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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13)화 (113/180)

113화

조용하던 성내가 타국의 빈객들로 잠시 활기를 띠었다. 천천히 내려오는 눈송이 하나에도 가벼이 터지는 웃음소리가 창문을 넘어 응접실 안까지 스몄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이라니요. 말로 전해 들었던 것보다 제국의 풍경이 워낙 뛰어나 내내 눈이 즐거웠습니다. 당최 마차의 창을 닫을 수가 없더군요.”

모르가타의 왕자, 로샨은 호탕하게 웃으며 블루벨의 절경을 칭찬했다. 산이 많은 모르가타와 달리 제국 땅은 드넓은 평원이 주를 이루고 있어 그들이 보기엔 충분히 이국적인 풍경이었을 것이다.

벨리아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버릇처럼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베른에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저 역시 공을 뵙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모르가타에서도 공의 명성이 자자합니다.”

벨리아르의 의례적인 미소와 인사에도 로샨은 풍부한 표정으로 화답했다. 이목구비가 크고 뚜렷해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사내였다. 벨리아르는 차를 한 모금 넘기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습니까?”

“이번에도 반역을 막고 큰 공을 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큰일을 하셨습니다.”

“다른 이가 아닌 전하께서 하시는 말씀이니 더욱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모르가타는 폐쇄적인 만큼 타국의 정세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국의 소식 역시 바깥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고.

그러니 로샨이 먼저 이런 주제를 꺼내는 것은 상당히 뜻밖인 일이었다. 그만큼 그 의지가 뚜렷이 드러나기도 했다. 제국 말에도 능통한 것을 보니 오래전부터 국제 정세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저는 모르가타의 굳게 닫힌 문을 열려고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리 저를 찾아오셨겠지요.”

겉으론 조용해 보이나 대륙 전체가 모르가타 왕자의 행적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제국에 방문했다는 것은 그리 특별한 소식이 아니지만, 굳이 공작까지 찾아갔다는 것은 무엇보다 발 빠르게 퍼져 나갈 소식이었다. 평온하던 땅이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별다른 뜻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닙니다. 한번 뵙고 싶은 마음에 다소 급히 연락을 드렸는데, 이리 흔쾌히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히려 로샨에게 가장 관심이 없는 건 바로 눈앞에 있는 벨리아르였다. 적당히 대꾸해 주고 있긴 하지만, 그의 관심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소만으로 향하시는 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는 대충 이야깃거리를 던져 놓곤 창문 너머로 넌지시 눈길을 주었다. 붉은 눈동자가 너른 정원을 느릿하게 훑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여 시야를 넓히려고 노력 중입니다. 소만뿐 아니라 앞으로도 최대한 여러 나라를 둘러보며 국제적인 견문을…….”

로샨의 형식적인 대답이 이어졌으나 그에겐 담기지 못한 채 허공으로 흩어졌다.

원체 말이 많은 스타일인지 이것저것 이야기하긴 했지만, 중요한 정보들은 교묘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서로 아무런 이득이 없는 무의미한 담화였다.

이후 로샨이 응접실에서 나오자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 알레이가 뒤따랐다.

“어떠셨습니까?”

“무엇이 말이냐?”

“아, 벨리아르 공작 말입니다. 소문으로 듣기엔 아주 극악무도한 악마가 따로 없다고──.”

“쉿. 입 조심하거라.”

단호한 일갈에 알레이는 살짝 몸을 움츠리며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조용히 말을 줄이며 정원으로 나오자마자 로샨이 혀를 차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여긴 모르가타가 아니라 블루벨이니 언행에 특히 조심하라고 몇 번을 얘기하느냐? 작은 책이라도 잡혔다간 국가적인 분란으로 번지기 십상이다.”

“알겠습니다……. 하도 신기한 것투성이라 그러지요.”

“제국 땅을 밟은 지가 며칠째인데 아직도 그리 신기하더냐?”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가 아닙니까. 여기선 몇 날 며칠을 지내도 신기하고 궁금한 것이 줄어들질 않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봐 와서 동생 같은 알레이의 투정에 로샨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이것을 좀 알아보겠느냐? 나도 이곳에 온 이후, 영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있어서 말이다.”

“그게 무엇입니까? 말씀해 주시면 제가 최대한 많이 알아 오겠습니다.”

로샨은 짧게 헛기침을 하며 눈앞의 먼 곳을 턱짓했다.

“자, 잘 보아라.”

“예에.”

알레이는 눈매를 가느다랗게 늘인 채 로샨이 가리킨 곳으로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들만 보일 뿐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느냐?”

“……예, 앞은 잘 보입니다.”

심드렁한 대꾸에 로샨의 답답한 한숨이 이어졌다.

“네놈은 그래서 안 된다는 것이다! 숲만 보지 말고 그 안에 세세한 풀과 나무들을 좀 살펴보란 말이다.”

당최 무엇을 보라는 건지.

알레이는 눈이 빠져라 앞을 살펴보았으나 도통 로샨이 무엇을 원하는 건지 알아낼 수 없었다. 이번엔 알레이가 답답한 숨을 토해 냈다.

“저어……. 그래도 잘 모르겠는데요……. 아, 그냥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신 건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허어, 많이 컸구나. 이젠 내게 그리 큰소리도 칠 줄 알고.”

로샨이 짐짓 엄한 목소리로 다그치자 알레이는 능청스러운 태도로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 여긴 제국 땅입니다. 가뜩이나 위험한 곳에서 그리 신하를 핍박하시는 모습을 보이시면 어찌합니까? 전하의 평판이 잘못 전해질까 우려되옵니다. 부디, 자중해 주시옵소서.”

주위를 한 번 살핀 로샨이 알레이의 입을 살짝 내리쳤다.

“입만 살았구나.”

“……제 입이 원래부터 이리 튀어나온 게 아닙니다. 이게 다 어렸을 적부터 전하께서 하도…….”

“자, 이번엔 잘 보아라.”

그때 성의 하녀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오자 로샨은 목소리를 낮추며 알레이의 불퉁한 중얼거림을 잘라 냈다.

“예? 무엇을…….”

어리둥절한 알레이를 뒤로한 채 로샨이 지나가는 하녀에게 다가갔다.

“잠시, 길 좀 물을까 한다만. 서고에 가려고 하는데 어디로 가면 되지?”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하녀는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 가시다가 왼쪽으로 틀면 큰 건물이 나옵니다. 그 건물 2층에 있습니다.”

하녀는 깔끔하게 필요한 말만 전하고는 말없이 허리 숙여 인사한 후, 조용한 발걸음으로 멀어졌다. 공허한 바람이 불어와 하녀가 있었던 자리를 가볍게 쓸고 지나갔다.

“보았느냐?”

“예, 이번엔 분명히 보았습니다.”

보긴 보았는데 대체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것은 여전했다. 로샨은 의아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이상하지 않으냐? 어찌 내가 말을 걸었는데, 저리 찬바람이 쌩쌩 휘날릴 수가 있는 것이지?”

“……제국의 겨울은 특히 날씨가 춥기로 유명합니다.”

“지금 그런 얘기가 아니잖느냐. 방금 하녀의 표정을 보지 못하였느냐? 제국에선 내 매력이 먹히지 않는 건가……. 아니지, 그럴 리가 없는데…….”

로샨의 진지한 중얼거림에 알레이는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전하께선 다 좋으신데 그게 문젭니다.”

“무엇이 말이냐?”

“여인을 좋아해도 너무 좋아하십니다.”

“사내가 여인을 좋아하는 게 잘못된 것이더냐?”

모르가타는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이지만, 왕족만 예외로 일부다처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니 모르가타에선 부인을 여럿 두는 것을 고귀한 왕족의 특권으로 여겼다.

특히, 모든 여인을 사랑스럽다 말하는 로샨은 그 특권을 착실히 누리고 다녔다.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하는 너무 심하십니다. 그러다 언젠가는 분명 여인 때문에 후회할 날이 오실 거라니까요.”

다소 버릇없는 말이었으나 로샨은 호탕하게 웃고 말았다.

“내게 아주 저주를 퍼붓는구나.”

“저주라니요. 걱정돼서 하는 말입니다! 제가 온종일 전하 생각만 한다는 걸 아십……. 또 왜 그러십니까?”

알레이가 한창 잔소리를 늘어놓는 찰나, 로샨의 관심은 이미 다른 쪽에 쏠려 있었다. 그는 저 멀리 지나가는 누군가를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끝내 멍하니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작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내가 헛것을 보았나.”

알레이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하아……. 전하, 아무래도 좀 쉬셔야겠습니다. 며칠간 너무 무리하셨습니다.”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어서 처소로 가십시오. 어서요.”

“하여튼 그래서 내가 궁금한 것이 무엇이냐면…….”

“예에──.”

알레이는 대충 대꾸하며 로샨을 침실로 이끌었다.

* * *

방 안에 흐르는 정적이 편안하고 나른할 때도 있었지만, 때때로 지금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조차 어색할 때가 있었다.

상념을 지우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무심코 그날의 기억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앞으로는 저한테 이렇게 이유 없이 잘해 주지 마세요.”

“자꾸 그렇게 잘해 주시면 착각해요.”

“공작님께서…… 절 좋아하신다고요.”

며칠이 지나도 흐릿해지긴커녕 갈수록 선명해지는 기억은 떠오를 때마다 심장을 격동시켰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곱씹을수록 덩달아 후회도 짙어졌다.

벨라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물며 화분에 물을 주었다. 답답한 마음에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가 그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그녀는 아까부터 몰래 벨리아르를 흘긋거리고 있었다.

그는 무감한 낯빛으로 셔츠의 커프스를 채우고 있었다. 창으로 스미는 쨍한 햇살에도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짙붉었다.

어차피 모든 감각이 그에게로 쏠려 있었기에 화분에 물을 주는 행위는 그저 핑곗거리에 불과했다. 며칠간 이어진 이 어색한 공기를 풀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그의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애꿎은 꽃잎을 건드리다 버릇처럼 그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자신을 향하고 있던 붉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순간 숨이 멎었다.

“왜.”

까슬한 목소리에 모든 감각이 조여들었다. 벨라는 애써 손끝에 힘을 주며 적당한 말을 골랐다.

“……화분을 하나만 놔둘까 해서요. 나머지는 화원에 옮겨 두고 싶어요.”

“그렇게 해.”

“따로 사용인들 안 부르셔도 돼요. 제가 옮겨 놓을게요.”

당연히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는 의외로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튼 데 옮겨 놓지 말고 동쪽 화원에 둬. 손님이 머무는 중이니까 되도록 서쪽으론 가지 말고.”

“……네.”

그 대답을 끝으로 또다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는 단정한 손길로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들어 올렸다. 짙붉은 향이 번졌다.

“이리 와.”

낮은 부름에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어쩌면 자신은 내심 그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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