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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03)화 (103/180)

103화

벨라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양 웃기 위해 애썼다.

“그래도 내가 공작님께 아주 민폐만 끼친 건 아니란 소리지?”

“그럼요. 아가씨께서도 얼마나 고생이 심하셨는데 민폐라니요. 저도 자세히는 잘 모르지만…… 2황자 전하께서 즉위하게 되셨으니 공작가의 권세는 앞으로 더욱 드높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시에나는 갑자기 말끝을 흐리더니 주위를 흘끗 둘러보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혹여 소리가 새어 나갈까, 목소리를 낮춘 채 말을 이었다.

“2황자 전하께서는 전혀 힘이 없으셨거든요. 그런 분을 황좌에 올려놓은 게 공작님이시니, 앞으로 그 누구도 쉬이 공작가의 권세를 넘보지 못할 거예요. 전보다 더요.”

높은 분들의 세력 다툼이 어찌 흘러가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시에나의 말을 들으니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이번 일로 그는 전보다 더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는 것. 지금까지 있었던 일의 인과관계가 완벽하게 틀을 갖추었다.

그는 황태자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눈치채고 있었고,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한 명분을 얻기 위해 자신을 이용했다.

“……얘기해 줘서 고마워, 시에나.”

“별말씀을요.”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 둔 건 아니야?”

“이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오래 비우지도 않았는데 늘 저한테만 잔소리가 심하다니까요. 아, 방에 모셔다드릴까요?”

“괜찮아. 밖에서 바람 좀 쐬다 가려고. 얼른 가 봐.”

“감기 걸리시면 안 되니까 너무 오래 있지는 마세요. 그럼, 가 볼게요.”

벨라는 시에나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가다듬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완전히 혼자가 됐을 때,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더 이상 그의 마음을 기대할 필요도, 그를 의심할 필요도 없어졌다. 머릿속에 남은 단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는 그저 자신을 이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게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렸던 걸까. 그래서 한동안 잘해 준 모양이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바보같이 들떠선.

과연 그가 자신을 이용한 것이 이번뿐이었을까.

한 번 고개를 쳐든 의심은 순식간에 저 깊은 기억까지 단숨에 파헤쳤다.

“나가서 놀고 와.”

“기분 전환 겸 밖에서 놀고 오라는 얘기야. 알아듣기 어려워?”

갑작스레 자신을 성 밖으로 나가게 해 주었던 그날도 잘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투성이였다.

그땐 하도 정신이 없어서 잘 몰랐지만, 그는 절대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을 제 손 밖에 두지 않는다. 그런데 그땐 감시역조차 붙이지 않은 채 자신을 내보내 주었다.

아니지, 아마 따라붙은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때도 이번 일처럼 다 알고 있으면서 가만 놔둔 것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그렇게 납치당할 걸 알면서도. 그러니 외박을 했는데도 그 정도로 끝난 게 아닐까. 그때, 그는 진정으로 화를 내지 않았다.

“우리도 어쩔 수가 없어. 아가씨가 돈 많은 건 알겠는데, 때로는 돈보다 더 소중한 게 있는 법이잖아. 이해하지?”

어쩌면 자신을 납치하게 만든 것조차 그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그분 심기 뒤틀리면 우린 다 죽은 목숨이야! 사람들 앞에 세울 거니 최대한 흠 없이 데려오라고 하셨단 말이다!”

아니, 그들에게 자신을 데려오라고 지시한 건…… 분명 벨리아르 공작, 그였을 것이다.

“……하.”

벨라는 결국 허망한 숨을 내뱉었다. 그걸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그는 예전부터 꾸준히 자신을 이용해 오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한 쓸모가 있었으니까.

그에게서 달아나는 것을 포기하고 순응한 시점부터, 벨라의 세계는 오로지 그였다.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으리라 믿었다. 또한, 버리지 않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또한…… 조금은 다를 것이라 믿었다.

말로는 아니라고 밀어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가 자신을 조금은 특별하게 여기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 치치처럼 멋대로 쓰다가 버리진 않을 것이라고.

그 믿음이, 그녀의 세계에 금이 갔다.

* * *

제국은 다시 안정을 되찾고 완벽한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교황은 황좌가 빈 틈을 타 이때다 싶어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보았으나 턱도 없는 일이었다.

에드윈이 새롭게 즉위하자마자 한 일은 기존의 대주교들을 숙청하고 그 자리에 벨리아르가 지정한 인물들을 채워 넣는 것이었다.

황제가 바뀌어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그저, 벨리아르 공작의 또 다른 허수아비가 세워졌을 뿐이다.

레오니스는 반역을 주도한 죄로 성문에 효수되었고, 프리스틴은 그 반역에 함께 도모했다는 혐의를 벗지 못하고 평생 외딴 섬에 유폐되었다.

황후는 큰아들과 막내딸을 잃은 슬픔에 큰 충격을 받아 침상에 몸져누웠다. 심성 여린 에드윈이 매일같이 살피고 있다지만, 그리 위로가 되진 않을 것이다.

벨리아르 공작가의 마차가 수도를 벗어났다. 아직 베른의 겨울은 지나지 않았지만, 벨리아르와 벨라는 다시 베른으로 향했다.

“별로 기쁜 표정이 아니네. 치치를 죽인 황녀는 평생 섬에 갇혀서 외롭게 살다 죽을 테고, 네게 반역을 뒤집어씌우려 한 황태자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는데.”

벨라는 고개를 떨군 채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끝내 프리스틴에게 사과를 받지 못했다. 그러니 용서하지 못했고, 치치의 죽음은 흉터로 남아 여전히 아팠다. 그녀에게 남은 건 이런 쓰라린 것들뿐이었다.

그는 벨라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베른으로 가고 싶어 했잖아.”

벨리아르가 한마디를 덧붙였지만, 벨라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가 설핏 눈가를 찌푸릴 무렵,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폐하께서 쓰러지던 날, 그때 말이에요.”

위태롭게 금이 간 벽을 영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모른 척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이미 봐 버린 이상 그리할 수도 없었다.

언젠가 무너질 것을 아는데 어떻게 의연할 수 있을까. 벨라는 이미 그 세계에 너무 깊이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왜 저를 폐하 곁에 두셨어요?”

벨리아르는 굳이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모두 끝난 일이었기에. 과정이 어찌 됐든, 중요한 것은 결과였다.

결국은 벨라를 노리고 치치를 죽인 프리스틴에게 마땅한 처벌을 내렸고, 레오니스도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완벽하게 복수를 해 주었는데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선 차분한 목소리로 이유를 읊어 주었다.

“명분이 필요해서.”

“……명분이요?”

“그래. 레오니스가 반역을 꾀하려는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보였고, 그 일을 내가 나서서 정리하려면 그럴 명분이 필요했어.”

그러니까 그 명분을 만들기 위해 너를 이용했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이 벨라에게 상처가 되리라는 것쯤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주는 상처가 그녀 스스로 목줄을 끊고 싶어 할 만큼 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벨라는 그런 생각을 해선 안 되었다.

당장은 작은 상처로 쓰라리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아무리라 생각했다. 벨라에게도 결국은 만족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벨라가 또다시 아무런 말이 없자 그는 낮은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벨라.”

벨라는 치맛자락을 한 번 꾹 말아 쥔 후,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때때로 그가 말했던 것처럼 철저히 쓸모에 따라 자신을 이용한 것뿐이다. 그에게 자신을 내어 주었고, 그는 자신을 소유했으니까. 당연한 것에 굳이 상처받을 필요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그녀의 담담한 인사에 벨리아르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뭐가 감사한데.”

“저 구해 주시려고 엄청 애쓰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게 감사해요.”

분명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하는데 왜 전혀 기쁘지 않은지, 오히려 기분이 더러워지는 건지 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 * *

벨리아르는 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벨라를 제 침실에 두고 방을 빠져나왔다. 그의 발길은 버릇처럼 화원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뒤따르는 에릭에게 지시했다.

“빠르게 처리해야 할 것들은 추려서 화원으로 가져와. 그리 급하지 않은 것들은 침실에 가져다 두고.”

“아가씨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피곤해 보이시던데요.”

“그냥 자게 놔둬. 대신 저녁 식사는 신경 써서 준비하라고 일러둬.”

“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번에 기사들도 충원해야 하니 공고를 내도록 해.”

레오니스의 반역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공작가의 기사 몇도 목숨을 잃었다. 기사단의 규모를 크게 두진 않았지만, 최소한의 인원은 맞추는 편이었다.

게다가 노년의 지휘관이 이제 그만 쉬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왔으니 지휘관의 자리도 새로 채워야 했다.

“지원 자격은 작년처럼 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서류는 네가 보고 알아서 추려. 대충 어떻게 골라야 할지 알잖아.”

지원 자격은 기사단을 창립한 이래로 매년 같았고, 또 간단했다. 성인식을 치른 성인일 것. 그게 전부였다. 실력만 있고 의지만 있다면 성별과 나이, 신분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걱정하지 않으시도록 잘 처리하겠습니다. 화원으로 차를 내오라 할 테니 조금 쉬고 계십시오. 아무리 주인님이라 하셔도 휴식은 필요합니다.”

살짝 잔소리가 얹어지려 하자 벨리아르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가. 너도 급한 일만 대충 처리해 두고 쉬어.”

“예.”

여기서 더 말을 얹었다간 괜히 불똥이 튈 수도 있었기에 에릭은 짧게 대답하곤 곧바로 사라졌다.

벨리아르는 심기가 어지럽거나 할 때면 보통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했다. 서쪽 숲에 가거나, 화원에 가거나.

하지만 그는 의외로 두 장소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기실 가장 싫어하는 곳에 속함에도 그는 그곳에서 홀로 오랜 증오를 곱씹는 것을 즐겼다. 누군가 그 사실을 안다면 고약한 취미라고 인상을 찌푸릴지도 모른다.

벨리아르가 아무리 괴로운 기억을 되짚으며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을 즐긴다지만, 잠시 후 맞닥뜨린 상황에 웃어 줄 정도로 너그럽진 않았다.

그는 화원에 발을 들이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우뚝 멈춰 섰다. 빠득 이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나지막이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 개새끼가.”

그가 그토록 사랑하고 증오해 마지않는 블루벨 꽃이, 모조리 뽑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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