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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15)화 (115/180)

115화

“네? 누구신지…….”

동그래진 눈으로 돌아본 곳엔 호기롭게 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타국 손님들의 정보가 아예 없었던 벨라는 말꼬리를 흐리며 눈을 깜빡였다.

“아,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에 숙녀분께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저는…… 모르가타에서 방문한 손님입니다.”

“모르가타요?”

낯선 남자가 말을 거는 것이 제법 당황스러웠기에 벨라는 애꿎은 되물음만 남겼다. 웃는 낯으로 다가오는 낯선 이가 그리 달갑지는 않아, 화분을 든 손에 살며시 힘이 들어갔다.

“예. 화분을 이리 주십시오. 가녀린 팔로 들기엔 무거워 보입니다.”

남자가 한 발자국 다가오며 손을 뻗자마자 벨라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인 탓이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혼자 들 수 있어요.”

눈에 띄게 경계하며 거리를 두는 모습에 로샨은 멋쩍은 듯 웃었다.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도와주려는 것뿐이니──.”

“지금 좀 바빠서……. 선의는 감사합니다.”

벨라는 로샨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후딱 말을 내뱉곤 재빨리 자리를 떴다. 도망치기라도 하듯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로샨의 다급한 음성이 던져졌다.

“저, 이름이라도……!”

로샨이 허망하게 내뱉은 숨이 허공에 흩어졌다. 기분 탓인지 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이 더욱 차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착실히 허리를 숙여 인사까지 하고 사라진 그녀의 모습이 계속 아른거렸다.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벨라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던 로샨은 누군가 다급히 다가오는 발소리에도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전하! 한참을 찾았잖습니까. 아무리 성내라도 그렇지, 이리 혼자 돌아다니지 마시라니까요. 위험합니다.”

뛰어왔는지 가쁘게 몰아쉬는 숨만큼이나 급한 잔소리가 이어졌다. 늘 그렇듯 말없이 사라진 로샨을 찾아 헤매는 건 알레이의 몫이었다. 제대로 듣긴 한 건지, 로샨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래. 확실히 위험한 것 같구나.”

“벌써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혹, 블루벨에는 요정이 산다더냐?”

“……아직 잠이 덜 깨신 겁니까?”

황당한 듯 대꾸했지만 알레이는 속으로 기도했다. 부디 제 주군의 혼을 빼앗아 간 것이 새로운 여인은 아니길 말이다.

* * *

공작의 집무실은 유독 고요하고 공기가 무거웠다. 그만큼 숨 쉬는 것마저 조심스러워졌다.

이안은 허리 뒤로 맞잡은 손에 꽈악 힘을 주었다. 벨리아르 공작에게만큼은 자신의 나약함을 눈곱만큼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의외네. 이리 호기롭게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권태로운 음성이 날아와 목구멍을 죄는 듯했다. 이안은 떨리는 숨을 억누른 채 곧은 시선으로 그를 마주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말이었는지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몄다.

“네놈이 내게 부탁이라……. 우리가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 줄은 처음 알았어.”

“오직 각하께서만 들어주실 수 있는 부탁입니다.”

“너는 내 성정을 아주 잘 알 텐데.”

비웃는 말에 이안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아직도 손목이 잘려 집에 돌아온 아버지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예, 저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겠지요. 각하께선 심기가 뒤틀리면 아무 죄 없는 사람의 손목도 주저 없이 잘라 내 버리신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원망하나?”

이안은 순간 대답할 수 없었다.

원망하냐고? 이 감정을 단순한 원망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마음속으로는 공작을 향해 수없이 달려들고 소리쳤다. 꼭 그랬어야만 했냐고, 굳이 한낱 기사의 삶을 그리 무참히 짓밟았어야만 했냐고.

그가 단순한 마음으로 저지른 그 일 때문에 한 가정이 어떻게 망가졌는지 샅샅이 일러 주고 싶었다. 그리해도 눈앞의 이 악마는 가소로운 듯이 웃고 말 것이다. 그 사실이 이안의 이성을 미친 듯이 흩트려 놓았다.

“……저를 왜 당신의 기사로 받아들이셨습니까?”

“네 아비를 닮지 않아서겠지.”

그가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와 이안의 앞에 섰다.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시선은 익숙한 지배자의 눈빛이었다.

“전에도 말했었던 것 같은데. 네 눈빛은 건방지다고. 이게 부탁하러 온 자의 태도인가?”

“각하께서는 제 부탁을 꼭 들어주셔야 할 겁니다.”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건 아비를 닮았네.”

그가 자신을 자극하려고 일부러 꺼내는 말들임을 안다. 붉은 눈동자를 노려보고 있으니 끝을 알 수 없는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이안은 겨우 이성을 붙잡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는지 알아차렸다.

“말해 봐, 그렇게 절실한 부탁이 뭔지.”

공작이 이 부탁만 들어준다면 모든 것을 내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여 이안은 원수에게 고개 숙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 * *

도서관에서 돌아오느라 밖을 잠깐 거닐었을 뿐인데, 겨울의 한기가 온몸에 덕지덕지 묻었다. 복도를 지나며 무심코 목도리를 만지작거리자 겨울 냄새가 풍겼다.

화분을 화원에 옮겨 놓으니 다른 욕심이 생겼다. 다른 꽃들처럼 제 꽃도 땅에 심겨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해서 정원사에게 물으니 그는 곤란한 얼굴로 답했다.

“공작님께 여쭤보시지요. 공작님 지시 없이 함부로 이 화원을 건드렸다간 제 목이 달아납니다.”

이후, 벨라는 망설임 없이 그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화원에 꽃을 심어도 되냐고 물어보는 건 다른 것에 비해 정말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집무실에 다다르자 안에서 희미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연히 에릭과 대화하는 줄 알았는데, 에릭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벨라는 살며시 문 쪽으로 다가섰다.

“벨라를…… 놓아달라고 했습니다.”

‘……이안?’ 분명 이안의 목소리였다. 벨라는 숨죽인 채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벨라를 가둬 두고 계시는 것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것은 제가 책임질 테니 벨라는 놓아주십시오.”

“입만 열면 건방진 소릴 해 대네.”

“저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것뿐입니다.”

“무엇이 잘못됐지?”

“……각하께서 벨라를 이리 가둬 놓을 자격은 없다는 말입니다.”

“벨라가 기사들에게 쫓기던 날,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

공작의 질문에 이안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벨라는 치마를 꽉 말아쥐었다. 그날의 일은 결코 이안의 잘못이 아니었다. 굳이 탓한다면 제 불행한 눈동자를 탓해야겠지. 그 말에 또 상처받고 마음 아파할 이안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할 말이 없겠지. 너는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렸으니. 나는 너처럼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내 것을 지키는 거고.”

“그건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벨라를 망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의 나직한 숨소리가 흘렀다. 얼핏 한숨을 쉬는 것 같기도, 조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덩달아 벨라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문을 두드려서 둘의 대화를 잘라야 하는 건 아닌지 망설여졌다.

“각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벨라를 곁에 두시는 겁니까?”

이어진 이안의 물음에 요동치던 심장이 고요히 내려앉았다. 벨라는 문을 두드리는 대신 손끝을 살며시 문에 대었다. 그의 대답이 궁금하면서도, 듣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도 아니고.”

“저는 벨라에게 무엇보다 깊은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무심코 듣게 된 고백이었지만 그리 놀랍진 않았다. 이안이 제게 주었던 감정들이 단순한 우정은 아니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 필사적으로 도망쳤는지도 모른다.

“네놈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딴 소릴 지껄일 수 있을까?”

“그러니 벨라를 놓아달라는 말입니다. 부탁에는 마땅한 대가가 따라야 한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벨라를 놓아주면…… 제 목숨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이안의 굳센 말에 벨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멍청이. 겁도 없이 저런 말을……. 제게 벨리아르 공작에 대한 무서운 소문들을 전해 준 장본인이니만큼 그 성정을 뻔히 알면서.

“멍청한 건 집안 내력인가? 내게 네 목숨의 가치는 지나가던 벌레만도 못해. 수지가 맞지 않는 거래라는 생각은 안 드나?”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문 너머로 그의 움직임이 선연히 느껴졌다. 한 걸음, 두 걸음. 이안에게 다가서는 발소리가 파고들듯 심장을 쿵쿵 짓밟았다.

“지금 당장 네 목을 베어도 내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아, 죽어서도 사랑하는 벨라를 잘 볼 수 있도록 목은 정원 한가운데에 매달아 주마.”

마치 제 귀에 대고 속삭인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내리꽂혔다. 문에 대고 있던 벨라의 손으로 불안이 스며들며 곱아들었다. 그는 절대 허튼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신 같은 악마 손에 붙잡힌 벨라가 가엾습니다.”

소름 끼치는 쇳소리가 날카롭게 귓전을 파고들었다. 벨라는 눈을 질끈 감으며 황급히 문손잡이를 쥐었다.

기어코 그가 이안을 죽이고 말 것이다.

그의 칼엔 자비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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