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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09)화 (109/180)

109화

“모르가타의 왕자가 며칠간 수도에 머문다고 합니다. 최종 목적지는 소만이라, 베른에도 들러 주인님을 뵙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습니다.”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 짧은 시간을 쪼개 에릭이 보고를 올렸다. 귀찮다는 듯 흘려들은 표정이었지만 벨리아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라고 해. 그럼 베른에 도착하는 건 언제쯤이지?”

“일정은 아직 확실치 않지만, 상황을 고려해 보면 아마 한 달 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모르가타는 제국의 서쪽에 있는 폐쇄적인 나라였다. 자원이 풍부해서인지 다른 나라와의 교류에 적극적이지 않았기에 이번 소식은 제법 놀라운 일이었다.

“방문 목적은 단순히 친목 교류라고 합니다. 주인님께도 만남 의사를 보인 것을 보면…… 그리 둔한 인물은 아닌가 봅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권세가 드높긴 하다지만 벨리아르 공작가는 그저 하나의 귀족 가문일 뿐이었다. 거쳐 가는 길이라고 해서 꼭 만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굳이 베른에 들른다는 것은, 모르가타에서 제국의 정세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현재 모르가타의 정황이 어떻지?”

“별다른 사건 없이 평탄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나마 요즘 떠오르는 화젯거리라면…… 첫째 왕자의 부인들 이야기로 떠들썩한 편입니다.”

“모르가타의 왕족들은 일부다처제인 걸로 알고 있는데, 부인들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부인이 총 다섯인데, 첫째 부인을 제외하면 모두 외국인이라고 합니다. 소만에서도 부인을 맞았으니, 제국을 제외하면 주위 나라에서 한 명씩은 데려온 셈입니다.”

“그 왕자의 친목 교류 방법은 결혼인가 보군.”

“우습게도 그런 정치적인 목적의 정략결혼이 아니라, 모두 연애 결혼이었답니다.”

“뭐?”

“한 번씩 다른 나라에 들를 때마다 사랑에 빠지는 모양이던데요. 첫째 부인도 평민이라 당시 현왕의 반대가 심했답니다. 그래서 그런지 부인들과의 사랑은 아주 넘치는데, 부인들끼리의 사이는 상당히 살벌한 모양입니다.”

모르가타의 첫째 왕자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은 확실했다. 어이없는 이야기에 벨리아르는 헛웃음을 내비치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미친놈이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나뿐이던 황녀가 폐위되고 없으니 제국의 황실과 결혼으로 교류가 맺어질 일은 없겠네요.”

“시기 맞춰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해.”

“예, 정확한 일정이 잡히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릭의 대답을 끝으로 벨리아르는 모르가타 왕자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렇게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그 뒤로도 짧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연무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 들르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기사들을 한 번씩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남는 시간에 쉬듯이 하는 일이라 그다지 흥미로운 것도 없었다.

그 순간 방에서 얌전히 자신이 골라 준 책을 읽고 있을 벨라가 떠올랐고, 그냥 이대로 방향을 돌려 침실로 향할까 생각했다. 이유 없이 짜증이 나던 참에 그 작은 몸이 안겨드는 상상을 하니 절로 마음이 동하고 몸이 동했다.

아무래도 그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멈춘 무렵, 반대편에서 마주쳐 오는 누군가가 그의 눈에 띄었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또 뒤틀린 성미가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각하.”

고개를 숙이며 제법 그럴듯하게 인사를 전하곤 있으나 목소리에선 아주 미세한 떨림이 번졌다. 핏빛 눈동자가 천천히 이안의 전신을 훑었다. 그림으로 얼굴을 확인하긴 했지만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이안 역시 멀리서 보자마자 단박에 그가 이 성의 주인임을 알아차렸다. 강압적인 눈빛에 눌려 자연스럽게 지나갈 기회를 잃었다. 무거운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건 이안이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섬기는 주군을 바라보는 눈빛이라기엔 조금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안은 이를 꽉 물었다. 공작가의 기사가 되었으니 그를 섬기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직접 말로 들으니 자존심이 상하고 울분이 치미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 모든 것을 잃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데. 바로 제 눈앞에 있는 벨리아르 공작이었다. 손목이 잘려 돌아온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그 뒤로 제 소중한 것들이 어떻게 망가졌는지도.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래?”

“예.”

“정말 다른 뜻이 없어?”

“……예.”

벨리아르의 눈빛이 꽉 말아 쥔 이안의 주먹으로 향했다. 역시, 아직 새파란 애새끼였다. 저렇게 감정을 숨기는 데 어설퍼서야. 그가 대놓고 조소를 흘렸다.

“오랜만에 맹랑한 놈을 찾았나 싶었더니, 그냥 머저리였네.”

“제게 무슨 답을 원하시는 건지 말씀해 주십시오.”

“말해 주면, 그대로 답할 건가? 에릭, 실력 있는 기사를 뽑으랬더니 앵무새를 뽑아 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대놓고 모욕을 주니 이젠 말아 쥔 주먹의 뼈마디가 새하얗게 불거졌다. 뒤늦게 눈치채며 양손을 뒤로 숨기는 모습을 보곤 그는 또 한 번 낮게 조소했다.

“내 기사가 되길 원한 이유가 뭐지?”

“그것은…….”

“참고로 말해 두는데, 나는 무언가를 버릴 땐 숨을 붙여 두지 않아. 내 손 탔던 걸 다른 새끼가 주워 가는 게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말은 친절한 경고였다. 그러나 완전히 알아듣지는 못하는 듯하니, 그는 친절한 해석을 다시 덧붙여 주었다.

“여기서 제대로 답하지 않으면 네 목이 날아갈 거란 소리야.”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복수하기 위해서고, 두 번째는 소중한 것을 다시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 두 가지를 이루려고 내 기사가 되었다, 라……. 다른 뜻이 아주 많아 보이는데, 내 착각일까?”

“심기를 상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다음에 마주쳤을 땐 조금 더 공손한 태도를 보이길 바라지. 나는 버릇없는 개새끼도 싫어해.”

이안은 멀어져 가는 공작의 뒷모습을 조용히 노려봤다. 공작은 소문처럼 남을 짓밟고 제 발밑에 억지로 무릎 꿇리는 것에 아주 능숙해 보였다. 그가 일부러 자신을 도발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치미는 모욕감을 어찌하지 못해 한동안 숨을 골라야 했다.

벨리아르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어째 투기장에서 굴러먹던 개만도 못해 보이는데.”

“그래도 실력은 상위급이었습니다. 나이를 생각하면 발전 가능성도 아주 컸고요.”

“내 목을 노리고 갈고닦은 실력일 테니 어련할까. 아주 소중해 죽을 지경인 벨라도 지켜야 하고 말이야.”

“어느 쪽이 더 화가 나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어느 쪽이든 둘 다 찢어 죽이고 싶은 건 똑같은데.”

에릭은 후자가 확실하다고 단정했다. 벨라가 엮이지 않았다면 이런 식으로 이안을 신경 쓰지도 않았을 것이고, 애초에 기사단으로 들어온 목적을 알았을 때부터 가차 없이 죽였을 것이다.

그러다 벨리아르가 갑작스레 멈춰 섰다.

“왜 그러십니까?”

“네 말대로 지금 좀 화가 나는 것 같아서. 벨라를 봐야겠어.”

에릭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그는 방향을 틀었다. 뒤이어 단호한 지시가 내려졌다.

“기사들 상태는 네가 확인해. 그리고 오늘은 급한 일 아니면 보고하지 마. 아니, 급한 일이어도 보고하지 마.”

벨리아르는 그대로 침실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홀로 남은 에릭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벨라가 방에 얌전히 있길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 * *

매일 온갖 걱정을 떠안고 지내다 보니 어느덧 이 주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다.

그동안 벨라에겐 나름의 일상이 생겼다. 아침에 눈을 뜨면 화분에 물을 주고, 해가 잘 들도록 커튼을 열었다. 그리고 그가 지켜보는 앞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혼자가 되면 책을 챙겨 예배당으로 향했다. 그 뒤로 이안을 만나지 못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오늘도 기대 없이 책을 읽고 있을 무렵, 늘 고요하던 예배당의 문이 열렸다. 두근대는 마음을 안고 돌아본 곳엔 선하게 웃는 이안이 있었다.

“왔어? 오늘 되게 춥지.”

벨라는 헤버튼의 숲에 살 때처럼 말갛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이안은 예배당이 아니라 숲에 들어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순간 코끝으로 숲 내음이 훅 끼치는 듯했다.

“엄청 추웠는데 널 보니까 추운 것도 잊어버렸어.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있어서 다행이다.”

“여기가 책 읽기 딱 좋거든. 사람들도 안 오고.”

“계속 오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훈련량이 많아서 시간이 잘 안 났어. 혹시 나 기다렸어?”

“음, 조금? 힘들진 않았으니까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이젠 내 생각까지 읽는구나.”

“예전에도 그랬어. 너는 늘 나를 생각해 줬으니까.”

벨라는 시선을 내리다 상처투성이인 이안의 손을 발견하고선 곧바로 붙잡아 살폈다.

“너 손은 왜 이래? 다친 거야?”

이안은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온종일 고된 훈련을 하다 보니 손이 영 엉망이라 그녀에게 보여 주기 민망했다. 사실 손 말고도 곳곳에 상처와 멍이 많았지만, 대부분이 훈련하다 다친 것이었다.

“계속 훈련하다 보니까……. 원래 처음엔 다 이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벨라, 설마 누가 나 괴롭힐까 봐 그래? 내가 그런 거에 당하고만 있을 성격은 아니잖아.”

“여기선 그럴 수도 있잖아.”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인 벨라를 보며 이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기사 손에 상처 났다고 걱정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그래도 혹시 누가 괴롭히면 바로 네게 이르러 올게.”

“응, 꼭 그래야 해. 나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어.”

“든든하네.”

같이 지내는 기사들과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지휘관으로 있는 로드릭이 잘 챙겨 주기도 했고, 훈련이 생각보다 고되긴 했지만 그건 충분히 각오한 사항이었다. 문제라고 한다면…… 벨리아르 공작,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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