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별로 특별한 것을 하지도 않았는데, 이따금 하늘을 보면 해가 성급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구름 사이로 쏙 숨어 버리면 날씨가 흐려지곤 하는 탓에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졌다.
“에이든! 이것 좀 창고에 옮겨 놓으라고 몇 번을 말하니!”
“오늘은 즉위식이잖아요. 쉬어야 하는 날이라고요.”
“하! 새로운 폐하께서 즉위하시는 게 대체 너랑 무슨 상관이라고?”
“왜 상관이 없어요?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까지 일을 했다간 새로운 폐하께서 슬퍼하실 거라고요! 광장에 다녀올 테니 저 찾지 마세요!”
“어휴, 내 팔자야!”
거리의 잡화점에서 뛰쳐나온 청년이 어디론가 날쌔게 달려갔다. 그 모습에 벨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즉위식 날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명색이 중심가인데, 생각보다 한가한 것도 그 때문인 듯했다.
“공작님, 정말 안 가 보셔도 돼요?”
“그건 네가 걱정할 게 아니야.”
“저 때문에 괜히 시간 뺏기시는 걸까 봐 걱정돼서요.”
“그럼 지금이라도 저택으로 돌아갈까? 밤늦은 연회까지 다 참석하고 올 테니까, 얌전히 방 안에 틀어박혀서 기다릴래?”
“……아니요. 그건 싫어요.”
“싫어?”
그가 실소를 머금은 채 되물었다. 그렇다고 차마 갇혀 있는 게 좋다는 소리는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의 압박이 버거웠던 탓에 벨라는 슬쩍 눈을 피하며 대답을 뭉그러트렸다.
“음…….”
그러다 마침 저 멀리 보이는 광장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말 돌리기 딱 좋은 핑곗거리였다. 벨라는 얼른 손가락을 뻗었다.
“광장에서 무슨 행사가 있나 봐요. 저것 좀 보세요. 사람들이 엄청 모여 있어요.”
물론, 그가 순순히 넘어갈 상대는 아니었다.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빤히 저만 내려다보는 시선에 덜컥 숨이 막혔다. 호기롭게 뻗었던 손가락이 멋쩍게 곱아들었다.
벨라는 슬쩍 그의 눈을 마주하며 부스스 웃어 보았다. 의외로 이런 게 통하는 건지, 그는 짧게 헛웃음을 내비치곤 이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었다.
손길에 묵직한 힘이 실려 있었다. 오늘 그가 발휘한 인내심의 무게인 듯했다. 다행히 벨라는 그의 화를 달랠 방법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공작님, 이 꽃 정말 마음에 들어요. 저택에 가면 예쁜 화병에 꽂아 두었다가 베른에 돌아갈 때 가져갈래요.”
“화병을 여러 개 주문해 놓을 테니 보고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네.”
결국 그에게서 평소와 같은 대답을 듣고 나서야 벨라는 얕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나니 뒤늦게 다시금 광장으로 관심이 쏠렸다.
“다들 모여서 뭘 하는 걸까요?”
“음유 시인이 왔나 보네.”
그 말에 벨라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음유 시인이라니. 들어는 봤지만 음유 시인이 오는 날이면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이기에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그럼 저기서 노래하는 거예요?”
“허무맹랑한 이야기나 늘어놓겠지.”
벨리아르가 귀찮은 기색을 내비치며 답했다. 그는 대체로 음유 시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대의 이야기를 전한답시고 제멋대로 상상을 더해 사실을 와전시키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제 형제는 애처로운 신이 되었고, 저는 잔혹한 악마가 되지 않았나.
“저도 들어 보고 싶어요.”
“앞장서.”
그는 흔쾌히 허락하며 벨라를 제 앞에서 걷게 두었다. 옆에 두는 것보다 모습이 곧장 보이니 그로서는 편하고 만족스러운 위치였다.
벨라는 모여 있는 사람들 주위로 조심스레 자리를 잡았다. 노래하는 음유 시인의 모습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맑은 노랫소리는 뚜렷하게 들려오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긴 노랫소리에 빠져들 무렵, 많은 사람 사이로 그녀의 눈길을 잡아끄는 뒷모습이 있었다. 고작 뒷모습일 뿐이었으나 순간적으로 누군가가 떠올랐다. 벨라는 저도 모르게 그리운 친구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안?”
순간, 자신의 뒤에 그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불쑥 발을 뗐다. 그러나 두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곧장 팔을 붙잡혔다.
“벨라.”
“……아.”
나직한 음성이 사슬처럼 온몸을 휘감았다. 그제야 급격히 현실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붙잡는 것이 없었다면 그녀는 하염없이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팔을 붙잡은 손에 점점 힘이 실렸다.
“조금 풀어 주니까 또 주제 파악이 안 되지.”
“……죄송해요.”
멍하니 대꾸하면서도 벨라의 머릿속엔 이안을 닮은 뒷모습이 짙은 잔상으로 남아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 * *
내일이면 수도를 떠나 다시 베른으로 돌아간다. 무언가 아쉬우면서 기쁘고, 또 허탈하기도 한 감정이 한데 섞여 뭉글한 마음을 피워 냈다.
베른에 돌아간다고 해서 딱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없었다. 에릭은 필요한 것들을 미리 챙겨두 라고 했지만, 그건 조금 짓궂은 조언이라고 생각했다.
이 방 안에 제 것이 얼마나 된다고. 세어 볼 필요도 없었다. 고작 어머니의 손수건 하나였으니까. 아, 그리고 그가 사 준 꽃다발도 가져가야지.
“그래 봤자 두 개뿐인데.”
벨라는 홀로 불퉁하게 중얼거리며 서랍을 열었다. 살짝 두툼하게 접혀 있는 손수건을 보자마자 또 하나 챙길 것이 불쑥 떠올랐다. 이걸 잊고 있었다니.
벨라는 문 쪽을 흘끗 살핀 뒤, 접혀 있던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젖혔다. 엘리아스가 새를 통해 보내 준 그림엽서가 어느덧 여러 장이 되었다.
“그래도 세 개나 되네.”
헤버튼에서 도망쳐 나올 땐 고작 손수건 하나였으니까, 나름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러니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나아진 것이라고 멋대로 결론지었다.
벨라는 가장 위에 놓인 엽서를 집어 들었다. 며칠 전 그와 거닐었던 라베스 지역의 중심가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그림 속에도 꽃집이 있었다.
그가 주었던 추억을 떠올리는 벨라의 뺨이 옅은 선홍색으로 물들어 갔다. 비록 저택으로 돌아올 때 그가 조금 화를 냈지만, 그래도 그때의 즐거운 기억이 퇴색되진 않았다.
이성을 되찾고 생각해 보니 이안을 만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괜히 제 불행이 그에게 옮겨붙을 뿐이다.
벨라는 협탁 위에 놓인 파란 꽃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러다 엽서의 그림을 한 번 보고, 또 꽃을 보고.
눈에 담은 건 꽃과 그림인데 머릿속에 떠다니는 건 오롯이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의 모습뿐이었다. 참 이상하게도.
“직접 가 보고 싶지 않아요?”
불쑥 들리는 말소리에 벨라는 조용히 뒤를 돌아보았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겨울바람을 한껏 머금은 엘리아스가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엘리아스.”
벨라가 살풋 웃으며 태연히 인사를 건네자 엘리아스는 대놓고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 안 놀라요?”
“이쯤 되면 안 놀랄 때 됐잖아요.”
뭐든 여러 번 반복되면 어떻게든 적응하는 법이다. 엘리아스가 하도 불쑥불쑥 나타나니 이젠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 말을 걸어도 별로 놀랍지 않았다.
“그래도 좀 놀라 주면 안 돼요? 그러니까 재미가 없는데…….”
“다음엔 노력해 볼게요.”
“네, 그래 주면 고맙겠어요.”
그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벨라는 또 한 번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문 쪽을 흘끗 살피곤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여기는 정말 직접 가 본 거예요?”
“티무랑 같이 여행 다니는 게 취미거든요.”
“티무요?”
“내 새요.”
작고 노랗고 동글동글한 새. 벨라는 매번 엽서를 가져다주고 빵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가는 사랑스러운 새를 떠올렸다.
“아, 그 새 이름이 티무였구나.”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요,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부정하기엔 기분 좋은 일들이 있었던 건 사실이라 조금 양심에 찔렸다. 그래서 말끝을 흐리며 쑥스러운 미소를 내비쳤다. 그러자 엘리아스의 눈매가 장난스럽게 가늘어졌다.
“표정이 수상한데.”
“전혀요. 전혀 안 수상해요.”
“지금 벨라 표정이 딱 어떤지 알아요?”
“……어떤데요?”
어떨까. 다른 사람의 눈에 지금 제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무척 궁금하기도 했다. 별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긴장과 설렘이 서서히 차올라 격동했다. 해서 짧은 순간, 벨라는 엘리아스에게서 나올 대답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되게 행복해 보여요.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아…….”
역시, 그렇구나. 예상하던 대답을 들었을 뿐인데 사형 선고라도 들은 것처럼 심장이 쿵 무너져 내렸다.
벨라의 표정이 사뭇 가라앉자 엘리아스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러면 보통 부끄러워하는 게 맞지 않나? 그렇게 슬퍼지는 게 아니라.”
제 일방적인 감정일 게 뻔하니까. 아무리 그가 자신을 예뻐해 주고 안고 잘해 준다 한들,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더군다나 그라면 더더욱…….
과연 그가 제게 주는 것들이 사랑이라는 찬란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일까.
스스로 던진 물음에 섣불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수없이 이어지는 질문들이 답을 얻지 못한 채로 서로 부딪쳐 엉켰다.
그러다 엘리아스와 눈이 마주치자 언뜻 빛이 비치는 듯했다. 그 역시 남자니까, 저보단 조금 더 알지 않을까?
“……엘리아스, 혹시 누군가 좋아해 본 적 있어요?”
“네, 있죠.”
“그럼 혹시 고민 하나만 들어 줄 수 있을까요? 아, 제 이야기는 아니고…… 제 친구 얘기예요.”
이제 와서 친구 이야기라고 발을 빼기엔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대놓고 이야기하기엔 너무 쑥스러웠다.
엘리아스는 흥미로운 얼굴로 벽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본격적으로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재밌을 것 같네요. 해 봐요.”
벨라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