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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02)화 (102/180)

102화

제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바꿔 이야기하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 자꾸 무의식중에 자신을 지칭하게 된 탓에 말을 더듬거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엘리아스가 의연하게 넘어가 준 덕분에 그렇게 당황하진 않았다.

“음, 그러니까……. 그 남자가 벨라의 친구에게 마음이 있는 건지 헷갈린다는 거네요. 같은 남자로서 제 의견이 궁금한 거고?”

“네, 맞아요.”

“내가 아는 사람들이랑 비슷하네요?”

엘리아스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은근히 말에 뼈가 있는 것 같았지만, 벨라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그런가요?”

돌아온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그는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 얘기라고 했으니까, 제가 아는 사람들 기준으로 생각해서 말해 줄게요.”

“네, 좋아요. 어떤 것 같아요?”

엘리아스를 빤히 바라보는 벨라의 눈빛에 작은 기대가 서렸다. 엘리아스는 옅은 한숨으로 입가의 미소를 지워 냈다.

“안타깝네요. 이미 친구가 그 남자에게 마음을 온통 뺏겨 버린 것 같아서.”

“……그게 안타까운 일인가요?”

“벨라, 설마 딱 한 번 잘해 줬다고 그게 본심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건…….”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딱 한 번 잘해 줬다, 라…….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야기한다고 했는데 결국 그렇게 들린 모양이다. 사실이었기에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그 친구한테 더 늦기 전에 마음 접으라고 전해 주세요.”

“……왜요?”

“그런 남자는 절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그저 필요에 의해 곁에 두는 것뿐이에요. 벨라도 잘 알잖아요.”

왜 다들 그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고 하는 걸까. 잔잔히 가라앉은 마음속에 황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은 그의 마음이 진심 같지?”

“하지만, 그에게 진심이란 건 없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아니?”

“너도 그의 손안에서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결국은 버림받을 거란 뜻이야. 두고 봐, 너도 끝엔 나처럼 될 테니까.”

누구도 타인의 마음을 단정 지을 순 없다고 생각하지만,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서 흔들리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서서히 변하는 중일지도 모르잖아요.”

벨라의 반박에 엘리아스는 옅게 조소했다.

“본성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아요.”

“본성은 그렇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그렇지 않잖아요.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해요. 누구는 빠르고, 누구는 느리고…….”

“그 남자도 느려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렇게 믿고 싶은 건 아니고요? 들어 보니 그 남자가 그렇게 우유부단한 성격은 아닐 것 같은데.”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뭐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사이 엘리아스는 빙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벨라는 참 착하네요. 이렇게 친구 일도 제 일처럼 고민해 주고.”

“……친한 친구라서요.”

“아무튼, 친구한테 그 남자를 너무 믿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아마 그 친구는 이미 알고 있을 거예요. 그 남자가 자신에게 진심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헛되게 기대하는 거예요. 그러니 벨라가 도와주도록 해요.”

마음 같아선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라 입안엔 씁쓸함만이 맴돌았다.

“고마워요. 그래도 엘리아스가 말해 준 덕분에 도움이 됐어요.”

벨라는 깊은숨을 내쉬며 답답한 마음을 가다듬었다. 물론, 좋은 대답만 나오길 바라며 고민을 털어놓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의 가면에 속아 넘어가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막상 마주한 벽 앞에서 마음이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진심은 대체 무엇일까.

“아, 그러고 보니 전에 한 번 찾아왔었는데 벨라가 없더라고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 사실, 일이 조금 생겨서 다른 곳에 있었어요.”

“무슨 일이요?”

엘리아스가 곧은 시선을 맞부딪치며 물었다. 벨라는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지난날 황궁 연회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이따금 눈가를 찌푸리며 이야기를 듣던 엘리아스는 끝에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런데 벨라는 괜찮아요?”

“네? 저요?”

“그날 연회 음식에 독이 들어 있었다는 건데, 벨라도 그날 무언가를 먹었을 거 아니에요.”

“아, 저는 괜찮…….”

당연히 괜찮다고 답하려던 벨라는 순간 멈칫거렸다.

그러게. 왜 괜찮지?

그 생각이 날카롭게 머릿속을 스쳤다. 물론, 그날 귀족들이 다 변을 당한 건 아니었으니 자신 역시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애초에 그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고, 남이 주는 거 덥석 받아먹지도 말고. 알아들어?”

겨우 술 한 모금 마신 걸로도 그에게 날 선 질책을 들었기 때문에 그 후로 음식은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선 음식에 든 독 때문에 변을 당하셨으니, 그는 그날 음식에 문제가 생기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거기까지 결론이 나자 잠시 생각이 멎었다. 가볍게 짚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 탓이다.

“……괜찮았어요. 그날 속이 좋지 않아서 음식을 먹지 않았거든요.”

“다행이네요.”

엘리아스는 가볍게 웃으며 제 머리에 손을 올려놓았다. 살짝 힘을 주는 것이, 일부러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려는 듯했다.

아, 또 갈 시간이 된 모양이다. 엘리아스는 이상하게 그가 오가는 순간을 보여 주지 않으려 했다.

“벨라, 부디 악마의 현혹에 넘어가지 않길 빌어요.”

엘리아스의 말이 깃털처럼 가벼이 내려앉았다. 곧이어 머리로 느껴지던 무게감이 사라지자 벨라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방 안은 다시 고요에 잠겼다.

이럴 땐 오히려 정적이 반가웠다. 벨라는 잠시 뭉쳐 두었던 생각의 실을 잡아 꺼내며 상념에 빠져들었다. 엉켜 있는 생각을 풀어내야 했다.

이후, 그날의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저희 아가씨가 잠시 폐하의 말동무를 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분명 그가 자신을 직접 황제의 곁에 두었다. 마치…… 일부러. 황제가 그런 일을 당하게 되면 가장 가까이 있던 자신이 제일 먼저 의심받게 되리라는 걸 분명 알고 있었을 텐데도.

애초에 황제 곁에 있지 않았더라면 그런 혐의를 뒤집어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한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만약 일부러 그랬다면 굳이 번거로운 일을 자처하게 되는 것인데, 대체 무엇을 위해서?

아무리 홀로 끙끙대며 생각해 본들 정확한 단서가 없으니 온갖 추측만 난무할 뿐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답답함에 입술을 짓씹던 벨라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르면 물어보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누구한테 물어보지.”

에릭은 눈치가 빠르니 이것저것 물으면 도리어 휘말릴 것 같고……. 소렐 부인도 그런 이야기는 쉽게 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아.”

문득, 제 방에 찾아와 이것저것 말해 주던 시에나가 떠올랐다. 벨라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이어 시에나를 만나기 위해 일단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어가진 못하고 입구에서 시에나를 찾으려 기웃대고 있으니, 그녀를 발견한 올리버가 다가왔다.

“아가씨, 주방까지 어쩐 일이세요? 뭐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의도치 않았다지만, 그러지 않아도 바쁜 요리사를 방해한 것 같아 벨라는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아니요. 그…… 시에나를 만나러 왔어요.”

그러자 올리버는 곧장 주방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시에나! 이리 나와 보렴. 벨라 아가씨께서 널 찾으셔.”

곧이어 시에나가 밝은 얼굴로 달려 나왔다. 밖에서 볼 땐 안 보이길래 찾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혹시 바쁘면 나중에 얘기해도 괜찮아.”

벨라의 말에 올리버는 눈짓과 몸짓을 통해 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오라는 듯 전하곤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럼요. 안 그래도 일하기 싫던 참이었어요. 아가씨가 제 구세주세요.”

벨라는 작게 웃고선 최대한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조용한 곳으로 시에나를 이끌었다. 해가 잘 들지 않아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한적한 정원이었다.

마주 앉은 둘 사이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시에나가 사뭇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 왔다.

“아가씨,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표정이 안 좋아 보이세요.”

“아니야, 그런 건 아니고……. 사실, 네게 묻고 싶은 게 생겨서 찾아왔어.”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제가 아는 것이라면 다 대답해 드릴게요.”

“혹시, 공작님께서 베른으로 언제 돌아가실 건지 얘기 들은 적 있어?”

“음, 이번엔 예정보다 일찍 가신다고 전에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일정이 바뀌셔서 좀 미뤄졌던 것 같아요.”

“미뤄진 건…… 연회에서 그 일이 있고 난 후겠지?”

마음속으로 제발 그렇다는 답이 나오길 빌었다. 그렇다면 괜한 의심이었다 치부하고 그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시에나는 별 고민 없이 부정의 대답을 내놓았다.

“아니요, 그 전부터 베른으로 가는 날을 미루셨어요.”

그 말인즉…… 연회가 있기 전부터 그는 어떠한 계획을 세웠다는 소리다. 불안한 마음이 점점 부풀어 너울졌다.

“……있잖아. 그럼 만약에 내가 연회에서 황제 폐하 곁에 있지 않았더라면, 그 일에 휘말리지 않았더라면 공작님께선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으셨겠지?”

어렴풋이 답을 알고 있음에도, 그래도 작은 희망을 놓지 못해 굳이 물었다.

“아무리 공작님께서 막강한 권력을 쥐셨다지만 굳이 황실 일까지 나서실 필요는 없으니…… 아마 황실에서 자체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졌을 거예요.”

“……그렇겠구나.”

벨라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자, 시에나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그 덕분에 제대로 된 범인을 잡았잖아요. 공작님께서 나서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반역자의 손에 제국이 넘어갔을 거예요. 반역을 막는 데에 큰 공을 세우게 되셨으니, 공작님의 위세가 더욱 강해진 계기도 되었고요. 아가씨 때문에 고생한 것이 아니니 너무 마음 쓰지 마셔요.”

반역을 막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라……. 어쩌면 그는 제 생각보다 더 앞을 내다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흐릿했던 불안이 점점 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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