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주인님, 기사 모집 관련해서 서류는 다 추렸습니다. 그리고, 로드릭 부단장이 추천장을 보내왔습니다.”
에릭이 책상 위로 서류 두 장을 올려놓았다. 하나는 로드릭이 보낸 추천장, 다른 하나는 그 추천 대상의 입단 신청서였다. 벨리아르는 그 서류들을 스치듯 한 번 보고선 무심히 대꾸했다.
“추천하란다고 정말 하네. 진작 그렇게 말을 잘 들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이안 에드레이즈를 추천했던데요.”
그제야 벨리아르의 시선이 제대로 서류에 머물렀다. 그사이 에릭은 침대를 흘끗 쳐다봤다. 고른 숨소리와 더불어 그녀에게서 아무런 미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짧게 숨을 내쉬었다.
“질긴 인연이네.”
“어떻게 할까요?”
“서류는 통과시켜. 최종은 실력 보고 결정하고.”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걱정되는데?”
에릭은 다시 한번 곤히 잠들어 있는 벨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성으로 들이게 되면 아가씨와 너무 가까워집니다.”
“기사를 뽑는 데 사감이 섞이면 곤란하지.”
“게다가 주인님께 불순한 감정을 품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 그것까지 사감으로 치부하고 무시할 순 없습니다.”
에릭의 말을 가만히 듣던 벨리아르가 작게 웃으며 물었다.
“네가 걱정하는 게 벨라야, 나야.”
이안이 어떤 감정을 품었든 감히 그를 해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그 사실이야 누구보다도 에릭이 가장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안이 탐탁지 않은 이유는 그저 제 주인에게 반감을 품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실 걱정이 아니라 그냥 내키지 않은 것뿐이다.
“……제 걱정이 쓸데없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리고 벨라에 대해서는…… 어차피 멀리 둬도 깔짝대는 건 똑같던데. 그렇지?”
그는 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가끔은 자신의 보고가 형식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이안이 벨라에게 편지를 보내려 했던 것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제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안 보이는 곳에서 집적대게 두느니, 차라리 눈 닿는 곳에 두는 게 낫잖아. 번거롭지도 않고. 게다가 직접 내 손 위로 기어들어 오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렇게 이른 아침에 할 일을 끝마친 벨리아르는 긴 숨을 내쉬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마시기 적당한 온도로 내려간 찻잔을 들고 잠들어 있는 벨라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제 들여온 꽃 중에 화분에 있는 것들은 방 안으로 옮겨 둬. 벨라의 시선이 제일 잘 닿는 곳에.”
보통은 이리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잠에서 깨거나 뒤척이기라도 했는데, 오늘은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이 평온히 이어졌다.
“어젯밤 늦게 주무셨나 봅니다.”
“알아서 일어나게 놔둬. 오늘은 따로 들르지 마.”
“예, 알겠습니다.”
벨리아르는 창가에 기댄 채 차를 마시며 잠든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에릭이 나간 후, 괜스레 부드러운 뺨을 한 번 쓸어 보았다.
“으음…….”
손이 차가운 탓에 벨라가 몸을 웅크리며 작게 신음했다. 그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스몄다.
* * *
지난날 에릭을 붙잡고 청승 떨었던 것이 무색하게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나니 머릿속 안개가 말끔히 걷혔다.
버릇처럼 밤잠을 설칠까 걱정했는데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잠들어 버렸다. 평소처럼 책상에 앉아 펜을 사각거리는 그의 모습을 몰래 훔쳐보며 머릿속에 담다 보니 다른 상념이 끼어들 틈이 없었던 모양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고, 그는 없었다. 하지만 움직이긴 싫어서 폭신한 이불을 그러쥔 채 눈만 굴려 방 안을 훑었다. 늘 같은 곳에 놓여 있던 총이 없었다. 그는 또 사냥을 나간 모양이었다.
가늘고 긴 한숨을 내쉬며 돌아눕자 시야에 들어온 창가의 모습이 제법 낯설었다. 벨라는 일렬로 쭉 놓인 화분들을 보며 나른히 중얼거렸다.
“……꽃이네.”
파란 꽃이었다. 아니, 보라색인가? 볼 때마다 색이 헷갈리는 꽃이었다.
수도에서 화병째 그대로 가져왔던 꽃은 어느새 사라졌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협탁 위에 있었는데. 시들어 버린 꽃은 더 이상 쓸모가 없으니 그가 버렸을 것이다.
시들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괜히 버려진 꽃이 안쓰럽고 가여웠다. 정말 같잖은 연민이었다.
벨라는 한참을 침대 위에서 뭉그적거리다 겨우 게으름을 떨쳐 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아예 옆 의자로 옮겨 앉았을 무렵, 그가 방으로 돌아왔다. 벨라는 얼른 일어서 그에게 다가갔다.
“다녀오셨어요?”
“식사도 안 하고 잘 자네.”
“이제 배고픈 것 같아요.”
사실 별로 입맛은 돌지 않았지만, 그가 들으면 좋아할 말로 골라서 꺼냈다.
“지금 먹을래, 조금 있다가 먹을래.”
“이따가요.”
“배고픈 것 같다며.”
“지금 먹을까요?”
슬쩍 눈치를 보며 말하니, 그가 조용한 미소를 곁들인 채 물었다.
“우유 마실래?”
“네, 좋아요.”
테이블을 가득 메운 식사보단 우유 한 잔 마시는 것이 낫기에 냉큼 답했다. 그가 사용인을 불러 지시하자 금방 따뜻한 우유 한 잔이 손에 들렸다.
그가 침대에 앉는 것을 보고선 벨라는 옆 의자에 앉았다. 벨리아르는 옆으로 머리를 받치고 누운 채 벨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행히 우유를 마시는 동안은 느긋하게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다 마셨으면 이리 와.”
“……저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어요.”
“알아. 그래도 와야지.”
부드럽고 완고한 말에 벨라는 컵을 내려놓고 다시 침대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그의 품으로 딸려 갔다.
여전히 몸과 마음이 서로 맞부딪쳤다. 마음은 그가 미우니 밀어내라 아우성치는데, 몸은 제자리를 찾았다는 양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기만 했다.
“공작님, 전에 수도에서 사 주셨던 꽃 말이에요. 그 꽃…… 버리셨어요?”
“화병에 꽂혀 있던 거?”
“네.”
“시들어서 버렸어.”
당연한 걸 물었고, 당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아예 화분으로 놔뒀잖아. 별로야? 다른 꽃으로 놔줄까?”
“아니요. 마음에 들어요. 근데, 너무 많아요.”
“그럼 하나만 놔두고 화원에 옮겨 심어 놓으라고 할게. 하나는 네가 돌봐 줘. 물 주고, 햇빛도 보여 주고.”
“저 꽃 키워 본 적은 없는데……. 그러다가 죽으면 어떡해요?”
그는 이번에도 쉽게 답했다.
“버리면 되지. 그럼 또 새로운 꽃으로 갈아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제가 죽으면요?
혀끝에서 맴도는 말을 애써 삼켰다. 쓸데없는 가정이었다. 그의 그늘 안에 숨어 있는 한 아무도 저를 죽일 순 없을 것이다. 병이 나지 않는 이상은.
제 목을 틀어쥐고 있는 건 오로지 그였다. 그러니, 살고 싶으면 그의 발아래에 바짝 엎드리면 된다. 아름다운 꽃이 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그가 주는 물을 받고 햇빛을 받으며.
그런데, 그렇게까지 살아야 할까. 대체 무엇을 위해서. 불현듯 스쳐 간 생각에 사뭇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냥 다 포기해 버릴까 싶다가도, 아직도 죽는 것이 더 두려웠다.
잘 생각해 보면 그가 자신을 이용한 것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는 마땅히 자신이 가진 것을 활용했을 뿐이니까. 살려 준 것으로도 모자라 이리 과분한 의식주까지 제공해 주는데 감히 그의 마음까지 바란 것은 제 과욕이었다. 그러니 그가 저를 이용했다고 해서 그를 원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벨라는 처음, 헤버튼에서 도망쳐왔을 때처럼 그날의 마음을 떠올렸다. 어떻게든 간절히 살아남고자 했고, 그는 제힘으로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주었다. 그러니 저 역시 할 수 있는 만큼의 보답을 하는 것이 마땅했다.
벨라는 그의 허리를 살짝 끌어안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프다고 울어 대는 마음의 상처를 투박하게 덮어 버렸다. 더 이상 그 상처에 연연하지 않을 생각으로.
“벨라, 전에 준 책은 다 읽었어?”
“아니요. ……별로 재미가 없어서 앞에 몇 장만 읽고 덮었어요.”
“그래? 재밌어할 줄 알았는데. 그럼 무슨 책을 좋아할까. 아니면, 책은 다 별로야?”
“다른 책을 주시면 잘 읽을게요.”
다른 나라나 도시의 책이면 좋을 것 같다. 전에 소만에 갔을 때 받은 하탐의 책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버릇처럼 제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의외의 말을 꺼냈다.
“도서관 가서 읽고 싶은 책 직접 골라 봐. 무슨 책을 골랐는지 나한테 보여 주고.”
“도서관에 가도 돼요?”
“이 성안에서 네가 가지 못할 곳은 없지. 심심하면 지하도 구경하러 가도 돼.”
“……에릭 경과 함께 가야 하는 거죠?”
조금 헷갈리는 바람에 잠시 눈만 깜빡이다 묻자, 그는 낮게 웃었다.
“아.”
그가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긴 탓에 짧은 신음이 흘렀다. 곧이어 다시금 머리를 매만져 주는 손길이 퍽 다정했다.
“에릭이 그렇게 좋아? 어디든 같이 가고 싶을 정도로?”
그는 가끔 제 말을 이상하게 해석하곤 했다. 분명 몰라서 그런 건 아닐 테니, 말에 숨은 뜻은 명확했다.
“그게 아니라……. 그럼 제가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시잖아요.”
머리칼을 얽던 손이 살며시 뒷덜미를 감싸 쥐었다. 따뜻한 우유를 마시고서 그의 품 안에 갇혀 있던 탓인지, 뭉근히 열이 오른 몸에 그의 손이 닿자 그 부위에서 홧홧한 열꽃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가만히 내쉰 숨이 제법 뜨거웠다.
“그러게. 그건 큰일이네.”
전혀 큰일 같지 않은 말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