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이안이 제 눈앞에 있을 리 없었다. 정적이 흐른 건 정말 찰나였다. 먼저 정신을 차린 이안이 곧장 다가와 벨라를 꽉 끌어안았다.
“벨라!”
이안에게 안기자마자 벨라는 헤버튼으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다. 향엔 저마다의 기억이 깃들어 있다더니, 이안에게서 풍기는 향은 애틋하고 아련한 추억을 가득 품고 있었다.
“……정말 이안, 너 맞아? 네가 왜 여기…….”
“벨라, 벨라…….”
“나 지금 꿈꾸고 있는 거 아니지? 응? 뭐라고 다른 말 좀 해 봐, 이안…….”
“몰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벨라, 나 이대로 조금만 있어도 될까? ……미안해.”
이안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먹먹했다. 반가운 마음과 달리 선뜻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안의 허리 즈음에서 멈칫거리던 손은 결국 닿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벨라는 버릇처럼 주위를 살폈다. 어디선가 공작이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스레 마음이 달았다. 가벼운 손길로 밀어내니 이안은 쉽게 물러났다.
“괜찮은 거지? 어디 아픈 곳은 없고?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 밥은 제대로 챙겨 먹은 거야?”
대답할 틈도 없이 빠르게 질문을 쏟아 내는 이안의 모습에 벨라는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 괜찮아. 아픈 곳도 없고 밥도 엄청 잘 먹고 있어. 네가 보기에도 나 되게 괜찮아 보이지 않아?”
“벨라…….”
분명 겉으로 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할 텐데. 이상하게 이안의 표정은 더욱 울상이 되어 갔다. 안 본 사이 쓸데없는 걱정만 늘어난 모양이다.
“너야말로 괜찮은 거야? 너를 여기서 만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대체 어쩌다가…….”
“그건 천천히 말해 줄게. 당장 말하기엔 조금 많은 일이 있었거든.”
“이안! 잘 따라오고 있는 줄 알았더니──.”
이안보다 앞서가던 기사가 뒤늦게 허전한 뒤를 확인하곤 되돌아왔다. 그러다 벨라를 발견하고선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빠르게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긴 했지만, 이미 본 것을 기억에서 지울 순 없었다.
“아가씨, 안녕하십니까. 혹시…… 이 녀석이 무슨 실수라도 저지른 겁니까?”
기사의 표정에서 불안을 읽은 벨라는 씁쓸한 미소를 삼켰다. 성내의 기사들은 이상하게 저와 말을 섞는 것을 그리 달갑지 않아 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이번에 새로 서임한 기사라 아직 모르는 게 많습니다. 혹여 실수했다면 아가씨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기사는 고개를 숙이며 옆에 있던 이안의 뒤통수를 꾹 내리눌렀다. 오히려 당황한 벨라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정말 괜찮아요. 그저 인사를 나누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딱히 그녀의 대답이 중요치 않아 보였다.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기사는 이안을 끌고 빠르게 자리를 떠나 버렸다. 덕분에 이안과는 겨우 눈빛만 한 번 주고받은 채 헤어져야 했다.
“제대로 얘기도 못 나눴는데…….”
씁쓸한 중얼거림이 허공에 흩어졌다. 홀로 남은 벨라는 한동안 제자리를 서성거리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얼떨결에 선임 기사에게 끌려가던 이안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설명은 좀 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벨라가 귀족 영애의 신분으로 있다는 건 들었으니 대충 상황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사이를 갈라놓을 건 또 무엇인가.
생각할수록 황당해 여차하면 화를 낼 생각이었다. 때마침 기사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내가 가장 중요한 걸 빠트렸어. 내 잘못이다.”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겁니까?”
실수라면 아주 큰 실수지. 기사가 중얼거리고선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아가씨와는 되도록 엮이지 마.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더라도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가라고.”
아마 대화를 듣진 못한 건지, 아예 모르는 사이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이안은 굳이 사실을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체 누군데 그러는 겁니까?”
“그냥 귀한 귀족 영애님이야. 귀한, 아주 귀한. 엄청나게 귀한. 그러니까 그 머릿속에조차 들이지 마. 안 마주치는 게 제일이지만, 마주치더라도 늘 초면처럼. 알겠어?”
“뭐 때문에 그렇게까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자세한 것까진 알려 하지 말고. 궁금하고 답답하겠지만 서운하게 생각하진 마라. 이게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니까. 너도 이곳의 소문은 들어서 대충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여기선 많이 아는 게 독이야.”
더 이상 묻는다고 무언가 정보가 나올 것 같지도 않고, 이안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 이곳에 들어온 이상 험한 꼴 많이 보게 될 테니.”
선임의 당부가 머릿속에 전혀 담기지 못하고 줄줄 새어나갔다. 그 자리엔 오로지 벨라의 모습만이 선명했으니 저런 충고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건 당연했다.
* * *
큼지막이 내리는 눈송이가 세상의 소리를 다 끌어안은 듯했다. 눈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릴까 싶어, 벨라는 창가에 달라붙은 채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덕분에 그가 복도를 지나오는 소리가 평소보다 선명했다.
그는 아마 방으로 들어오면 저를 향해 팔을 벌릴 것이다. 그럼 자신은, 마땅히 그의 품으로 안겨들어야 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붉은 눈동자가 단박에 그녀를 찾아 빠듯하게 휘감았다. 좀처럼 예상할 수 없는 그는 당연하게 팔을 벌렸다. 찰나의 머뭇거림조차 놓치지 않은 그의 눈빛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벨라는 원래 걸음걸이보다 조금 더 빠르게 가서 그의 품에 안겨 들었다. 어느 정도 눈치가 늘어서, 너른 가슴팍으로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단단한 손가락이 머리칼을 얽으며 파고들어 뒷머리를 감쌌다.
“요즘 열심히 돌아다니던데. 풀어 주니까 좋아?”
따스한 온기로 가득한 방 안에서 겨울의 한기를 덕지덕지 묻히고 온 그에게 안기는 것은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원래라면 더욱 그랬겠지만, 지금은 그를 밀어내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었다. 아무리 붕대를 감아도 상처 난 마음에서 자꾸 피가 배어 나왔다.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몽롱하게 눈두덩이를 어루만졌다. 벨라는 대답하는 대신 눈을 내리감았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지그시 힘이 실렸지만, 다시 날아오는 물음은 퍽 다정했다.
“어딜 그렇게 재밌게 돌아다녔어?”
“어젠 도서관을 갔어요. 재밌어 보이는 책이 많아서 고르기 힘들길래 그냥 다 들고 왔어요.”
말하다 보니 그가 책을 고르면 보여 달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단순히 궁금해서 알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허락한 책만 읽으라는 것이겠지만. 그래서 은연중에 그가 싫어하지 않을 책들로만 고르긴 했다.
“어떤 책인지 보여 드릴게요. 잠시만──.”
책을 가져오려고 허리를 감은 팔을 풀었는데 그가 다시 힘주어 꽉 끌어안는 바람에 움직일 순 없었다. 뒤이어 짤막한 물음이 떨어졌다.
“오늘은.”
“오늘은…… 예배당에 갔어요.”
예배당 앞에서 이안을 마주친 것이 떠오르는 바람에 입안이 까끌까끌했다. 무언가를 숨기고 말하려니 텁텁한 모래를 한가득 물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서서히 빨라지는 심장 박동 소리가 그에겐 전해지지 않길 빌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저를 안는 힘이 더욱 세지는 것만 같았다.
“아주 알차게 돌아다니는구나.”
“예배당을 쓰는 사람이 잘 없나 봐요. 애초에 여신의 조각상도 없었고……. 그래서 좋았어요.”
“계속해.”
그가 턱을 쥐고 들어 올리며 지시했다. 그는 이렇게 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감상하길 즐겼고, 또한 저의 의미 없는 조잘거림을 즐겼다.
“신화 책에서 봤는데, 공작님 가문과 같은 이름을 가진 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신께 기도를 올렸어요. 어차피 여신은 제 편이 아니니까……. 그래도 괜찮겠죠?”
“그럼 굳이 예배당에 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구태여 다시 되새기진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예배당엔 잘 가지 않을 거예요. 저는 도서관이 더 좋은 것 같아요.”
발칙한 거짓말이었다. 사실 예배당을 좋아한다고 했다가 그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려 버리면 곤란했다. 당장 내일도 해가 밝으면 바로 예배당에 가 볼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고, 또……. 답할 거리를 생각해 보았지만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안을 만난 후로 방에 돌아와 그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그렇다고 이안에 대해 말할 순 없으니까…….
사실 그가 자신을 더 얽매려고 일부러 이안을 잡아 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기사의 신분이 아니라 지하에 가둬 두었을 것이다. 이안은 평범한 기사들과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공작님, 혹시 기사들을 새로 뽑으셨어요?”
“그게 왜 궁금할까.”
“그냥…… 성안을 돌아다니다 보니까 낯선 기사들이 보이길래요.”
“너한테 낯익은 기사가 있으면 잘못된 거지.”
맞는 말이었다.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는 것으로 표정은 숨겼다.
“여기서 창문으로 봤어요. 산책하면서도 몇 번 마주치고 그러니까…….”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가 느긋하게 수긍했다. 한 번 참고 수긍한 척해 주었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만.
어쨌든, 새로 기사를 뽑은 건 사실인 듯하니 역시 이안을 잡아 오거나 한 건 아닌 모양이다. 무언가 더 떠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눈치 빠른 그가 알아챌 것 같기에 여기서 그만두기로 했다.
정말 이안이 공작가의 기사가 된 것이라면, 앞으로도 마주칠 기회가 충분하다는 것이니 그것만으로 위안 삼을 수 있었다.
“공작님, 제가 차 내려 드릴까요?”
“네가 내리는 차는 형편없는데.”
“그렇게까지 엉망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은 형편없다 하면서도 그는 벨라를 놓아주었다. 그녀는 곧 테이블로 다가가 서툰 손길로 차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언젠가 그가 차 내리는 법을 알려 주긴 했으나, 은근히 신경 쓸 점이 많아 한 번에 숙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그가 지켜보고 있을 땐 더욱 손이 무뎌졌다. 그러니 차 맛이 형편없는 이유가 오로지 제 손재주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벨라, 혹시 네게 함부로 대하는 기사가 있으면 바로 말해.”
“함부로의 기준이 어디까지인데요?”
“다양하지. 함부로 말을 건다거나, 함부로 만진다거나, 함부로 쳐다본다던가.”
찻잎에 물을 따르던 손이 멈칫거렸다. 그의 말이 이상해서 머릿속이 잠시 엉킨 탓이다.
말도 걸지 말고, 만지지도 말고, 쳐다보지도 말아야 하면……. 그냥 마주치지 말란 소린가?
하지만 기사들과 마주칠 때면 그들은 항상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인사는 하던데요?”
“그렇겠지. 함부로 무시하면 사지를 찢어 버린다고 했으니까.”
그제야 기사들이 저만 보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딱딱한 인사만 건넨 채 곧바로 사라진 이유를 깨달았다. 앞으로는 눈치껏 기사들을 피해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안은 어떻게 만나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