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네? 데이…… 뭐라고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그녀가 고개를 홱 들며 말을 더듬었다. 데이트라니. 아니, 그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지만…….
벨리아르가 살며시 웃자 그녀의 얼굴이 빠르게 달아올랐다.
“아니,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아니야?”
“……네, 아니에요.”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떨군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엔 그와 여느 연인들처럼 다정하게 데이트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그에게 들킬까 봐 괜한 조바심이 들었지만, 치우고 싶진 않은 상상이었다.
그사이 벨리아르의 입가에 스며 있던 미소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를 한 번 훑어내린 나른한 눈빛이 텅 빈 머그잔으로 내려앉았다.
“다 마셨어?”
“네.”
그는 잔을 다시 협탁 위에 올려놓곤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바짝 끌어당겼다.
벨라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허벅지 위쪽으로 앉은 탓에 지금 어떤 상황인지 확연히 알게 되었다. 끝내 사뿐히 내쉰 숨으로 더운 열기가 샜다.
“벨라, 팔 어떻게 해야 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벨라는 조용히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는 등을 한 번 도닥여 준 뒤, 다른 손으로 그녀의 코를 잡아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순간 당황한 그녀가 그의 손을 떼어 내려 하자 곧바로 질책이 날아왔다.
“가만있어야지. 손 내려.”
그럼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벨라는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내쉬기 시작했고, 그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곧이어 숨이 드나드는 입마저 입술로 막아 버렸다.
완전히 숨길이 막혀 버린 탓에 벨라는 더욱 그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벨리아르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번졌다.
벨라는 그가 내어 주는 숨이 극히 달고 소중해 오로지 그것을 받아 내는 것에만 집중했다. 잠시 후 벨리아르가 잡고 있던 코를 놓아주며 어르듯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의 입술이 멀어지자 벨라는 격하게 움직이기라도 한 것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벨리아르는 촉촉하게 들뜬 그녀의 입술에 가벼이 입을 맞춘 채 물었다.
“벨라, 뭐 하고 싶다고?”
“……밖에, 구경 가고 싶어요.”
그가 통통하게 부어오른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 아프진 않았지만, 어깨가 흠칫 튈 만큼의 경고 정도는 되었다.
“똑바로 말해야지.”
“공작님이랑요. 남들처럼 아무 걱정 없이 돌아다니고,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싶어요. 그, 남들 하는 데이트처럼…….”
최대한 자세히 말한다고 했는데, 역시 ‘데이트’라는 단어가 주는 부끄러움은 상당했다. 결국 끝까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의 어깨로 고개를 묻어 버렸다.
기어코 원하는 것을 얻어 낸 벨리아르는 그녀를 침대로 눕히고선 목 아래로 팔을 받쳐 주었다. 작은 몸을 품 안 가득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서 기분 좋은 나른함이 퍼졌다.
“그래. 그러려면 오늘 일찍 자야겠지.”
“……내일, 나가게 해 주시는 거예요?”
“잘 자고 일어나면.”
그의 말에 벨라는 눈을 꼭 감고서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에게선 늘 그와 닮은 향이 풍겼다. 조금 나지막하고 권태로운, 숨에 섞여 들어와 지그시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향이었다.
그 느낌이 도리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잠이 오지 않아 새벽 내내 뒤척였던 평소와 달리, 금세 수마가 덮쳐 왔다.
그러나 그녀를 탐내는 건 수마뿐만이 아니었다. 거의 잠에 빠져들 무렵, 치마를 들치고 불쑥 올라오는 손이 있었다.
흠칫 놀라며 눈을 뜨자마자 짙붉게 일렁이는 눈동자에 사로잡혔다. 그는 달아오른 손으로 그녀를 지분거리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왜?”
그는 가끔 말과 행동이 엇나갔다. 벨라는 달빛조차 흐릿한 어두운 창밖을 흘끗 보며 불퉁하게 토로했다.
“……일찍 자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지금도 시간이 늦었어요.”
이러다 혹시 내일 늦게 일어나면 그것을 빌미로 밖에 데려가 주지 않을까 봐 걱정이 들었다.
“그래. 너는 자려고 노력해. 나는 내 할 일을 할 테니까.”
그는 태연하게 말하며 벨라의 목으로 입술을 묻었다. 애초에 방으로 불러들인 순간부터 일찍 재울 생각 따윈 없었다.
* * *
쨍하게 해가 스며드는 방 안, 벨라는 이른 시간부터 거울 앞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벽에 기대선 채 벨라를 지켜보던 벨리아르는 점점 인내심에 한계가 오고 있음을 느꼈다. 저따위 목걸이가 뭐라고 저리 열심히 고민할까.
한 손에 각각 든 목걸이를 수십 번씩 목에 대 보며 고민하는 꼴을 고스란히 보고 있자니 급격히 답답함이 차올랐다. 결국, 한마디를 내던지곤 성큼성큼 다가갔다.
“오른손에 든 걸로 해.”
“이게 더 마음에 드세요?”
벨라가 오른손에 든 목걸이를 들어 보이며 물었으나, 그는 말없이 손에 들린 목걸이를 채가 직접 그녀의 목에 걸어 주었다. 세상 쓸데없는 고민을 이렇게 오래 할 줄 알았더라면 진작 이리했을 텐데.
그는 자신이 준 붉은 반지가 끼워져 있는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반지도 낄 거야?”
“아니요. 이것만 낄 거예요.”
“그래, 그래야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벨리아르는 그녀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더 이상 꾸물거리는 꼴을 봤다간 제 더러운 성질머리를 어찌하지 못할 것 같았다.
오늘은 최대한 벨라에게 부드럽게 대하기로 다짐한 날이었다. 그건 마음속에 먼지처럼 묻어 있는 죄책감을 말끔히 털어 내 버리기 위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젯밤, 거의 동이 트기 직전에 잠든 탓에 몸이 피곤한 건 숨길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하품이 새어 나왔다. 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그의 눈길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졸려? 들어가서 쉴래?”
이럴까 봐 몰래 하품한 건데. 그가 넌지시 물은 말에 벨라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저 정말 괜찮아요. 지금 너무 좋단 말이에요.”
“그래. 그래도 언제든 못 버티겠으면 얘기해.”
“네, 알겠어요.”
몇 달 동안 그를 지켜보며 몇 가지 깨달은 것들이 있었다. 그중 오늘도 여실히 느껴지는 건, 그는 자신을 밖에 내놓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에게선 오늘도 내키지 않는 것을 꾸역꾸역 참고 있는 듯한 느낌이 확연히 풍겼다. 예전에 소만에서도 그랬다.
“그런데…… 누가 알아보면 어떡해요?”
“대체 누가 알아볼까 봐 걱정인데?”
“사람들이요. 혹시나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나면 어때.”
오늘 벨라는 여느 숙녀들처럼 평범한 프릴 장식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붉은색이라 눈에 확 띄긴 하지만, 귀족적인 차림은 아니었다. 그 역시 편한 차림이었다. 보필하는 사람도 없으니 지나쳐 가는 사람들 눈엔 그저 부잣집 부부처럼 보였다.
그러나 간혹 그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놀라며 수군댔으나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도리어 벨라의 상태를 보며 의외라는 듯 물었다.
“오늘은 눈 신경 안 쓰여?”
“이상하게 공작님이랑 같이 있으니까 좀 괜찮은 것 같아요. 그렇다고 아예 신경 안 쓰이는 건 아닌데…… 그래도 오늘은 최대한 즐기려고요.”
오늘은 그가 주는 선물과 같았다. 그런 날마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망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곁에 있기 때문인지 그리 걱정이 들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내가 있는 한 네가 걱정할 건 없어. 넌 그저──.”
“공작님 곁에만 잘 붙어 다니면 되는 거죠?”
벨라는 그의 말을 가로채며 말갛게 웃었다. 벨리아르는 잠시 황당해하는 듯하더니 결국 풀어지듯 웃고 말았다.
“그래, 착하네.”
둘이 거닐고 있는 곳은 수도 애플리던에서 공작 저가 있는 라베스 지역의 중심가였다. 풍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베리치 강을 품고 있어 나름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딜 가든 은은하게 강 냄새가 풍겼다. 그 사이로 가끔 향긋한 냄새가 섞여들곤 했는데, 조금 더 가다 보니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소담한 꽃 가게를 발견한 벨라는 그에게 불쑥 청했다. 다분히 충동적인 물음이었다.
“공작님, 저 꽃 한 송이만 사 주시면 안 될까요?”
“꽃은 왜?”
“옛날에 마을에 갔을 때 어떤 애가 엄마가 사 준 꽃 한 송이를 받아 들고 너무 행복하게 웃더라고요. 그게 부러워서……. 되게 예뻤거든요.”
그 아이든 꽃이든, 모든 것이 다 예뻐 보였다.
“수도의 저택이든 베른의 성이든 사방에 널려 있는 게 꽃인데 뭐가 부러워.”
그는 중얼거리듯 타박하면서도 꽃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벨라는 정말 꽃을 사 주려나 하는 기대에 설레는 마음으로 색색의 꽃들을 둘러보았다.
활짝 피어 있는 꽃만 봐도 기분이 좋아져 웃고 있는 사이, 잠시 후 그가 품으로 무언가를 불쑥 안겨 주었다.
벨라는 제 손에 들린 꽃다발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순간 말을 잊고 말았다. 파란색, 언뜻 보면 보라색으로 보이기도 하는 꽃이 수십 송이였다. 한 송이도 아니고, 수십 송이. 기대한 건 그저 꽃 한 송이였는데.
“……저 주시는 거예요?”
“그럼 가져가서 에릭 줄래?”
“……감사합니다.”
벅차도록 기쁜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는 벨라의 뺨이 옅은 선홍색으로 달아오르는 것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잘 어울리네.”
그를 따라 조금 걷다 보니 서서히 기쁨이 꽃망울을 터트렸다. 앙증맞게 피어 있는 파란색 꽃이 사랑스러웠고 코끝으로 스미는 은은한 향이 행복감을 고조시켰다.
“공작님, 이 꽃 향이 너무 좋아요. 맡아 보실래요?”
“됐어.”
“무슨 꽃인 줄 아세요? 너무 예뻐서 알아 두고 싶은데.”
“나중에 에릭한테 물어봐.”
“에릭 경께서 꽃 이름도 알까요?”
“물어보면 알아 오겠지.”
그녀답지 않게 옆에서 끊임없이 쫑알거렸다. 기분이 좋을수록 말이 많아지는 모양이었다. 기쁨에 들뜬 얼굴로 배시시 웃는 모습을 보며 벨리아르는 덩달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좋아?”
“네, 너무 좋아요.”
“그건 한 송이보다 훨씬 많으니까, 이제 그 기억은 잊어버려.”
“네.”
그 한 송이에 대한 부러움은 잊고, 그 빈자리에 지금의 기쁨이 들어찰 것 같다. 벨라는 그와 거리를 거니는 내내 꽃다발을 소중히 품에 안고 다녔다.
평소보다 훨씬 재잘거리는 말이 많았고, 입가의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지금까지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무조건 오늘을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