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벨라, 차 똑바로 내려야지.”
“……아.”
순간, 고민에 빠져 차 내리던 중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너무 많이 우려내면 쓰고 떫어진다고 했는데. 벨라는 얼른 차를 잔에 따라서 그에게 건넸다.
“어떠세요?”
벨리아르는 차를 한 모금 머금으며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벨라는 살며시 안도했다. 곧이어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태연한 감상이 전해졌다.
“가끔은 떫은 차도 나쁘지 않아.”
나쁘다는 소리였다.
“……죄송해요. 너무 많이 우렸나 봐요.”
그는 조용히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벨라가 섬세하지 못한 제 손을 탓하고 있을 무렵 하녀가 문을 두드렸고, 그가 짧게 허락했다.
하녀가 조용히 올려 두고 간 우유에서 달콤하고 고소한 향이 번졌다. 곧이어 그가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지시했다.
“책 가져와.”
벨라는 책 여러 권을 품에 안아 들고 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다른 도시와 관련된 책이 대부분이었고, 그사이 소설책과 검술에 관한 책이 끼어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책들의 제목을 가볍게 훑어내렸다. 어느 것을 골라 주든 상관없지만, 이왕이면 소설이나 검술책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별 고민 없이 낯선 도시의 책을 골라 건네주었다. 그녀의 얼굴로 짧은 실망이 스쳤다.
제 생각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자신이 골라 온 책들이 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공작님, 요즘 왜 자꾸 우유를 주세요?”
“먹기 싫어?”
“아니요, 맛있어요. 맛있는데…… 자꾸 우유를 주시는 이유가 궁금해서요.”
“잘 먹으니까 예뻐서.”
“아…….”
생각지 못한 이유라 멍청한 소리가 삐져나왔다. 예쁘다는 말에 잠시 설렘이 일었다가도 금방 푹 꺼져 버렸다. 곁에 두는 인형은 그저 예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가서 앉아.”
“그런데요, 공작님.”
“이제 그만. 앉아.”
단호하게 말을 끊어 내는 바람에 입이 꾹 다물어졌다. 어쩔 땐 아무 말이라도 해 보라고 지시하면서, 이럴 땐 또 듣기 싫다는 듯 구는 것이 조금 서운했다. 순 제멋대로였다.
“네.”
벨라는 살짝 불퉁한 얼굴을 하고서 소파에 앉아 우유가 담긴 컵을 집어 들었다. 딱 마시기 좋은 온도로 데운 우유엔 꿀이 들었는지 풍기던 향처럼 달았다. 사뭇 졸음이 밀려왔지만 벨라는 조용히 책을 펼쳤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성실히 읽는 척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가끔 그의 시선이 따가울 정도로 느껴졌으나 꿋꿋이 돌아보지 않았다.
비참해지는 마음을 애써 모른 체하는 것도 일이라, 벨라는 이 나른한 시간이 정말 싫었다.
* * *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에릭에게 말했던 대로 안 보이는 곳에 두느니 차라리 눈 닿는 곳에 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과연, 그 판단이 옳았을까.
이렇게 신경에 거슬리고 짜증이 치밀어오를 줄 알았다면, 아니, 알았어도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안 에드레이즈, 그 이름을 본 순간부터 심기가 뒤틀리고 고약한 성미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니 목을 틀어쥐고 들여다봐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들여다보고만 있는 건 또 제 성미에 맞지 않은 일임을 깨달았다.
놈을 붙잡아 예배당 안으로 끌어당기는 손은 보나 마나 벨라의 것임이 분명했다.
그는 종종 벨라의 시선이 닿는 모든 것을 없애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하지만 늘 결론은 같았다. 그건 꽤 번거로우니 차라리 벨라를 아무것도 닿지 않는 곳에 두는 것이 깔끔하다는 것.
이리 풀어 주면 저를 보며 웃어야 하는데, 엄한 데서 웃고 있으니 화가 나는 건 마땅했다.
“저놈의 예배당을 허물어 버릴까.”
벨리아르가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에릭이 흘끗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가씨가 좋아하시던데요.”
“그러니까 쓸모가 없다는 거지. 멍청하게 어딜 가서 처빌고 앉았어.”
말이 곱게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치미는 화를 상당히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에릭은 이럴 바엔 차라리 예전처럼 자신이 그녀를 데리고 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주인님, 내일부턴 다시 제가 아가씨 곁에 붙어 있겠습니다.”
“됐어. 저리 좋다고 돌아다니는데. 당분간은 그냥 놔둬.”
에릭은 벨라에게 더 이상 예배당에 가지 말라고 넌지시 귀띔이라도 해 줘야 하나 싶었다.
“로드릭은 어때.”
“조금 투덜대긴 하지만 일은 잘합니다. 기사들도 무리 없이 잘 따르고요. 아, 그리고 혹시 기회가 되면 아가씨와 대화를 좀 나눌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아무래도 전에 마녀로 몰아가 조사하러 온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나지막이 새어 나온 그의 조소가 에릭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여튼, 이 새끼나 저 새끼나.”
곧 그의 화가 터지기 직전임을 감지한 에릭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제가 알아서 잘 거절하겠습니다.”
* * *
이안은 오전 훈련을 마치고 쉬는 시간이 주어지자마자 곧장 예배당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훈련이 고됐지만, 지금은 피곤한 몸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예배당이 보임과 동시에 발밑에 떨어진 것이 시선을 끌었다. 파란 꽃잎이었다. 평소라면 그냥 밟고 지나갔을 작은 꽃잎 하나에, 당연하게도 벨라가 떠올랐다.
이안은 꽃잎을 주우며 더 주변을 살폈다. 작은 꽃잎이 길을 안내하듯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꽃 하나도 겨우 따며 미안하다고 사과했을 벨라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작은 꽃잎들을 줍다 보니 어느새 예배당 문 앞이었다. 꽃잎 여러 장을 둥글게 모아 놓으니 얼추 하나의 꽃처럼 보였다.
이안은 조용히 웃으며 문을 두드렸다. 곧이어 조심스럽게 열린 문 사이로 보라색 눈동자가 보였다.
“이안.”
벨라는 알까, 자신이 얼마나 제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는지. 지금 얼마나 날아갈 듯 기쁜지.
“보는 사람 없지? 얼른 들어와.”
손목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기꺼이 딸려 들어갔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시점에서 이미 이안의 입꼬리는 승천하고 있었다. 몸의 고단함이 폭포수에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나 오랜만에 물고기가 된 것 같아.”
깊은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벨라를 처음 만났다. 그땐 정말 숲의 요정이 실존하는 줄 알았지.
처음엔 자신을 경계하던 벨라가 나중엔 자신이 잘 찾아올 수 있도록 숲에 표시해 놓았을 때, 겉으로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얼마나 기쁘게 날뛰었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벨라는 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너, 길치잖아. 그래서 혹시 못 찾아올까 봐.”
“그래도 네가 있는 곳은 어떻게든 찾아.”
벨라는 천천히 이안의 모습을 살폈다. 고작 몇 달 못 봤을 뿐인데 전보다 키며 덩치가 커진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기사의 복장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살짝 낯설기도 했다.
“너 정말 공작가의 기사단에 입단한 거야?”
“응.”
“……네가 옛날부터 기사가 되고 싶어 했다는 건 알아. 하지만 여기는…….”
벨리아르 공작가의 기사단은 일반적인 기사단과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적어도 이안이 꿈꾸던 그런 기사단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이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충분히 각오하고 왔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바보야,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네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잖아.”
“어쨌든 기사가 됐으니까 난 만족해. 게다가 이렇게 너까지 만났잖아. 나는 네가 웃어 줬으면 좋겠어.”
안타까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지만, 이안의 부탁에 애써 털어 내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제겐 웃어 줬으면 좋겠다더니, 정작 이안의 얼굴엔 걱정이 한가득했다.
“너는, 너는 어때. 정말 괜찮은 거야?”
“정말 괜찮다니까. 너도 들었을 거 아니야. 나 되게 귀한 아가씨로 살고 있어. 진짜 신기하지.”
“……여긴, 벨리아르 공작가잖아.”
이안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뻔히 알았다. 공작에 대한 무수한 소문을 전해 준 게 그였으니까.
“응, 알고 있어.”
“공작이 네게 무슨 짓을 하진 않았어?”
“잘해 주셔. 좋은 분이야. 소문이 다는 아니라는 거…… 알잖아.”
“……모르겠어. 네가 무사하고 잘 지낸다는 걸 확인했는데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
“이안, 나 정말 잘 지내고 있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러니까…… 혹시 나 때문에 이 기사단에 들어온 거라면──.”
“벨라, 난 지금 당장이라도 네 손을 잡고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어. 맞아. 내가 이곳에 온 이유의 반이 너야.”
아니길 바랐는데. 그저 이안이 우연히 공작가의 기사단에 들어온 것이었으면 했는데. 그렇다면 잘 달래서 내보낼 수도 있을 테니까.
벨라는 정말 이안을 이곳에 두고 싶지 않았다. 이안이 저런 마음으로 이곳에 왔다는 걸 공작이 알게 된다면……. 그 뒤는 가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에도 그가 이안의 존재를 눈치챌까 봐 잠을 설쳤다. ‘이안’이라는 이름은 흔하디흔하다고, 어차피 얼굴은 모를 테니 겨우 이름 하나 같다는 이유로 일개 기사까지 조사해 보진 않을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하지만 누구보다 잘 알지 않나. 그가 얼마나 집요한지. 그 사실이 저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안.”
“나랑 같이 가자. 헤버튼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너랑 함께라면 난 어디든 좋으니까…… 나랑 가자, 벨라.”
기어코 이안은 그 말을 하고야 말았다. 더 일찍 찾아와 이런 말을 했다면 기뻐하며 그 손을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끝이 지옥인 줄도 모른 채.
“……미안해. 난 못 가.”
그가 이안을 죽일 것이다. 이안을 안 보고 살아가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저 때문에 이안이 죽는다면…… 그건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를 잃는 건 치치 한 번으로 족했다.
“나 지금 행복해. 여기 있으면 맛있는 음식도 실컷 먹을 수 있고, 이런 좋은 옷도 마음껏 입을 수 있고……. 그리고 언제 기사들에게 잡혀갈까 봐 마음 졸이지 않아도 돼. 그런데 내가 이곳을 떠날 이유가 없잖아.”
“……벨라, 벨리아르 공작 때문이야?”
“좋은 분이라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마음을 준 거야? ……그래서 그래?”
“……그런 거 아니야.”
말은 아니라고 했지만, 이안에게 비치는 제 표정이 어떨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이안은 고개를 떨구며 긴 숨을 내쉬었다.
“지금 당장은 그럴 수 있어. 너 무사한 거 봤으니까, 나도 조급해하지 않을게. 하지만 기다릴 테니,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말해.”
마음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안마저 잃을 게 아니라면, 그런 마음을 품어선 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