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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16)화 (116/180)

116화

당장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려던 찰나, 그의 낮은 음성이 온몸을 휘감았다.

“……나가.”

벨라는 숨을 멈춘 채 다시금 멈춰 섰다. 손잡이를 부여잡은 손이 미세한 떨림을 퍼트렸다.

이안은 제 목에 겨눠진 칼의 주인을 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무엇이 두려워 벌레만도 못한 제 목숨 하나 거둬 가는 것을 망설이십니까?”

“네가 진정 벨라를 위한다면, 지금 나가는 게 좋을 거야.”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벨라를 지킬 겁니다.”

평소 그 무엇보다 냉정하던 칼끝이 주인의 분노를 투영하듯 서슬 퍼렇게 떨렸다. 이안은 끝까지 곧은 눈빛으로 그를 마주하다 이내 몸을 움직였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벨라는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이러다 문 앞에서 이안과 마주치는 상상이 머릿속에 짧게 스쳤다.

당황하여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더듬거릴 것이 빤하기에 벨라는 서둘러 모퉁이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곧이어 문을 열고 나온 이안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다시금 복도가 고요하게 가라앉았을 무렵, 벨라는 살며시 고개를 빼고 주위를 살폈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잔잔해서 더 불안이 일었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다시 집무실 앞으로 다가섰다. 분명 죽을 뻔한 이안이 걱정됨이 마땅한데, 몸과 마음은 모두 공작에게 향하고 있었다.

문 너머로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살며시 문에 귀를 대 보았다. 평소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괜찮으신 건가?’

문득 떠오른 걱정이 우스웠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벨라는 정확히 무엇이 걱정스러운지도 모른 채 문 앞에서 망설였다.

지금 들어가면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럼에도 굳이 그의 얼굴을 봐야겠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벨라는 짧게 숨을 내쉬어 여전히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려는 그때.

쨍그랑──!

무언가 문에 부딪혀 깨진 듯 바로 코앞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란 벨라는 버릇처럼 입을 틀어막은 채 그대로 석상처럼 굳고 말았다.

뒤이어 온갖 물건이 깨지고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안에는 그 혼자일 텐데. 혹여 누군가가 더 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만큼 그가 화를 표출하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어떠한 순간에도 이성적이었던 그가…….

그저 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비밀스러운 장면을 훔쳐본 듯 마음이 불편했다. 벨라는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문에서 조심조심 물러났다. 복도에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잔뜩 깔린 상념들로 머릿속이 무거운 탓인지 걸음이 느릿했다. 멍하니 걷는데 맞은편에서 에릭의 모습이 보였다.

“아가씨.”

에릭은 평소와 다른 벨라의 표정을 확인하곤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디 아프십니까?”

벨라는 힘없이 고개를 내저은 후, 되레 물었다.

“공작님께 가는 길이세요?”

“예, 맞습니다.”

지금 그에게는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아무리 가까운 에릭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긴 싫을 것이다. 괜스레 에릭에게 불똥이 튈까 걱정되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혹시 지금 꼭 전해 드려야 하는 일인가요?”

“아니요, 그렇진 않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아, 그게…….”

핑곗거리가 마땅치 않아 말끝이 흐려졌다. 그러다 창문 너머로 던진 의미 없는 시선에 소복이 쌓인 눈밭이 걸렸다. 평소보다 조용하다 했더니 눈송이가 자그마한 소리를 모두 품었던 모양이다. 벨라는 고민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서요.”

“……눈사람이요?”

“네. 에릭 경과 함께 만들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럼 잠시만 기다리시겠습니까? 먼저 주인님께 보고드리고 오겠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곧바로 저를 지나쳐 가려는 에릭의 움직임에 벨라는 다급히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끄트머리만 살짝 잡았을 뿐인데 에릭은 곧바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니요, 지금 당장 만들고 싶어요. 조금도 못 기다려요. 그러니까 어서 가요. 공작님께는 제가 나중에 잘 말씀드릴게요.”

“…….”

자그마한 손에 붙잡힌 옷깃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에릭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 무언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벨라는 더 이상 핑계 대기를 포기했다.

“……그냥 아무 말씀 마시고 함께 눈사람을 만들겠다고 해 주세요.”

반쯤 포기하고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는 의외로 순순히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예, 저도 눈사람이 만들고 싶어졌네요.”

* * *

그는 왜 이안을 죽이지 않았을까. 설령 그때 자신이 말리러 들어갔다 해도 그의 칼을 막진 못했을 것이다. 절대 이유 없이 자비를 베풀 사람이 아닌데…….

“그건 감자입니까?”

불쑥 끼어든 목소리가 답답하게 엉킨 상념 사이를 파고들었다. 옆에서 뒷짐을 지고 선 채 비스듬한 시선으로 벨라가 만드는 눈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던 에릭의 목소리였다.

아무리 좀 울퉁불퉁하기로서니 저리 진지하게 감자냐고 묻는 건 필시 놀리는 것이다. 벨라는 스치듯 에릭을 한 번 흘겨보곤 불퉁하게 답했다.

“……눈사람인데요? 이게 머리예요.”

“아.”

성의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감탄사가 이토록 얄미울 수 없었다.

“에릭 경은 왜 안 만드세요?”

“제가 정말 눈사람이 만들고 싶어서 아가씨를 따라왔겠습니까?”

하긴. 그건 제 어설픈 부탁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혼자 감정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기 위해서. 쓸데없는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만큼 그의 흐트러진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정말 집무실에 다른 사람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오늘 평소와 달랐다.

“아, 그러고 보니 왕국에서 온 손님을 마주친 적이 있어요.”

“왕국의 손님이요?”

“네. 눈이 무척 크고 눈썹은 진하고……. 머리카락이 검은색이신 분이요.”

“모르가타인 대부분은 그렇게 생겼습니다.”

“아…….”

잘 생각해 보니 에릭의 말이 맞았다. 그래도 조금 더 부리부리하게 생겼던 것 같은데.

“혹시, 붉은색 옷을 입고 있던가요?”

“네, 그랬던 것 같아요.”

“왕자를 만나신 모양입니다.”

안 그래도 옷차림이 조금 화려하길래 왕자를 보좌하러 온 귀족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왕자라니. 생각지 못했기에 벨라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분이 왕자님이시라고요?”

“모르가타에서 붉은색은 왕족의 고유색입니다. 그러니 붉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면 왕자일 수밖에 없죠.”

그럼…… 왕자를 그리 무례하게 대해 버린 거야? 이상한 사람 같아서 급히 자리를 떠 버렸는데.

벨라는 혹시 자신이 왕자의 심기를 거슬러 무언가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 표정이 설핏 어두워졌다.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이야기라기보단…… 그냥 짧게 스쳤을 뿐이에요.”

“못 들은 걸로 할 테니 주인님께는 말씀드리지 마세요.”

“……네.”

“어차피 왕자는 이틀 뒤 떠날 테니 신경 쓰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벨라는 에릭의 말을 굳게 믿으며 감자 같다던 눈덩이를 예쁘게 다듬는 것에 집중했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함이었다.

* * *

“내가 말한 건 알아보았느냐?”

“예, 알아는 보았습니다.”

알레이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내며 대꾸했다. 그의 대답에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은 로샨이 입매를 길게 늘였다.

“네가 가져온 정보가 마음에 든다면 방금의 불충은 용서해 주마.”

낯선 여인에 대해서 알아 오라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타국에 방문할 때마다 꼭 이런 일이 벌어지니, 굳이 제 주군에게 의도를 물을 필요조차 없었다. 알레이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입을 뗐다.

“남작가의 영애라고 합니다. 공작의 먼 친척으로, 공작이 후견하고 있어 이 성에서 지내고 있는 듯합니다.”

“또 다른 건?”

“열심히 수소문해 보았지만 이것 말고 별다른 정보는 나오지 않더라고요. 사용인들에게 물어봤자 묵묵부답이고……. 결국 기사들에게 빌다시피 해서 겨우 들은 정보인데 그마저도 이것이 전부입니다.”

“흐음…….”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로샨은 이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딱히 문제는 없겠구나.”

“예?”

“새로운 부인을 맞는 것 말이다.”

친척이면 공작의 여인은 아니라는 것이고, 공작의 후견인이라면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여 로샨은 그녀를 제 부인으로 맞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온데, 전하.”

“왜 그러느냐?”

“그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없죠. 다만…… 조금 걱정돼서 그럽니다. 뭔가 이상하기도 하고요.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알레이는 막연한 불안감에 조심스레 의견을 덧붙였다. 직접 정보를 알아보고 다닌 만큼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긴 한데, 말로 설명하기엔 애매해서 딱히 정의할 수가 없었다.

“너는 항상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그리 유약해서 앞으로 어찌하려고 그러느냐. 이건 비단 내 욕심만이 앞선 것은 아니다. 나라 간에 관계를 맺는 것 중 혼인만큼 확실하고 좋은 방법은 없지. 게다가 벨리아르 공작과도 연을 쌓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수확은 없지 않겠느냐.”

사실 로샨의 말 중 틀린 것은 없었다. 대륙에서 가장 영향력이 센 나라는 분명 제국이고, 그런 제국의 실세인 벨리아르 공작과 연을 맺는다는 것은 모든 이들이 탐내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공작께 자리를 마련해 달라 요청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로샨은 이번에도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어찌 사내가 되어 여인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얻으려 한단 말이냐. 무릇 사내란 스스로 여인의 마음을 얻을 줄 알아야 한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당당히 내뱉는 말에 알레이는 어이없는 숨을 내뱉었다.

“언제는 전하의 욕심만은 아니라면서요…….”

로샨은 알레이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여인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꽃을 들고 있었다. 워낙 아름다운 자태라 당시엔 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여인들은 필시 꽃을 좋아하니…….

“너는 지금 즉시 나가서 헤르센 꽃을 구해 오거라.”

헤르센은 모르가타의 동부에서 자생하는 귀한 꽃이었다. 국내에서도 값이 상당한 꽃인데 제국에서 그 꽃을 구해 오라니. 알레이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예? 제국에서 그 꽃을 어떻게 구합니까……!”

“그건 네가 고민해야 할 일이지. 당장 내일 필요하니, 오늘 내로 구해 오거라.”

“대체 양심이 있으십니까?!”

로샨은 짧게 헛기침을 하며 능숙하게 알레이의 존재를 지워 냈다. 분한 듯 씩씩대던 알레이는 결국 발을 쿵쿵거리며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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