤다. 이리 꽃 더미를 들고 무의미하게 서성이는 게 대체 몇 시간째인지. 모르가타로 돌아가면 이번에야말로 꼭 때려치우고 말 것이라 다짐했다.
로샨은 그런 알레이의 서글픈 마음일랑 전혀 모른다는 듯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기다리는 사람을 오늘 마주칠 수 없다면 내일도 기다릴 작정이었다.
슬슬 다리가 저리는 듯해 의자라도 놓고 있을까 고민하던 무렵, 저 멀리서 그토록 기다리던 은빛 머리칼이 비쳤다.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로샨은 알레이를 제 앞으로 끌어왔다.
벨라는 눈을 밟을 때마다 나는 뽀득뽀득 소리가 좋아 일부러 눈이 쌓인 곳으로만 발을 디뎠다. 그 탓에 앞을 잘 살피지 못한 것이 화근일까.
“으악!”
새하얗던 눈밭이 어느새 붉은 꽃으로 물들었다. 순간 눈앞을 뒤덮은 꽃에 눈길이 쏠려 그 사이에 엎어진 사람은 뒤늦게 발견했다.
“으아…….”
복장을 보니 타국의 손님이었다. 벨라는 얼른 쪼그려 앉아 걱정스러운 눈길로 남자를 살폈다.
“……괜찮으세요?”
“아, 네, 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넘어질 때 꽤 큰 소리가 났던 것 같은데 남자는 연신 괜찮다며 흩어진 꽃들을 줍기 시작했다. 혹시 상처 난 곳은 없는지 힐끗힐끗 살피며 꽃 줍는 것을 돕던 무렵, 느긋한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이런, 제 시종이 실수한 모양입니다. 알레이, 어서 일어나 갈무리하거라. 숙녀분 앞에서 이 무슨 추태냐?”
“……송구합니다.”
붉은색 옷……. 저번에 마주쳤던 그 남자다.
“왕자를 만나신 모양입니다.”
모르가타의 왕자.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으세요? 다친 곳은 없으시고요?”
벨라는 로샨을 향해 공손한 태도로 답하곤 다시 한번 그의 시종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러나 알레이가 입을 떼려는 순간, 로샨이 끼어들었다.
“워낙 튼튼해서 괜찮습니다.”
찰나의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로샨이 한 걸음 다가오자 밟힌 눈에서 뽀득, 소리가 났다.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모르가타의 왕자 전하시지요? 저번엔 제가 미처 전하의 신분을 알지 못하여…….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무례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벨라는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저번과 달리 대화는 제대로 마무리 지었으니 할 도리는 다한 것이다. 그녀는 얼른 이 불편한 자리를 피하려고 눈치를 엿봤다.
“그럼, 전 이만…….”
“저, 꽃 좋아하십니까?”
“네?”
“저번에 화분을 옮기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보니 꽃을 좋아하는 듯하여.”
“아…….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그에게 잠시 도서관에 다녀오겠다 말하고 나온 참이었다. 생각보다 늦어지면 분명 질책할 테니 괜스레 마음이 달았다.
“이것은 제가 공작께 감사의 의미로 전할 꽃들입니다. 모르가타에서도 귀한 꽃인데, 혹 이름을 아십니까?”
“……아니요, 잘 알지 못합니다.”
적당히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만 대답하고 얼른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시종이 들고 있는 붉은 꽃으로 눈길이 닿았는데, 예쁘긴 예뻤다.
“헤르센입니다. 꽃말은…… ‘열정적인 사랑’이지요.”
“잘 어울리는 꽃말이네요.”
“모르가타에선 청혼할 때 많이 사용하는 꽃입니다. 색도 예쁘고 값비싼 것이라 여인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지요.”
이어 로샨은 꽃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벨라는 꽃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의 말소리가 귀에 담기진 않았다.
안쪽으로 갈수록 짙은 붉은색을 띠는 꽃잎을 보고 있자니 절로 벨리아르 공작이 떠올랐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떠오르고, 이어 그가 즐겨 마시던 포도주가 떠올랐다.
뒤이어 끓인 포도주를 입으로 넘겨주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그때 그가 제 목에 남긴 흔적들이 아직도 선명했다.
벨라는 작게 숨을 내쉬며 목도리의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니 후덥지근한 열기가 훅 끼치는 듯했다. 순간 혹한의 겨울인 것도 잊고 몸이 달듯이 뜨거워졌다. 그가 남긴 흔적들에 불씨가 붙어 작열하는 듯했다.
그저 홀로 떠올렸을 뿐인데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고개를 숙이니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샜다.
벨라는 눈앞으로 불쑥 나타난 붉은 꽃 덕분에 잠시 잊고 있던 로샨의 존재를 상기했다. 고개를 들자 모르가타의 왕자는 제게 꽃 한 송이를 내밀며 빙긋 웃고 있었다.
“이리 만난 것도 진귀한 인연이지 않습니까.”
벨라는 반걸음 물러나며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공작님께 선물할 귀한 꽃인데…….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고작 꽃 한 송이일 뿐입니다. 받아 주십시오.”
눈앞에서 꽃을 살살 흔들기까지 하니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벨라는 조심스레 꽃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어제 그 파란 꽃보다 훨씬 잘 어울리시는군요.”
벨라는 대답 대신 손에 쥔 꽃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줄기에 가시가 돋친 것도 아닌데 손끝이 까끌까끌한 느낌이었다.
어쩐지 조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저를 보며 부드럽게 웃는 왕자의 존재가 너무 불편하게 느껴져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저는 내일도 같은 시간에 이곳으로 올 겁니다.”
벨라는 바삐 걸음을 떼어 귓가에 맴도는 왕자의 목소리를 떨쳐 내고자 애썼다.
그 탓에 무작정 걷다 보니 원래 목적지였던 도서관과는 영 다른 방향으로 와 버렸다. 그녀는 제 손에 들린 붉은 꽃 한 송이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침실까지 가져갔다간 분명 공작님께서 화를 내실 텐데. 왕자가 주었다고 하면 더욱 난리가 날 테고.
애물단지 같은 꽃을 빙글 돌려보던 벨라는 마침 지나가던 사용인을 향해 말을 붙였다.
“저기, 부탁이 있어요.”
그녀의 말에 멈춰선 사용인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과묵한 건 익숙하기에 벨라는 당황하지 않고 꽃을 건넸다.
“이 꽃을 아데인 경께 전해 주세요.”
꽃이 제 손을 떠나자마자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벨라는 에릭에게 곤란한 것을 떠넘기고서야 가볍게 미소 지었다. 어느새 그녀에게 있어 만만한 건 에릭이 되어 있었다.
* * *
언제부터일까, 그는 가끔 자신을 끌어안은 채 잠들기 시작했다. 사실 안고 재운다는 표현이 더 알맞았다.
벨라는 늘 그의 품에 고개를 묻은 채 잠들었고, 일어났을 때 그는 어김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러니 오늘은 실로 신기하고 색다른 날이었다. 언젠가 한번 그의 잠든 모습을 본 적이 있지만, 그리 떠올리고 싶진 않은 기억이었다.
조용히 눈을 감은 그의 모습은 낯선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붉은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고 있지 않으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럼에도 몰래 그의 잠든 모습을 훔쳐보고 있으니 서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북을 내리치듯 울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자꾸만 마음을 떠밀었다.
제 세계를 떠받치고 있던 벽은 완전히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다시 쌓아 올릴 수 없을 만큼 산산조각이 났다고.
하지만 그 잔해는 남아 있음을 간과했다. 무너진 마음의 부스러기들은 옅은 바람에도 쉽게 나부꼈다.
혹시 들킨다면 잠꼬대인 척하자. 일어나서 새벽의 일을 묻는다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하면 될 일이다.
완벽한 핑계를 준비해 놓고서야 벨라는 몸을 움직였다. 이것은 필시 어둑한 달빛이 마법을 부린 것이다. 그러니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을까.
살며시 입술이 맞닿았다. 혹여 그가 깰까 봐 한껏 죽인 숨소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터질 듯이 뛰어 대는 심장 소리가 문제였지.
그렇다고 한밤의 비밀스런 입맞춤을 무르긴 싫었기에 벨라는 살풋이 눈을 감아 버렸다. 보이지 않으면 장땡이라는 유치한 생각의 발로였다.
그러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가만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때였다. 새까만 밤하늘에 붉은 달이 뜬다면 이런 느낌일까. 순간 들켰다는 것도 잊은 채, 그녀는 하염없이 그의 눈을 마주했다.
“벨라.”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기껏 생각해 놓은 핑계들은커녕 단어 하나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네, 공작님.”
“오늘 누구 만났어?”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물음에 착실히 대답하는 것뿐이었다.
“모르가타의 왕자님이요.”
그가 낮은 숨을 흘렸다.
“부인이 다섯이야.”
“네?”
“부인이 다섯이라고.”
그 공작님일지라도 잠꼬대를 하는 모양이다.
“……아, 네.”
그는 도통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선 다시 눈을 감았다. 곧이어 일정한 숨소리가 들렸다.
“주무세요?”
짧게나마 대답해 줄 만도 한데, 그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벨라는 괜한 심술이 생겨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공작님.”
물론, 정말로 그가 잠들었다면 깨울 마음은 없었기에 목소리는 선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참 이상하게도 그가 저보다 일찍 잠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아요.”
그녀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벨라는 그 말이 마땅히 그를 깨울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혹은, 고요히 눈 감은 악마를 움직일 수 있으리라고.
아니나 다를까 기꺼이 뻗어 온 손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러이 감싸 눌렀다. 그의 품은 늘 모질고 아늑했다. 벨라는 비로소 편안히 눈을 감았다.
어느새 그의 교활함에 물들어 버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