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보고할 거 있잖아. 말해.”
먼저 감정을 정리하고 냉정을 되찾은 벨리아르가 담담히 지시했다. 에릭은 곧바로 모든 생각을 지워 내고 그 자리에 제가 해야 할 일을 채워 넣었다.
“모르가타 왕자에게서 서신이 왔습니다. 수도에 일주일 정도 머무를 예정이고, 다음 주엔 베른에 방문해 역시 일주일쯤 머무르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습니다.”
“귀찮게 무슨 일주일이나. 닷새 정도로 줄여.”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다른 건.”
“없습니다. 급한 일들은 모두 처리하셔서 당분간은 한가할 듯싶습니다. 그동안 아가씨와…… 죄송합니다.”
버릇처럼 무심코 벨라의 이야기가 튀어나온 바람에 에릭은 곧바로 말을 갈무리했다.
다행히 그는 별다른 반응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로 흩어진 유리 파편을 줍기 시작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넌 가서 벨라 상태나 좀 살피고 와. 신나게 눈 맞고 처 돌아다니더니 감기가 든 모양이던데.”
“……예.”
에릭은 뒤늦게 아까 휘몰아쳤던 제 감정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말 그대로 당황이었다.
은연중에 이런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자신이 무감한 성격이라지만 제 주인만큼은 아니라고. 아무리 힘겹더라도 벨라가 살길 바랐다. 해서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고 싶었고, 위협에서 지켜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로지 그뿐이었다. 그저 정이 들었을 뿐이지, 그 마음이 결코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래서 제 주인의 마음이 이만큼이나 앞서갔는지 차마 눈치채지 못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어떠한 순간이든 망설이지 않던 그가, 다른 이의 마음이 다칠까 망설이기 시작한 것이.
* * *
여태 내쉰 숨을 모으면 커다란 구름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그래서야 땅이 꺼지겠는가.”
힘없이 돌아본 곳엔 지휘관 복장을 한 로드릭이 있었다. 이안은 곧장 몸을 일으키곤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딱딱히 굳은 인사에 로드릭은 편안히 웃으며 다가와 이안의 어깨를 다독였다.
“새삼스럽게 굴 필요 없네. 나도 이곳에서는 나름대로 자네가 제일 편하니까.”
그제야 이안의 입가에 미약한 미소가 스몄다. 로드릭은 스스럼없이 이안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안 역시 같은 방향을 보고 앉으며 또 한 번 깊은숨을 내쉬었다.
시야에 비치는 건 드넓은 연갈색 잔디밭뿐이었지만, 그마저도 이 생기 없는 성에서는 넘칠 만큼 푸릇하고 찬란했다.
“훈련이 힘들어서 그러고 있던 건 아닐 테고.”
“왜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고작 그런 걸로 힘들어하고 있는 거라면, 내가 좀 실망스러울 것 같거든.”
이안은 자조적인 웃음을 내비치며 고개를 떨궜다. 차라리 로드릭의 말처럼 그런 단순한 이유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헤버튼의 여름이 따스했던 만큼, 베른의 겨울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저를 너무 크게 보셨습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자신감이 떨어진 겐가.”
로드릭은 지난날 수도에서 보았던 이안의 모습을 떠올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의지로 활활 타오르던 눈동자가 지금은 빛이 죽어 영 힘이 없었다.
자연스레 이안이 할 만한 고민을 떠올리던 로드릭은 순간 스쳐 지나가는 걱정에 헛숨을 들이켰다.
“설마…… 벌써 각하께 칼이라도 들이밀었나? 아니지, 그럼 살아 있을 리가 없는데.”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기겁할 만한 내용이었음에도 이안은 담담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로드릭이라면 충분히 알 만한 일이었다. 이안의 가정이 어떻게 망가졌는지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뭐, 이 정도도 유추하지 못하면 이 험한 바닥에서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나.”
“다행히 아직 칼을 뽑진 않았습니다. 그저…… 요즘 제가 얼마나 무력하고 무모했는지 절실히 깨닫는 중일 뿐입니다.”
“음, 조금 더 유추해 보자면……. 각하의 실력을 모르고 있다가 이곳에 와서야 깨닫고 벽을 느꼈다는 건 말이 안 되고, 그럼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면 로드릭은 당연히 벨라를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전에 제가 수도에서 그녀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으니까.
로드릭은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눈앞의 풍경으로 눈길을 던졌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지만, 이안은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벨라 아가씨 말입니다.”
그저 형식적인 호칭일 뿐인데도 입안이 썼다. 딱딱한 호칭만큼이나 그녀와의 거리가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사실…… 제가 그 아가씨께 마음을 품었습니다.”
여태껏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속마음을 상관 앞에서 고백하게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이 우스워 이안은 짧게 웃음을 내비쳤다. 수년간 꼭꼭 숨겨 두었던 마음을 내보이니 조금 속이 시원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태평하게 웃는 건 이안뿐이었다. 로드릭은 마치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 잔뜩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내가 지금 똑바로 들은 것이 맞나? 아니, 언제부터…….”
“예전에 아가씨께서 제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다고 말씀드렸죠. 그때부터였습니다.”
남들에게 벨라의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 없으니 적당히 지어낸 말이지만,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게 헤버튼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고향이라서가 아니라 오로지 벨라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녀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너무 특별하고 소중해서.
“그럼 굳이 이 기사단에 들어온 것도…… 설마, 그 아가씨 때문인가?”
“반은 그러합니다.”
“……확실히 무모했군.”
“잘 지내고 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가까이서요. 가능하면 지켜 주고 싶었고…….”
“……아아, 자네가 왜 지금 이토록 심란해하고 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네. 그런 마음으로 입단했는데, 생각보다 그 아가씨께 다가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들어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실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던 문제였다. 왜 이렇게 속이 답답하고 끝없는 무력감만 느껴지는 건지. 로드릭의 말에 이제야 그 정답을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맞습니다.”
“확실히, 조금 어려운 문제군…….”
“잘 지내고 있는 건지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그건……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이안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렀다. 밖에 나가자고 하니 곤란한 듯 머뭇거리던 벨라의 모습이 머릿속에 낙인처럼 찍혀 타올랐다.
벨라를 위한다고 왔지만, 정작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공작가에 속한 기사로서 해야 할 일만 주어졌을 뿐이다.
“벨라 아가씨를 뵈면 시간과 장소를 기억해 놨다가 일과가 끝나면 내게 보고하도록 해. 요즘은 아가씨께서 방 밖으로 나오는 시간이 잦으셔서 자주 마주칠 수도 있으니, 이왕이면 따로 기록해 놓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아무래도 제일 좋은 방법은…… 그 아가씨와 접점을 만들지 않는 거다.”
“아, 그리고 혹시 아가씨가 성문 가까이 다가가시거나 그 주위를 맴돌고 계시면 그땐 언제든 바로 보고해. 만일 위험한 일이 생겼다 싶으면 곧바로 행동하고.”
아직 수습 기간도 끝나지 않은 시기에 기사로서 가장 처음 하달받은 명령이었다.
그간 누군가 자신에게 왜 기사가 되고 싶냐고 물을 때면 아버지의 모습이 멋있어서 기사가 되고 싶다고 답했다. 하지만 기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한 순간은 따로 있었다. 기사들을 피해 숲으로 숨어들어, 홀로 숨죽여 울던 벨라를 본 날이었다.
“이안, 언젠가 네가 기사가 되면…… 날 잡으러 올 수도 있겠다.”
“……벨라, 그럴 일은 절대 없어. 난…….”
“알아. 네가 그럴 리 없다는 거. 농담으로 해 본 소리야. 그러니까, 그런 얼굴 할 필요 없어.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나는…… 절대 그런 기사는 되지 않을 거야.”
“당연하지. 넌 정말 훌륭하고 멋진 기사가 될 거야. 내가 장담해.”
제 마음을 덜어 주고자 도리어 말갛게 웃던 그 모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았다.
그때, 너를 지켜 주고 싶어서 기사가 되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어야 했다. 더 이상 기사들에게 쫓기지 않게 해 줄 것이라고.
나중에 정식으로 기사가 되면 말하려고 아껴 두었던 건데, 결국은 다른 기사들과 다를 것 없는 꼴이 되어 버렸다.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검을 쥘 때마다 자괴감이 들어, 마치 날카롭게 벼린 칼날을 쥐는 듯했다.
“경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가씨께서 성 밖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다는 사실을요. ……사실상 성내의 모든 눈이 아가씨를 감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엔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가씨의 말을 조금 더 믿어 보는 건 어떻겠나.”
“……제가 아는 아가씨는 거짓말을 자주 하지만, 잘하지는 못합니다. 늘 괜찮다고 했어요, 늘……. 괜찮지 않다는 걸 뻔히 아는데, 이번에도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줘야 합니까?”
답답함에 울컥 목이 메었다. 분명 벨라가 전과 달리 좋은 환경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그 가녀린 발목에 매여 있을 족쇄가 무겁게 마음을 짓눌렀다.
대체 벨라는 왜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는지 화가 나고, 자신이 그 온전한 행복을 줄 수 없다는 사실에 미치도록 화가 났다. 그리고 그 분노의 화살은 늘 같은 곳을 향해 날아갔다.
“저는…… 도저히 벨리아르 공작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로드릭은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별다른 위안이나 조언 대신, 이안의 어깨를 두어 번 다독였다.
“나는 자네가 더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라 믿네.”
그가 생각하는 현명한 선택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안은 문득 공작에게 복수할 방법을 떠올렸다.
제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 갔으니, 그 역시 똑같은 아픔을 겪어야 마땅했다.
악마에게도 소중한 것이 하나쯤은 있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