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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99)화 (99/180)

99화

울타리 바깥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벨라의 세상은 늘 평온했다. 창밖에 비치는 잔잔한 물결 위로 이따금 치치가 떠올랐지만 이젠 서서히 흘려보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잘하고 있어요, 아가씨.

아직 치치의 목소리가 또렷해서 다행이다.

곧이어 똑똑, 하고 소심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닫힌 문 너머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호박파이 드실래요?”

벨라는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마자 달콤하고 고소한 빵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덩달아 그녀의 얼굴로 미소가 스몄다.

“시에나.”

“우유도 따뜻하게 데워 왔어요.”

“어서 들어와.”

“일찍 뵈러 오고 싶었는데,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어요.”

시에나는 능숙한 손길로 테이블 위에 가져온 음식을 차렸다. 고요하던 방 안이 금세 훈훈한 온기로 들떴다.

“오늘은 괜찮았어?”

“네, 오늘은 공작님께서 외출하셨거든요.”

“공작님이 그 넘어야 할 산이야?”

“아주 거대한 산맥이죠. 제힘으로는 넘을 수 없어서, 산맥님이 지나가시길 기다렸답니다.”

시에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너스레를 떨자 벨라는 즐거운 듯 웃음을 내비쳤다.

아직 점심을 먹기엔 살짝 이른 시간, 시에나의 깜짝 방문으로 벨라는 얼떨결에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에나, 너도 앉아. 같이 먹자.”

그러자 시에나는 “그럴까요?” 하며 냉큼 맞은편에 앉았다. 소렐 부인이 봤다면 또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것이 분명했다. 벨라는 조용히 웃으며 포크를 쥐었다.

“아가씨,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저희가 며칠간 얼마나 마음 졸였다고요.”

“별일 아니었어. 그냥 작은 해프닝이었을 뿐인데, 뭐.”

“그게 어떻게 큰일이 아니에요! ……너무 속상해요. 우리 아가씨 얼굴이 어쩌다가.”

시에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벨라의 얼굴을 살펴보다 잔뜩 울상지었다. 그래도 전보다 많이 나아진 상태라 벨라는 멋쩍게 웃으며 손으로 뺨을 가렸다.

“정말 별거 아니야. 괜히 멍이 커 보여서 그렇지, 별로 아프지도 않았어.”

아무리 말로 달래 봐도 시에나의 표정은 쉽사리 풀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깊은 한숨을 푹푹 내쉴 때마다 벨라는 습관처럼 웃어 보였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속상해하는 것이 낯설었던 탓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잘 몰랐다.

“처음에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안아 들고 돌아오셨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처음 듣는 소식의 벨라의 눈이 조용히 커졌다.

“……공작님께서 날 안고 오셨다고?”

“그뿐일까요? 그 뒤로 깨어나실 때까지 쭉 곁에서 지켜보고 계셨어요.”

“그건…… 몰랐어.”

솔직히 시에나의 말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그럴 분이 아니신데. 마치 그가 자신을 정성스레 간호라도 했다는 것처럼 들렸다.

“나한테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다 똑같아. 쓰다가 망가지면 버리면 그만이야.”

……정말 그럴 분이 아니신데.

그가 자신을 걱정했다는 사실만으로 신기한데, 깨어날 때까지 곁을 지키고 있었다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가씨를 빨리 빼내 오시려고 공작님께서 정말 애쓰셨어요. 원래도 일을 많이 하시긴 했지만 그땐 밤낮을 가리지 않으셨다니까요.”

“……그랬어?”

“그럼요. 겉으로 내색은 안 하셔도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얼마나 아끼신다고요.”

분명 기뻐야 할 말인데, 이상하게 마냥 기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밤낮으로 애썼다. 여기서 묘한 위화감이 풍겼다. 대체 이유가 뭘까.

살짝 찝찝한 것이……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잊은 듯한 느낌이었다. 순간 상념에 빠져들려는 그녀를 깨운 건 시에나의 발랄한 목소리였다.

“하여튼, 이렇게 해결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가씨께서는 곧 베른으로 돌아가시겠죠?”

“응, 아마도.”

곧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이 열릴 것이고, 그것마저 끝나면 더 이상 수도에 볼일이 없을 테니 베른으로 돌아갈 것이다. 시에나의 얼굴로 깊은 아쉬움이 드러났다.

“벌써 정이 많이 들었나 봐요. 생각만 해도 너무 아쉬운데 어쩌죠?”

수도에서 있었던 일은 아마 아픈 추억으로 남겠지만, 그래도 이곳의 사용인들은 꽤 그리울 것이다.

베른의 성은 마치 색을 잃은 곳 같았다. 고요하고 쓸쓸한, 그래서 다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수도에서 이런저런 일에 휩쓸리다 보니 그 적막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나중에 또 보러 올게.”

벨라는 옅게 웃으며 시에나의 손을 맞잡았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나러 오고 싶은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정말요? 꼭 오셔야 해요. 사실 소렐 부인께 살짝 여쭤봤거든요.”

“무엇을?”

“저도 아가씨 따라서 베른에 가면 안 되냐고요. 그런데 단호하게 그건 절대 안 된다고 하셨어요.”

벨라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었지만, 그건 시에나에게 별로 행복한 일이 아닐 것 같았다. 밝고 활달한 그녀에겐 사람들 많고 활기찬 애플리던이 어울렸다.

“음……. 가서 편지는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베른에 가서 그의 기분이 좋아 보일 때 살짝 말해 봐야겠다. 시에나에게 편지 보내는 것쯤은 허락해 주지 않을까.

“그러면 저야 너무 기쁘지만……! 아가씨께서 귀찮지 않으시다면요.”

“전혀 귀찮지 않아. 그래도 너무 기다리진 마. 혹시나 못 보낼 수도 있어.”

“그럼 제가 보낼게요. 답장은 안 해 주셔도 돼요.”

“그래.”

이후로도 시에나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얘기하면서 먹다 보니 어느새 접시가 바닥을 보였다.

“호박파이 좀 더 가져올까요?”

시에나가 싱긋 웃으며 묻자, 벨라는 덩달아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자.”

* * *

달 밝은 깊은 밤이었다. 모두 잠들었는지 저택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벨라는 괜히 발소리를 죽이며 복도를 지나 방문 앞에 다다랐다. 벨리아르의 침실이었다.

이리 늦은 시간에 갑자기 부른 이유가 짐작되지 않아 긴장이 일었다. 짧게 심호흡을 하고서 노크하자마자 곧바로 그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들어와.”

당연히 소파에 있을 줄 알았던 그가 웬일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잠시 당황한 사이, 그가 제 옆을 손으로 툭툭 치며 불렀다.

“이리 와.”

조심스레 곁으로 다가가자 그는 벨라의 허리를 휘감아 제 무릎에 앉혔다. 어느 정도 예상했었기에 벨라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열기가 오른 탓에 벨라는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옷을 들쳐 보며 몸 여기저기에 난 상처를 확인했다. 멍은 거의 빠졌지만, 대신 그 자리에 그가 새겨 놓았던 흔적이 불긋하게 남아 있었다.

아무리 그라도 스스럼없이 몸을 내보이는 건 상당히 부끄러웠던 탓에 그녀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가 따끈한 뺨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아직도 아파?”

“아니요, 많이 괜찮아졌어요. 지금은 거의 안 아파요.”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협탁에 올려져 있던 머그잔을 내밀었다. 따끈하게 데워진 우유였다.

“마셔.”

잔에 입을 대자 적당한 온기가 스며들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따뜻한 우유를 마시는 순간 나른하게 풀어지는 느낌이 났다.

그는 우유를 마시는 벨라의 모습을 바라보며 허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우유는 메마른 장작이고 그의 눈빛과 손길은 뜨거운 불씨 같았다. 금세 온몸에 열이 올라 눈두덩이까지 뻑뻑해졌다.

“내일은 시간 비울 건데, 하고 싶은 거 있어?”

벨라는 혀끝에 남은 우유의 고소함을 삼키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물음이 상당히 생소한 탓이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맞춰 주다 곧이어 그녀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겼다.

“내가 물었으면 대답해야지.”

“내일 즉위식 아니에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묻는 말에 벨리아르는 조용히 입꼬리를 휘었다. 평소 같으면 버릇없이 되묻는다고 나무랐겠지만, 오늘은 퍽 기분이 좋으니 너그러이 넘어가기로 했다.

“맞아.”

“그런데 시간을 비우신다고요?”

“왜? 안 될 이유가 있나? 내가 즉위하는 것도 아닌데.”

할까? 그가 나지막이 덧붙이자 벨라는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상하게 조금 무서운 말이었다.

“그럼 내일 제가 하고 싶은 거 해 주시려고요?”

“들어 보고.”

“음…….”

갑작스럽게 주어진 기회에 그녀의 머릿속이 혼잡해졌다. 바로 딱 떠오르는 게 있긴 한데, 입 밖으로 꺼내기엔 조금 망설여지는 것이었다.

“바다 보러 갈까? 저번에 보고 싶다고 했잖아.”

“아니요. 그건 조금 아까워요.”

지나친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바다는 여유롭게 가 보고 싶었다. 긴 여행처럼.

“그럼 내일 즉위식 기념 연회 있는데 참석할래? 너 무시하던 것들 다 끌어와서 네 앞에 무릎 꿇려 줄 수 있는데.”

귀족들이 제 앞에 무릎 꿇는다고 해서 기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리 거창하고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건 싫어요. 저는 그런 거 말고…….”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일까.”

“공작님께서 화내실 것 같아요.”

벨라는 눈을 내리깔고서 괜스레 머그잔만 만지작거렸다. 그가 나직이 웃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는 벨라의 손을 감싸 쥔 채 손가락 위를 살살 쓸어내렸다.

“나 지금 되게 기분 좋은데. 이럴 때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나긋한 목소리로 말하니 왠지 다 들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 나가고 싶어요.”

슬쩍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하니, 그는 곧이어 짧게 헛웃음을 내비쳤다.

“안 돼.”

순식간에 음성이 낮아졌다. 그녀의 손을 감싸 쥔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 나가는 건 안 되지. 에릭 붙여 달라고 해도 그건 안 되니까 더 이상 말 꺼내지 마.”

그가 무언가 잘못 받아들인 것 같다. 벨라는 작게 손을 내저으며 입을 뗐다.

“……아니요, 공작님.”

“벨라.”

그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했으나 벨라는 다급히 핵심을 덧붙였다.

“공작님이랑요. 공작님이랑…… 가고 싶다는 말이었어요. 둘이서요.”

그는 조용히 벨라를 응시했다. 더 이상 말 꺼내지 말라고 했는데 무시하고 밀어붙였으니 화를 내는 건 당연했다. 벨라는 뒤늦게 입을 다물며 고개를 떨궜다. 조용히 내려앉는 시선이 너무 버거웠다.

“……죄송해요.”

그러나 뒤이어 귓가로 감겨드는 목소리는 어쩐지 전과 다르게 즐거워 보였다.

“벨라, 지금 나한테 데이트 신청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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