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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10)화 (110/180)

110화

“벨라, 전에 소문을 들었는데…… 베른에서 악행을 저지르던 마녀 때문에 네가 오해받았었다며. 지금은 괜찮은 거야?”

“응, 그 여자는 잡혔으니까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럼 밖에 돌아다녀도 괜찮은 거야?”

벨라는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조금 자유로워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유롭게 밖에 나갈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안에게 굳이 그런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응, 그렇지.”

“그럼 내일 나랑 나가지 않을래? 난 베른이 처음이니까, 벨라 네가 구경시켜 주면 좋을 것 같아. 나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하자.”

빠르게 말하는 이안의 목소리엔 설렘과 기대가 잔뜩 묻어 있었다. 벨라 역시 흔쾌히 그러자고 답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자신을 내보내 줄 것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안과 나가겠다고 하면……. 순간 그의 서늘한 눈빛이 떠오르며 살갗이 오그라들었다.

“……미안, 나 요즘은 좀 바빠서 나가진 못할 것 같아. 정말 미안해.”

“……아, 음. 그렇구나.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네, 미안. 나중에 시간 날 때 가면 되지. 그러니까 그렇게 미안해 죽겠다는 얼굴 할 필요 없어.”

이안은 조금 당황한 듯했고, 벨라는 씁쓸한 마음을 말간 미소로 덮었다.

“고마워.”

“고마울 것도 참 많다. 우리 사이에 새삼스럽게.”

자신이 그의 허락 없이는 이 성을 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 이안은 무슨 표정을 지을까. 아마, 자신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마음 아파하겠지.

불 보듯 뻔하기에 제 발에 묶인 족쇄만큼은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다. 그래야 자신이 이곳에서 그저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고 있다고 믿을 테고, 그럼 나중에라도 그가 마음 편히 이곳을 떠날 수 있을 테니까.

“우리 나중에 꼭──.”

나중에 꼭 같이 나가자는 말을 하려는 순간, 예배당 문이 벌컥 열렸다. 다행히 그는 아니었지만, 에릭이라고 해서 아주 다행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의 눈이나 다름없으니까.

“에, 에릭 경.”

놀란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지만, 황급히 당황을 감추고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에릭은 이안을 한 번 쳐다보곤 곧바로 벨라를 향해 다가왔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아……. 갑자기 들어오셔서요. 그래서 놀란 것뿐이에요.”

에릭이 들어오니 바깥의 한기가 훅 몰아쳤다. 이안과의 만남이 반가워 추위도 잊고 있다가 갑자기 맴도는 찬기에 팔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차림새를 훑어내린 에릭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두툼한 겉옷을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미리 벨라의 옷을 들고나온 것을 보니, 애초에 에릭의 목적은 그녀를 찾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입고 나오면 안 추우십니까? 여긴 난로도 없잖습니까.”

“괜찮아요.”

괜찮다고 답하는 그녀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추워서라기보단 자신 때문에 놀라서 그런 것이겠지만, 에릭은 짧게 혀를 찼다.

“전혀 안 괜찮아 보입니다. 이제 그만 방으로 돌아가세요.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시면 제가 곤란해집니다.”

일부러 이안과의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 몸을 틀도록 만드는 에릭에게서 은근한 압박이 느껴졌다. 혹여 이안에게도 그런 분위기가 전해질까 불안했다.

벨라가 살짝 눈치를 살피자, 이안은 편안하게 웃으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들어가 보십시오.”

꼭 이렇게 끌고 가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여태껏 웬만하면 순응해 왔지만, 오늘은 에릭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충분히 다른 방법으로 불러내도 됐을 텐데.

“아가씨.”

“……알았어요.”

에릭이 한 번 더 나직이 부르는 목소리에 벨라는 겨우 걸음을 뗐다. 예배당을 나가기 전, 에릭은 이안에게 한 번 눈길을 주었다.

베른의 겨울은 생각보다 춥고, 또 생각보다 길다. 이젠 시도 때도 없이 내리기 시작한 눈송이가 소복이 땅에 쌓였다. 푹 내쉰 숨결 사이로 눈송이가 흩어지는 듯했다.

“에릭 경.”

“예.”

조용히 방으로 향하던 그녀가 끝내 입을 열어 한숨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착실히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던 그를 향해 벨라가 휙 돌아섰다.

“저 기사랑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냥 우연히 예배당에서 마주친 것뿐이에요. 그래서 이야기 좀 나눈 거고…….”

“설마, 저더러 믿으라고 하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그냥 친구일 뿐이에요. 단순히 친구요. 그다지 특별한 사이도 아니에요.”

벨라는 애꿎은 눈밭을 노려보며 작게 스미는 죄책감을 묻었다. 그 무엇보다 특별한 친구를 그리 말하려니 입안이 썼다. 에릭이 바람 빠지듯 작게 웃었다.

“그 친구가 들었으면 제법 서운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건드릴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

“그럼 제가 할 일은 그렇게 주인님께 보고드리는 것뿐이겠네요. 확인해 본 결과, 특별한 사이도 아니니 굳이 건드릴 필요 없다고요.”

말에 은근히 돋아난 가시 때문에 조금 따가웠다. 벨라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에릭을 마주 봤다. 겨울의 눈발을 혼자 다 맞은 건지 표정이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에릭 경, 혹시 기분 상하셨어요?”

“아니요, 제가 왜요.”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에릭은 분명 그의 지시로 자신을 찾으러 왔을 테고, 둘의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 기분이 상한 건 자신이었다.

“저는…… 왜 공작님께서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싫어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에릭 경께서 지금 왜 화내고 계시는지도요.”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걱정돼서 그러는 겁니다. 주인님이 걱정되고, 아가씨가 걱정돼서요.”

“둘 다 왜 걱정이 되는지 이해가 안 가면…… 제가 이상한 건가요?”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 걱정이 합당하다는 것만은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안의 존재를 숨기려는 제 노력이 다 부질없는 것은 아닐까. 사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에릭은 중간에서 그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고…….

조금 어리석은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이 성안에 그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애초에 이안의 존재를 숨긴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에릭 경께선 저 기사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죠?”

“당연히 알죠. 제가 뽑았는데요. 저도 알고, 주인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그럼 이안이 제 친구라는 것도요?”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계셨다는 게 더 놀라운데요.”

역시나. 벨라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안이 무사하길 바란다면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고 있었지만, 제게도 감정이 있었다. 오로지 그가 전부였으면 좋겠건만, 같잖게 제게도 소중한 것들이 있었다.

“……공작님은 정말 못된 분이세요.”

에릭은 잠시 침묵했다.

“가시죠.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눈발 위로 새겨지는 벨라의 발자국을 보며 생각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아래 뭉그러지는 새하얀 눈송이들이, 꼭 벨라의 모습 같다고.

* * *

거의 잠을 자지 않던 그가 어젯밤엔 벨라를 안고서 함께 잠들었다.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다곤 했지만, 요즘 들어 그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먼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건 벨라였다. 그녀는 제 이마에 가볍게 닿아 있는 그의 입술을 자각하자마자 가만히 숨을 죽였다. 한동안 꼼짝하지 않고 이리저리 눈만 굴려 댔다. 결국, 답답함이 한계에 달해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공작님.”

목소리가 너무 작았는지 전혀 미동이 없었다. 온몸이 뻐근한 듯해 살짝 움직였더니 큼지막한 손이 곧바로 뒷머리를 꾹 눌렀다.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는 모양새가 되니 그늘이 지며 스며들던 햇빛이 가려졌다.

억누르고 있던 숨을 깊게 내쉬니 더운 숨결이 코앞에서 흩어졌다. 그제야 제 몸이 평소보다 뜨겁게 달아올라 있음을 깨달았다. 숨을 쉬려니 갑갑해서 얼른 그가 깨어나 저를 놓아주었으면 했다.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귓바퀴에서 맴돌았다.

“공작님, 해가 벌써 중천에 떴어요.”

사실 해가 어디쯤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왠지 그를 깨우려면 이런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다시금 저를 당겨 안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평소보다 갈라진 목소리였다.

“알아. 아니까, 그만 쫑알거려.”

“……네.”

다시 고요한 숨소리가 틈을 메웠다. 언젠가부터 제 머리를 살살 쓰다듬던 손이 자연스레 목덜미로 내려와 감쌌다. 평소보다 그의 손이 차게 느껴져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다. 그제야 드러난 붉은 눈동자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너, 왜 이렇게 뜨거워.”

“잘 모르겠어요. 열이 조금 있나 봐요.”

“그럼 오늘은 얌전히 방에서 쉬어야겠네.”

“공작님은 오늘 안 나가세요?”

별다른 뜻이 담긴 물음은 아니었다. 늘 해만 뜨면 에릭의 보고를 받은 뒤 밖으로 나서던 그가 오늘은 이리 침대에서 뭉그적거리고 있는 것이 낯설어서 물은 것뿐이었다.

비스듬히 휘어 올라간 그의 입술 새로 희미한 웃음이 샜다.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왜, 내가 나가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계속 나가시다가 오늘은 안 나가시니까 궁금해서 여쭤봤어요.”

사실, 어제 에릭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그의 태도는 어딘가 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예배당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 안에 꿀통이라도 숨겨 놨나. 아니면, 어디 마음에 드는 기사라도 생겼을까.”

느릿하고 다정하게 물었지만 어째 대놓고 화를 낼 때보다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안 그래도 열이 올라 머릿속이 엉망이었는데, 그의 조곤조곤한 말투가 어설픈 생각마저 모조리 흩어 놓았다. 그리고 이럴 땐 가끔 충동적으로 입이 움직이곤 했다.

“……공작님, 이안 아시죠? 예전에 제가 편지를 보내려 했던 친구요.”

나직이 흘러나온 그의 숨소리가 사뭇 흐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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