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흩어진 숨의 조각들이 날아와 혀로 박혀 들었지만, 벨라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그 친구가 우연히 이 기사단에 들어왔어요. 예전부터 기사가 꿈이라고 했는데…… 정말 기사가 됐더라고요.”
“우연히.”
그가 곱씹은 말이 나긋한 잔상을 남겼다.
“……네, 우연히.”
버릇처럼 제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이 평소보다 무겁고 느렸다. 그의 잔혹한 성정을 오롯이 기억하는 가녀린 몸이 바짝 긴장하며 움츠러들었다.
당장이라도 커다란 손이 제 목을 틀어쥐어 바닥으로 처박을 것만 같았다.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압박감이 느껴진 탓에, 벨라는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어 사뭇 떨리는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러자 그가 기가 찬다는 듯 희미하게 실소했다.
이때 멈춰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가끔 제 속에 치기와 반발심으로 꽁꽁 뭉쳐 있는 것이 무의식중에 튀어나오곤 했다.
지워 내야 마땅했으나 어제의 일은 꽤 서운하고 원망스러웠다. 인형답지 못한 감정이었다.
“처음에 마주쳤을 땐 얘기를 잘 못 나눴거든요. 별다른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 그냥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어제──.”
“벨라.”
그가 서늘하게 말을 잘랐다. 우습게도 숨을 곳이 그의 품뿐이라, 벨라는 파묻은 고개에 힘을 주었다.
늘 그렇듯이 그는 너무나도 쉽게 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젠 저항할 수 없던 건지, 아니면 저항하지 않은 건지 헷갈렸다.
이번에야말로 그가 제 숨을 틀어막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나 신경을 긁어 댔는데 이 정도면 그의 성정에 많이 참아 주었다고.
하여 마땅히 턱을 쥔 손이 내려올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내려왔다.
부드럽고 달뜬 입술이 천천히 맞물렸다. 평소처럼 거칠게 밀고 들어와 안을 헤집어 놓는 것도 아니고, 그저 탐미하듯 머무르며 메마른 입술을 적실 뿐이었다. 그의 입술이 멀어지자 지독한 갈증이 밀려왔다.
“많이 아파?”
“……왜요?”
“안고 싶어서.”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언제부터 벌어져 있었는지 모를 입술의 틈이 서서히 넓어졌다. 벨라는 붉게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를 멍하니 마주했다. 그 안에 든 것은 명백한 분노, 그리고 욕망이었다.
“……공작님, 지금 낮이에요. 엄밀히 말하면 아침에 가깝고…….”
“그게 왜.”
그가 까슬하게 물었고, 또다시 말문이 막혀 버렸다. 겨우 낮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그를 거부할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은 그를 거부할 수 없는데 굳이 의사를 묻는 것이 너무 낯설었다. 단순히 제 반응을 살피고 즐거워하기 위한 짓궂은 장난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요령 안 피우는 건 좋은데, 피하고 싶었으면 그딴 되지도 않는 핑계 말고 다른 걸 떠올렸어야지. 이젠 내 말이 말 같지도 않아?”
아, 그제야 처음에 그가 했던 물음이 떠올랐다.
“……저 아픈 것 같아요. 아파요. 열도 나고…… 아무래도 감기인가 봐요. 공작님께 옮기면 어떡해요.”
그 말에 그는 또 한 번 실소했다.
“거짓말까지 하니까 더 괘씸하네.”
“거짓말은 아닌데…….”
그를 거부하고 앓아누울 만큼 아픈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열이 있는 건 사실이라 온몸이 축축 늘어지긴 했다. 이 상태로 그를 상대했다간 또 정신을 잃은 채 하루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고작 하루가 아닐지도 모르고.
“마지막으로 물을 거니까 잘 대답해. 진짜 아파, 아니면 조금 거슬리는 정도야. 웬만해선 참을 만했으면 좋겠는데.”
그 물음은 마치 정말 아프다고 하면 건드리지 않겠다는 뜻처럼 들렸다.
“정말 아프다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눈을 똑바로 보며 되묻자 그의 손가락이 눈두덩이를 뭉근히 쓸어내렸다. 벨라는 그 손길을 따라 얌전히 시선을 내렸다.
“내가 질문했으면 넌 대답을 해야지.”
“……진짜 아파요. 열이 나니까 머리가 너무 무겁고 아파서, 그냥 누워 있고 싶어요.”
“어차피 그냥 누워 있기만 하면 되는데. 아니면, 이번엔 네가 올라와서 움직이기라도 할 생각이었어?”
애석하게도 이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쓸데없는 상상이 스쳐 가며 온몸의 열이 얼굴 쪽으로 확 쏠렸다. 그가 낮게 웃으며 발갛게 익은 벨라의 귀를 살짝 깨물었다.
“아…….”
그는 작은 자극에도 달팽이처럼 움츠러드는 벨라를 다시 끌어안으며 목 아래로 팔을 받쳐 주었다.
천천히 등을 쓸어내리며 다독여 주는 손길에 다시 감정이 엉클어졌다. 힐끗 올려다본 그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규칙적인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가 제 뒷머리를 꾹 누르며 시야를 가렸다.
“더 자.”
문득, 서러움이 밀려왔다. 다정한 목소리에, 다정한 손길에 감정이 북받치고 움츠려 있던 원망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었다.
그가 다정하게 대해 줄수록 제 처지가 서러워지고 마음이 서러워졌다. 참으로 분에 넘치는 응석이었다.
벨라는 평소 제가 쓰는 것들을 떠올렸다. 스푼이나 포크, 찻잔 같은 것들 말이다.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한 번도 그런 것에 감정을 둔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지금 제 버릇없는 행동들을 눈감아 주고 도리어 다정히 대해 주는 것은 정말 이상하고 평소답지 않은 일이다.
이러니까 정말……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주기라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면, 또 저도 모르는 새에 그에게 이용당한 것일지도 모르지.
이용한 대가로 지금 이런 다정함을 건네주는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또 서러운 일이었다. 이런 대가는 원치 않았고, 더 이상 그에게 휘둘리고 싶지도 않았다.
벨라는 살며시 그를 밀어냈다. 그러나 단단한 몸을 밀어내기엔 턱도 없는 힘이라 그를 자극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두 손목을 한 손에 그러쥐었다.
“자꾸 꼼지락대지 말고 가만히 있어.”
“……싫어요.”
자아를 벗어난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곧장 후회했지만 불어난 원망이 그 후회마저 덮쳐 버렸다.
그가 조소하며 되물었다.
“싫어?”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이라기보단 제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확인하는 어투였다.
정말 아프긴 한 건지, 그의 말을 제쳐 두고 사고가 이상한 곳으로 튀었다.
그의 너른 품에 안겨 있는 것이 서럽고, 다정히 등을 쓸어 주는 것도 서럽고, 아프다고 하니 성질을 억누르는 그의 태도도 서러웠다.
“……왜 절 그냥 두세요? 공작님, 화나셨잖아요.”
“아예 눈치가 없진 않네.”
“그럼 화를 내시지, 왜…….”
“화를 내면, 감당할 수 있긴 하고? 괜히 기어오르지 말고 그냥 얌전히 있어.”
“그런 거…… 신경 안 쓰셨잖아요. 아니면, 제가 공작님께 무언가 이득이 될 만한 일을 했나요? 제가 무슨 쓰임이 있었는지…… 저번처럼 알려 주시면 좋겠어요.”
“벨라.”
그가 짓누르듯 이름을 불렀지만, 한 번 통제를 벗어난 입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그게 아니라면…… 앞으로는 저한테 이렇게 이유 없이 잘해 주지 마세요.”
“뭐?”
“그렇게 다정하게 웃고, 다정하게 안아 주지 말라고요. 공작님에겐 순간의 변덕일 뿐이겠지만…… 저는 그게 불편해요. 제가 한 만큼의 보상만 받고 싶어요.”
자신을 예뻐하는 것이 그저 그의 유흥일 뿐이라는 것을 알지만, 지금은 그 사실이 싫었다. 도저히 풀 수 없을 만큼 속이 단단히 엉켜 버렸다.
“대체 지금 이러는 이유가 뭔지 짐작조차 안 되는데. 원래 조금만 예뻐해 주면 그렇게 버릇이 없어져?”
“……저는 공작님 말씀대로 평생을 숲에서 굴러먹다 와서, 배운 게 없어서…… 자꾸 그렇게 잘해 주시면 착각해요.”
“무슨 착각.”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내달리던 생각들이 순간 멎었다. 답을 떠올리자마자 입이 다물어졌다. 아무리 멋대로 내뱉었다 한들, 그 와중에도 차마 꺼낼 수 없는 말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그를 할퀴고 싶었다. 생채기를 내고, 그 옅은 상처가 오랫동안 남아 쓰라리길 바랐다. 그렇게 제 마음도 아팠다고, 그가 조금이라도 눈치채 주길 바랐다.
벨라는 아릿한 통증에 눈물이 번질 만큼 아랫입술을 꽉 짓씹었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말인 동시에 정말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공작님께서…… 절 좋아하신다고요.”
“그러니까, 너는…….”
그가 얼마나 치밀어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 담고 있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저를 집어삼킬 듯 노려보던 그가 이내 나지막이 험한 말을 뇌까리며 몸을 일으켰다.
무자비한 손이 곧장 저를 내려칠 것 같아 벨라는 눈을 질끈 감으며 시트 자락을 꽉 말아쥐었다. 그 와중에도 손안에 들어차는 그의 온기가 선연했다.
하지만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 살며시 눈을 떴을 무렵, 흐릿한 시야로 거세게 닫힌 문이 요동쳤다.
* * *
에릭은 그가 자신을 침실이 아닌 집무실로 불렀을 때부터 불길한 상황을 예감했다. 참다못해 어제 벨라를 그렇게 불러들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또 한 번 집무실이 난장판이 된 꼴을 마주할 줄은 몰랐지.
그래도 나름 두 번째 겪는 일이라고 처음만큼 당황스럽진 않았다. 에릭은 능숙하게 표정을 지우고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주인님, 저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말 돌리지 말고 본론만 똑바로 말해.”
“그 기사를 왜 두고 보고만 계신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게 한마디만 하시면 말이 생기지 않게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여태 그랬던 것처럼 걸리적대는 것 따위는 치우면 그만이었다. 아무리 손안에 들여놨다곤 하지만, 정말 두고 보기만 하는 건 절대 제 주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가만히 에릭의 이야기를 듣던 벨리아르가 나직이 조소를 흘렸다.
“내가 그깟 놈을 왜 신경 써.”
“그럼 오로지 아가씨 때문입니까?”
다소 날카로운 질문이었으나 벨리아르는 에릭을 질책하지 않았다. 그만큼 다른 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로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벨라로 가득 차 있었다.
“치치가 죽었을 때, 벨라가 어땠는지 기억해?”
갑작스러운 물음에 에릭은 답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애초에 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는지 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몇 날 며칠을 울고 밥도 안 먹고, 쓸데없이 정이 많아서 고작 한두 달 본 치치가 죽어도 그렇게 마음 아파했는데.”
손을 꽉 말아쥐자 쥐고 있던 펜이 맥없이 부러졌다. 그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제 친구가 죽으면 또 어떨까.”
에릭은 잠시 머릿속이 멎었다. 지금 느껴지는 감정을 무엇이라 정의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