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헤버튼으로 돌아갈 생각인가?”
로드릭의 물음에 이안은 씁쓸한 숨을 삼켰다.
“……아니요. 굳이 헤버튼으로 돌아갈 이유는 없으니, 새로운 도시에 가 보려고 합니다.”
더 이상 헤버튼에 남아 있는 건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피폐한 모습에 지쳐 도망쳤고, 그런 아버지는 결국 술독에 빠져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쩌면…… 벨라를 지키지 못한 것이 제 모든 불행의 시발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아직은 제 소중한 친구를 도저히 놓아줄 수가 없었다. 이안은 아직도 그날 밤 벨라에게 주려고 했던 펜던트를 늘 품에 지니고 다녔다.
“어디로 갈 건지는 정했나?”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북쪽으로 향할까 합니다. 어차피 최종적으로는 베른에 갈 생각이라서요.”
“그럼 이참에 아예 베른으로 가는 건 어떤가.”
로드릭이 테이블 위로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언뜻 내용을 확인한 이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것은…….”
“보이는 대로, 벨리아르 공작가의 기사단 모집 공고이네.”
“언제 공고된 것입니까? 제가 계속 확인하고 있었는데…….”
“내게 인재가 있으면 추천해 달라고 미리 온 것이네. 참 황당하지 않은가. 세상에 라이벌 기사단의 부단장에게 인재를 추천해 달라는 사람들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하, 참.”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로드릭의 입가엔 기분 좋은 미소가 옅게 스며 있었다.
“그래서 자네의 추천장을 써서 보낼 참이네.”
“예? 저, 저를 말입니까?”
“자네의 실력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나도 긴가민가하네만……. 뭐, 어떤가. 내게 추천해 달라 한 그쪽의 잘못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안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었다면 추천장을 써 줄 생각일랑 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엔 별생각이 없었으나, 며칠간 수도에서 자주 만나다 보니 이안의 성정이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다. 요즘 보기 드물게 흔들림 없이 바른, 곧은 청년이었다.
로드릭은 복잡한 생각은 다 제쳐 두고 그저 이안이 뜻하는 바를 이루길 바랐다. 비록 그 길이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길일지언정, 그라면 잘 헤쳐 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추천장을 써 주시는 것만으로 저는 매우 감사한 일입니다.”
보통은 추천장이 있다면 거의 입단이 확실시되었지만, 벨리아르 공작가는 통념과 거리가 먼 곳이었다.
벨리아르 공작의 성정상, 분명 추천장을 보내도 제 마음에 차지 않으면 가차 없이 떨어트릴 사람이라는 것을 로드릭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추천장이야 써 주겠다만, 뽑히는 건 순전히 자네의 역량에 달려 있네. 자네도 공작가 기사단의 악명은 들어서 알고 있을 것 아닌가.”
“예, 충분한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굳센 의지로 빛나는 눈빛을 마주하며 로드릭은 낮게 웃었다. 마음 같아선 벨리아르 공작가가 아니라 대신전이나 황실 기사단으로 입단하는 것을 권유하고 싶지만, 하도 뜻이 확고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저 의지가 악의 수렁에 빠지지 않고 곧게 나아가길 바랄 뿐이었다.
“나도 곧 부단장직을 내려놓고 수도를 떠날 참이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단장님께서 왜……. 아직 젊으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려놓으려는 것이네. 조금이라도 더 젊을 때 놀아야 하지 않겠나. 다 늙어서 놀려고 하면, 그것도 별로일 것 같아서.”
“너무 아쉽습니다.”
“경치 좋은 곳에 저택을 얻을 생각이네. 나중에 꼭 놀러 오게.”
“초대해 주시면 꼭 찾아뵙겠습니다.”
* * *
“아가씨, 산책하실까요?”
에릭의 한마디에 베른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확 와닿았다. 벨라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오늘은 나가고 싶지 않아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 자신을 이리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벨라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같잖은 치기, 같잖은 자존심. 에릭이 산책을 권유하는 것 또한 그의 뜻일 테니까. 벨라는 애꿎게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어쩌면 내일도 그럴지 모르겠어요.”
“몸이 안 좋으십니까?”
에릭이 걱정스럽게 물었으나 벨라에겐 그것마저 순수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괜히 저한테 시간 낭비하실 필요 없어요. 저 산책 안 해도 되니까, 내일부터는 안 오셔도 돼요. 바쁘시잖아요.”
아파서, 망가져 버려서 쓸모가 없어지면 그는 자신을 가차 없이 내버릴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드니 불쑥 겁이 나 손가락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제 손에 딱 맞는 반지는 이따금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이것도 제 일 중에 하납니다.”
“제대로 산책하지 않으면 공작님께서 화내시나요?”
“아마도요.”
“제가 귀찮으시겠어요.”
에릭은 황당하다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
“귀찮았으면 지금 이러고 있지 않겠죠. 제가 그렇게 물러 보였습니까?”
아무래도 산책을 거부한다고 해서 에릭이 쉽게 물러나 줄 것 같지 않았다. 산책이 아니면 딱히 제게 볼일도 없으면서, 슬금슬금 다가오는 걸음걸이가 그랬다.
“그럼 저랑 말동무 좀 해 주실래요?”
“얼마든지요. 차를 준비할까요?”
에릭은 기다렸다는 듯 냉큼 답하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도통 벨리아르 공작과 에릭, 둘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어 덧없이 웃고 말았다.
“그런 본격적인 티타임은 좀 부담스러워요. 그냥 옆에 계셔 주시는 걸로 충분해요.”
에릭은 다가오자마자 닫혀 있던 커튼부터 열어젖혔다. 벨라는 순식간에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조금 부담스러워 저도 모르게 눈가를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날이 좋네요. 이런 날에 산책도 마다하시고.”
에릭이 태연히 덧붙이는 말에 또 절로 눈길이 갔다. 참 줏대 없는 몸이었다. 막상 보니 쨍쨍한 햇살 내려앉은 풍경이 참 예뻤다.
평소와 달리 생기가 돈다 했더니, 인부들이 수레에 보라색 꽃을 가득 실어 옮기고 있었다.
“저게 다 뭐예요?”
“블루벨 꽃이요. 성을 비운 사이 화원에 도둑이 들었더라고요.”
“네? 도둑이요? ……이 성에요?”
심지어 블루벨 꽃은 성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화원에 피어 있었다. 개미 한 마리조차 들어오기 힘든 이 성에 도둑이 들었다고 하니 잘 믿기지 않았다.
“저도 이해가 가진 않습니다만, 동쪽 화원에 있던 블루벨 꽃이 싹 사라진 탓에 주인님의 심기가 상당히 좋지 않으십니다.”
“블루벨이면 그 보라색 꽃을 말씀하시는 거죠? 저번에 그, 황녀 전하께서 선물한…….”
뭐라고 지칭해야 할지 몰라 말끝을 흐리니 에릭이 곧바로 정정해 주었다.
“폐황녀요. 반역에 가담한 죄로 폐위된 이상, 아가씨보다 나을 것이 없으니 굳이 높여 말할 필요 없습니다.”
“……네, 그렇죠.”
“아무튼 공작님께서 그 꽃을 상당히 아끼시거든요. ……뭐, 싫어하시기도 하는데.”
“아끼는데 싫어한다는 말인가요?”
이해가 가지 않았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제게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그러했으니까.
“제가 보기엔 아끼는 마음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어쨌든 꽃이 지지 않도록 열심히 관리하시니까요.”
“공작님께선…… 그 꽃들을 순수하게 사랑하진 않으시겠죠?”
과연 그가 순수하게 애정하는 것이 존재하긴 할까. 하다못해 꽃이라도 좋아한다면 다행일 텐데, 에릭은 곤란한 미소를 내비쳤다.
“어려운 질문이네요.”
그 대답은 부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자신을 철저히 이용해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잘한 희망이 피었다가 바스러지길 수없이 반복했다.
“그럼 이번엔 쉬운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예, 말씀하십시오.”
“저기, 저쪽으로 가면 문이 하나 있잖아요. 그 문밖으로 나가면 어디로 통하는지…… 알고 계세요?”
그저 충동적이고 순수한 물음이었다. 그녀가 어떤 문을 말하는 건지 에릭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예전에 벨라가 나갈까 말까 망설였던 그 문이었다.
“성역의 숲에서 주인님을 처음 뵈셨죠.”
“네, 맞아요.”
“혹시 그곳에서 오두막도 보셨습니까?”
에릭의 물음에 그와의 첫 만남이 생생히 떠올랐다. 순간 그에게 쫓기던 감각까지 되살아나는 바람에 살갗의 돌기가 바짝 곤두섰다. 벨라는 팔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확히는 거기서 공작님과 마주쳤었어요.”
“문을 열고 나가면 숲 사이로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오두막이 나옵니다.”
“아…….”
“그리고 더 가다 보면 아가씨께서도 아시다시피, 포웬 마을이 나오죠. 포웬은 다른 도시와의 경계에 있으니 베른을 빠져나가기도 쉽습니다.”
에릭이 친절히 경로까지 읊어 주어서 머릿속으론 벌써 다른 도시까지 빠져나가는 상상이 들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일 텐데, 굳이 꺼낸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경께선 제가 도망가길 바라시는 거예요?”
에릭이 조용히 헛웃음을 내비쳤다.
“제가 그걸 원해서 이런 얘기를 드리겠습니까? 혹시나 그런 생각을 하실까 봐 먼저 이야기한 겁니다. 아가씨의 선택지는 뻔하고, 저는 그 뒤를 쫓아야 하니까요.”
저도 모르게 혹한 마음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그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숲이라고 하니, 이후 숲을 가로질러 다른 도시로 빠져나가는 건 얼핏 생각하기에 상당히 간단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무거우실까요?”
“제게 몹쓸 짓을 하시는 거죠.”
저 하나 쫓는 건 둘에게 아무것도 아니겠지. 생각으로는 쉬워 보여도, 막상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그에게 들킬 것이 분명했다.
벨라는 고개를 떨구며 씁쓸한 미소를 삼켰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에릭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선 물었다.
“아가씨, 나가고 싶으십니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아니라고 답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정말…… 모르겠어요.”
“아가씨.”
“……이 얘기는 공작님께 전하지 말아 주세요. 오늘 조금 기분이 안 좋아서 괜히 해 본 말이에요. 제가 알아서 정리할게요.”
“주인님께는 산책 잘하셨다고 보고하겠습니다. 걱정 말고 쉬세요.”
에릭이 나가자마자 벨라는 이불 속으로 몸을 웅크렸다. 머릿속이 시끄러워 귀를 틀어막았다. 제 마음과 생각이 너무 혼잡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빼앗긴 마음은 깊게 난 상처를 끌어안은 채 서럽게 울어 댔고, 묶인 몸은 현실의 평온함에 물들어 그에게 안주하길 원했다.
지금은, 어느 쪽을 달래야 하는 걸까.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