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이안은 난생처음 와 본 베른의 풍경에 휙휙 돌아가려는 시선을 애써 자제하고자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그 유명한 벨리아르 공작의 성으로 가는 길엔 거대한 나무가 길을 따라 양쪽으로 쭉 늘어서 있었다. 무거운 마음을 안은 채 그 길을 따라 한참 걸으니, 소문으로만 듣던 유령 성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거대한 성문보다 먼저 시선을 잡아끄는 이가 있었다. 이안은 제 눈을 쓱쓱 비비다가 이내 멍하니 입을 뗐다.
“……부단장님?”
성문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쉰 로드릭은 씁쓸한 어투로 답했다.
“여기 부단장이 어딨는가. 그냥 로드릭 경이라고 부르게.”
지금 호칭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안으로서는 대체 로드릭이 지금 왜 제 눈앞에 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왜 여기 계십니까?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쉬신다고…….”
또 한 번 한숨이 이어졌다.
“……끌려왔네.”
“예?”
“나도 여기 올 마음이 없었다고. 한적한 곳에서 팔자 좋게 쉬고 있었단 말이네. 그런데, 지금 내가 왜 여기에…….”
무슨 사연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마른세수를 하며 연달아 한숨만 내쉬는 로드릭의 모습에서 복잡한 감정이 엿보였다. 무언가 사정이 있는 듯해 이안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당신, 벨리아르 공작가 기사단에 입단 신청서를 넣은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요?”
“우편으로 이런 게 왔어요.”
“……대체 여기 주소는 어찌 알고.”
“어떻게 된 일이에요? 무언가 착오가 있는 거죠?”
누가 봐도 공작이 직접 보낸 서신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누가 그렇게 대놓고 조롱과 협박이 섞인 서신을 보낼까. 하도 어이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잠시 베른에 좀 다녀와야겠소.”
“하……. 한적하고 경치 좋은 곳에서 쉬자고 한 당신 말을 믿은 내 잘못이죠.”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는 아내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래서 벨리아르 공작과는 함부로 엮이지 말아야 했는데. 다 제 업보였다.
“자네는 내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이해가 가나?”
워낙 황당한 물음이라 이안은 얼떨결에 답했다.
“……아니요.”
“그렇지? 나도 이해가 가지 않네.”
페이트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던 로드릭이 벨리아르 공작가의 새로운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은 제국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렇게 로드릭이 큰마음 먹고 마련한 한적한 도시의 풍경 좋은 별저는 고작 사흘 만에 주인을 잃고 말았다.
* * *
벨라는 며칠간 작은 자유를 맛보았다. 한동안 성내가 어수선한 듯하더니, 벨리아르와 에릭 둘 다 바쁜 모양이었다.
산책하자는 말도 없길래 사흘째 되는 날 조심스레 홀로 방을 빠져나갔다. 이따금 마주치는 사용인들과 기사들이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는 것을 보고서 깨달았다. 그가 제 울타리를 조금 넓혀 주었다는 것을.
어제는 도서관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잔뜩 가져왔고, 오늘의 목적지는 예배당이었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긴 했지만 사람들이 사용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너무 깨끗해서 조금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벨라는 조심스레 자리를 잡고 앉아 손을 모아 어설픈 기도를 시작했다.
“말만 예배당이네요. 여신의 조각상도 없고. 이런 건 신성 모독, 뭐 그런 거에 해당 안 되나?”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에 벨라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이어 엘리아스의 얼굴을 본 순간 안도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엘리아스, 이러다가 진짜 심장 마비로 죽겠어요.”
“정말 놀란 거예요, 아니면 놀란 척해 준 거예요?”
“……오늘은 정말 놀란 거예요. 이런 곳까지 불쑥 나타날 줄은 몰랐어요. 이러다가 정말 잡히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 꼬리, 엄청 짧거든요.”
“제가 보기엔 엄청 길어진 것 같아요. 조만간 밟히겠어요.”
“나 이래 봬도 되게 세요. 아마 그…… 에릭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애초에 둘이 싸우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
단호하게 답한 벨라는 문득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에릭의 이름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근데, 에릭 경과도 아는 사이세요?”
“아마도?”
벨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닫았다. 이상하게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더 안 물어보네요?”
“물어보면 대답해 줄 거예요?”
“아니요.”
“거봐요. 저는 놀림당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엘리아스와도 제법 많이 얘기했다 보니 어느 정도 성향을 파악했다. 그는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쉽게 속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한테 기도하고 있었어요? 아, 타라를 믿나요?”
“저는 그 여신 안 믿어요.”
“왜요?”
“저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저도 안 좋아해요.”
“그래서 누구한테 기도했는데요?”
책에서 보았던 신의 이름을 말하려다가, 순간 터무니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있잖아요, 제 말 이상하게 듣지는 마세요.”
“음?”
“엘리아스, 혹시…….”
“신 아니냐고요?”
벨라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엘리아스가 말꼬리를 채 갔다. 이어 벨라의 얼빠진 얼굴을 보고선 그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 미안해요. 방금 벨라 표정이 너무 웃겨서.”
그는 곧 웃음을 갈무리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이름이 같잖아요, 신화에 나오는 신이랑.”
“다행이네요.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 게 저뿐만이 아니라서. 하지만, 충분히 그럴 만하잖아요. 이런 곳도 막 기척 없이 드나들고.”
눈동자 색도 막 바꾸고. 그건 어떻게 한 거냐고 물으려다가 관뒀다. 어차피 답해 주지 않을 것이 뻔했기에.
“공작한테도 물어보지 그래요? 혹시, 운명의 신을 죽인 죄로 지상으로 추방당한 거 아니냐고. 거기에 벨리아르도 나오잖아요?”
“앞부분만 조금 읽고 말아서 이름 정도만 봤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잘 몰라요.”
“별로 재미없었나 봐요.”
“그런 신들의 이야기가 뭐가 궁금하겠어요. 저 살기도 바쁜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벨라는 신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았다. 그녀에겐 신화도 결국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나, 같은 질문 계속해도 돼요? 그래서 벨라가 누구한테 기도하고 있었는지 너무 궁금한데.”
하지만 사람들이 왜 신을 추앙하며 받드는지는 알 것 같았다. 무언가 기댈 곳이 필요하니까. 자신 역시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간절할 땐 이렇게 빌게 되니 말이다.
“여신 타라를 제외하면 아는 신이 벨리아르랑 엘리아스 둘뿐이라서……. 그냥 둘한테 다 빌었어요.”
“뭐라고 빌었는데요?”
“그냥……. 행복하게 만들어 달라고요.”
“좋은 기도네요. 둘 중 하나는 그 기도 들어주지 않을까요?”
“그래서 앞으로는 매일 와서 빌어 보려고요.”
“좋은 생각이에요.”
다른 신에게 빈다고 생각하니 조금 희망이 생기는 것 같기도 했다. 여신 타라는 전혀 소용없지만, 다른 신은 좀 다르지 않을까.
“엘리아스, 당신 말이 맞았어요. 전에 말한 그 친구 있잖아요. 아……. 어차피 친구 얘기 아닌 거 알고 계셨죠?”
“그걸 믿으면 바보 아닌가요? 벨라가 시무룩할까 봐 일부러 내색 안 한 거지.”
“참 고맙네요.”
“이런 게 친구 아니겠어요.”
그의 능청스러운 말에 웃음이 삐져나왔지만, 곧 자조적인 미소로 바뀌었다.
“애초에 제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 공작님께서 제게 마음을 주시는 게 이상한 일이죠.”
“그동안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요. 그냥…… 주제 파악을 좀 했을 뿐이에요.”
엘리아스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 주었다.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큰 위로가 될 때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벨라는 체념하듯 눈을 감고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부디, 제 욕심을 다 가져가고 평범한 행복을 가져다주길.
“엘리아스, 그러고 보니 아직 대가를 받아 가지 않았잖아요. 전에 말했던 그 기억 말이에요.”
“바쁠 건 없으니까요. 언제든 준비가 되면 벨라가 먼저 내게 말해 줘요. 그럼 그때 받아 갈게요.”
“그럼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 행복하고 소중한 기억이 그리 많은 건 아닌데…… 얼마 안 되니까 더 고르기 힘든 것 같아요.”
“당연하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대체 엘리아스는 제게 왜 이리 친절한 걸까. 원래부터 저를 아는 듯이 대하는 것부터가 이상하지만, 그에게선 이상하지 않은 점을 찾는 게 더 힘들겠다.
“……엘리아스, 당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 같아요.”
“과찬이에요.”
빙긋 웃으며 답하니 정말 어이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너무 이상해서 편한 상대였다.
엘리아스는 한동안 문 쪽을 살피다가 이내 그녀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벨라, 지금 밖에 좀 나가 볼래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지금 나가 보면 무슨 일이 생길 거예요.”
“……안 좋은 일이에요?”
“당장은 좋은데, 나중엔 안 좋은 일? 싫으면 그냥 여기 있어도 돼요. 하지만 그렇다고 정해진 운명이 바뀌진 않아요. 어차피 어떻게든 일어나게 될 일이니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요.”
“나가 봐요. 당장은 기분이 좋아질 테니까.”
등을 떠미는 손길에 몇 걸음 떼다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당연히 엘리아스는 없었다. 벨라는 괜히 위를 한 번 쳐다보았다. 천장은 멀쩡하니 땅으로 꺼진 걸까? 그러기엔 바닥도 너무 깨끗했다.
벨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끊어 내며 문을 열고 나갔다. 그때,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모습이 아주 익숙했다. 내리쬐는 햇살이 너무 눈부신 탓에 헛것이 보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저를 보는 상대도 상당히 놀란 모습이었다. 헛것이 저처럼 놀라진 않을 테니까.
“……이안?”
뿌옇게 흘러나온 이름이 구름처럼 몽글하게 떠다녔다. 그만큼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