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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14)화 (114/180)

114화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서자 눅진한 포도주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가 눈앞에서 잔을 살짝 흔들었다.

“오렌지 껍질을 넣고 끓인 포도주야.”

벨라의 입에서 ‘아.’ 하고 짧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끓인 것이라 평소보다 향이 진했나 보다.

진한 향기가 풍기는 포도주는 베른의 겨울과 잘 어울렸고, 그의 붉은 눈동자와 잘 어울렸다. 그러니 붉게 넘실대는 포도주 잔을 들고 서 있는 그에게 홀연히 눈길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마셔 볼래?”

“네.”

주저 없이 냉큼 답하자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몄다. 그는 조금 전 물음과는 달리, 벨라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포도주를 제 입안에 한 모금 머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벨라는 버릇처럼 기대를 접었다. 어차피 주지도 않을 거면서 묻기는 왜 물은 건지.

불퉁한 마음이 부풀던 찰나, 어쩐지 가까이 다가오는가 싶던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맞물렸다. 설핏 굳어진 몸을 달래듯 천천히 등허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에 다물렸던 입술이 맥없이 풀어졌다.

달큼하고 쌉싸름한 액체와 함께 그가 뜨겁게 밀고 들어왔다.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벨라는 목마른 사슴처럼 그가 전해 주는 포도주를 달게 받아 마셨다. 겨우 한 모금이었던 것이 아쉬울 정도로 포도주는 다디달았다.

강한 열기를 품은 그의 혀가 입안 곳곳을 멋대로 헤쳤다. 포도주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듯 그는 자신이 주었던 것을 모조리 빼앗아 갔다.

살짝 떨어진 입술 새로 열띤 숨이 오고 갔다. 고작 키스였을 뿐인데 격한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거세게 뛰고 온몸이 달아올랐다.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자신만큼이나 흐트러진 그의 모습이 스쳤다. 뭉근하게 목덜미를 쓰다듬던 손이 머리칼을 살짝 쥐어 뒤로 젖혔다. 열기에 흐릿하게 풀어진 눈동자가 맥없이 그에게 얽매였다.

벨리아르는 새하얗게 드러난 벨라의 목으로 주저 없이 입술을 묻었다. 연한 살결을 빨며 가끔 이를 세우기도 했다.

“아──.”

살짝 아픔이 느껴지자 그녀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샜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벨라의 목 곳곳에 붉은 흔적을 남겼다.

일부러 표식을 남기려는 듯한 그 행위는 집요하게 이루어졌다. 이따금 혀로 쓸어 주는 것이 마치 다디단 꿀을 취하는 행동처럼 느껴졌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는 벨라를 놓아주었다. 벨리아르는 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드러난 목은 그가 새겨 놓은 흔적들로 온통 울긋불긋해져 엉망이었다.

그의 입가에 포만감 가득한 나른한 미소가 스몄다. 그는 손끝으로 자신의 흔적을 지그시 눌러 보다가 살살 쓸어내리곤 했다.

“잘 가리고 다녀야겠네.”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가를 꿰뚫었다. 벨라는 아직 식지 않은 뜨거운 숨을 흘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벨리아르는 짧게 웃으며 그녀의 동그란 이마로 입술을 묻었다.

“놀고 있어.”

살갗 위로 가볍게 흩어지는 숨결이 간지러워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는 큼지막한 손으로 머리칼을 흩트려 놓곤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가 버렸다.

벨라는 방문이 닫히자마자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제 목의 상태를 확인한 순간, 짧게 숨을 들이켰다. 생각보다 훨씬 엉망이어서 멍하니 입이 벌어졌다.

“이건…… 나가지 말라는 뜻인가?”

잘 가리고 다녀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가리지 않으면 돌아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찬찬히 흔적을 살피던 벨라의 얼굴이 살짝 울상 졌다.

옷을 끌어 올려 가려 보려 했지만 턱도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벨라는 곧이어 무언가를 떠올리곤 서랍으로 다가갔다.

예전에 소만에 갔을 때 그가 주었던 목도리가 있었다. 복슬복슬한 토끼털로 만든 듯한 하얀 목도리. 지금 같은 날씨에 딱 알맞았다.

벨라는 그 목도리를 꺼내 목에 둘둘 감고선 다시 거울 앞에 섰다. 거울 너머로 꾹 다물린 입매가 삐죽 솟았다. 이 정도면 완벽했다.

바로 화분을 화원에 옮겨 놓으려다가, 우선은 도서관에 들러 꽃에 관련된 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꽃을 키우는 데 어떤 환경이 제일 적합한지 공부가 조금 필요해 보였다.

벨라는 폭신한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며 정원을 가로질렀다. 타국에서 온 손님들이 머물고 있다는 것은 에릭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평소보다 어수선한 분위기는 그리 당황스럽지 않았다.

벨라는 혹여 누군가 저에게 말을 걸까 봐 종종걸음으로 살짝 고개를 숙인 채 걸었다.

“벨라, 혹시 네게 함부로 대하는 기사가 있으면 바로 말해.”

“함부로의 기준이 어디까지인데요?”

“다양하지. 함부로 말을 건다거나, 함부로 만진다거나, 함부로 쳐다본다던가.”

“……인사는 하던데요?”

“그렇겠지. 함부로 무시하면 사지를 찢어 버린다고 했으니까.”

그 얘기를 들은 후로 최대한 기사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도 섞지 않으려 애썼다. 농담처럼 말했다지만 그는 정말 그렇게 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아가씨.”

바삐 걸음을 옮기던 중, 벨라는 익숙한 목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곳엔 부드럽게 웃으며 살짝 손을 흔드는 이안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버릇처럼 입꼬리가 휘어 올라갔다. 이안은 주위를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곤 벨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네가 그렇게 부르니까 이상해.”

“어쩔 수 없어.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까.”

문득, 편하게 말하라고 해도 끝내 말을 높이던 치치가 떠올랐다. 치치에게 자신은 평생 귀족가의 영애였을 것이고, 지금 이안에게도 자신은 ‘아가씨’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이 기분을 울적하게 끌어 내렸다.

이안은 편안히 웃다가도 이내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살폈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렇게 지나가다 마주칠 수 있어서. 그날…… 그렇게 헤어지고 마음이 안 좋았어. 별일 없었던 거지?”

“전혀 없었으니까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이제…… 예배당은 잘 못 갈 것 같아.”

“괜찮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곳이 예배당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 가는 길이었어?”

“도서관에. 요즘 꽃을 키우고 있는데, 관련된 책이 있나 찾아보려고.”

“데려다줄게.”

이안이 선뜻 말하며 한 걸음 다가왔지만, 벨라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반걸음 물러섰다. 안 그래도 손님들 때문에 바쁠 테고, 혹여 다른 사람 눈에 띄어 이안에게 불똥이 튈까 불안했던 탓이다.

“괜찮아. 너 바쁠 텐데 얼른 가 봐.”

“정말 괜찮겠어? 별다른 말 안 하고 그냥 데려다주기만 하면 남들 보기에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정말 괜찮아. 여기선 눈앞도 훤히 보이는데, 뭘.”

벨라는 빙긋 웃으며 제 눈을 가리켰다. 헤버튼에 있을 땐 숲을 나가려면 헝겊으로 눈을 가렸기에 종종 이안이 동행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 성은, 벨라에게 가장 위험한 곳임과 동시에 가장 안전한 곳이기도 했다.

“그래, 알았어. 그럼 조심히 가. 나중에 또 보자.”

벨라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이안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러니까 꼭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아 마음이 몽글거렸다.

다시 걸음을 옮기던 찰나, 이안이 다시 한번 그녀를 불러세웠다.

“저, 벨라.”

“응?”

이안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망설이다가, 곧 조심스러운 물음을 건넸다.

“같이 밖에 나가는 건…… 안 되는 거지?”

목소리에 온갖 미련과 걱정, 기대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벨라는 씁쓸한 미소를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녀의 대답에 이안은 곧장 표정을 폈다. 실망과 걱정을 내색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고스란히 보여 벨라는 살짝 고개를 떨궜다.

“그럼 뭐 필요한 거 있어? 먹고 싶은 거라든가. 외출할 때 사 올게. 너 시장에서 파는 빵 같은 거 좋아했잖아. 오랜만에 그런 거…….”

“아니야, 이안. 나 정말 괜찮아. 내 생각 말고 편하게 다녀와.”

더 이상 이안의 말을 듣는 것이 버거워서, 벨라는 애써 말을 잘라 냈다.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쳐 마음이 울렁거렸다.

이안은 자신이 바깥에 자유롭게 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안에겐 들키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저, 편안하게 누리며 사는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는데.

그런 내면을 들켰다고 생각하니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 부끄러운 마음마저 들켜 버릴까 두려워, 얼른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그래.”

벨라는 도망치듯 바삐 걸음을 뗐다. 목도리로 가린 그의 흔적처럼, 얼굴도 목도리에 푹 파묻어 버리고 싶었다. 어디론가 푹 꺼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이안은 멀어지는 벨라를 보며 오늘 그녀에게 괜찮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헤아렸다.

손가락이 하나씩 곱아들수록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이내 꽉 쥔 주먹 속엔 벨리아르 공작에 대한 분노만이 가득 차 넘실댔다.

제게 남은 것이라곤 오로지 벨라뿐인데, 그녀마저 멀어지고 있었다. 괜찮은 것이 무엇 하나 없었다.

* * *

다음 날, 꽃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본 벨라는 당장 화분들을 화원에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하나는 방에 놓아 둔다고 해도 옮겨야 할 화분은 총 세 개였다. 한 번에 하나씩만 들 수 있으니 산책 삼아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면 될 것 같았다.

호기롭게 화분을 하나 들어 방을 나섰던 벨라는 황급히 되돌아와 목도리를 감고 다시 나갔다.

적당한 크기의 화분이라 그리 무겁지도 않았고, 화원까지의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아 모든 것이 적당했다. 높고 푸른 하늘과 더불어 평소보다 매섭지 않은 추위가 괜스레 마음을 간질였다.

하여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

“도와드리겠습니다.”

뒤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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