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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98)화 (98/180)

98화

레오니스의 소재를 알아내는 건 더없이 쉬운 일이었다. 플뢰르 백작의 목에 직접 칼을 들이미니 묻기도 전에 입이 술술 움직였다.

“서, 서쪽으로 난 산맥을 따라 움직이면 되네! 황태자 전하의 몸이 성치 않으니 그,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네!”

빠르게 입을 연 건 현명한 선택이었지만, 그를 ‘황태자 전하’라고 칭하지만 않았다면 더욱 완벽했을 것이다.

에릭은 주저하지 않고 검으로 백작의 목을 베었다. 감히 반역자의 도주를 도왔으니 마땅한 처사였다.

플뢰르 백작의 말대로 에릭은 기사들을 이끌고 서쪽 산맥을 따라 레오니스의 자취를 쫓았다. 확실히 그 몸으로 빠르게 도망가는 건 무리가 있었기에 머지않아 꼬리를 밟을 수 있었다.

짧은 추격 끝에 그를 지키던 호위 기사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레오니스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그는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도 에릭을 쏘아보며 이를 빠득 갈았다.

“네놈이 결국은…….”

왼손으로라도 칼을 쥘 수는 있겠지만, 한 손으로 에릭을 상대하는 것은 매우 미련한 짓이었다. 온몸이 성했다면 도박이라도 해 볼 텐데, 이런 상태로는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레오니스 역시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기에 곧 길게 숨을 내쉬었다. 결국, 동아줄처럼 쥐고 있던 검이 땅으로 떨어졌다.

“……죽여라.”

체념하며 지그시 눈을 감는 레오니스를 보며 에릭은 대놓고 조소했다. 어렸을 때부터 제 주인이 늘 하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 자비는 최대한 고통 없이 깔끔하게 죽여 주는 거지. 그보다 더한 자비가 있을까.”

애초에 살려 준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미안하지만, 난 네게 자비를 베풀어 줄 생각이 없어. 네 말대로 주인을 닮아서.”

에릭은 제 태생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고귀한 황가의 핏줄을 이어받았으나, 그것이 천한 핏줄과 섞이면 평민보다 못한 비참한 태생이 된다는 것을.

아버지, 아니 황제는 어머니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며 둘을 머나먼 북쪽 도시에 숨겨 두었다. 말이 지킨다는 거지 유폐와 다름없었다. 황후와 황태자에게 존재를 들키기 싫어서 그리했겠지만, 비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차후에 제 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레오니스는 절대 에릭을 살려 두려 하지 않았다. 잔뜩 화가 난 황후 역시 힘을 보탰기에 힘없는 모자는 살아남는 것만으로 벅찬 환경에 몰렸다.

그리고 어느 날, 성인식을 몇 년 앞두었던 레오니스는 수많은 기사를 이끌고 모자가 숨어 있는 곳으로 들이닥쳤다.

“오웬,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절대 뒤돌아보지 않고 뛰는 거야. 약속할 수 있지?”

“……싫어요. 어머니와 같이 있을래요.”

“네가 무사히 빠져나가야 이 어미를 살릴 수 있어. 베른까지만 가면 돼. 그곳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지? 거기까지만 도망가렴, 아가.”

“하지만……!”

“시간이 없어! 어서!”

어렸던 그로서는 단호한 어머니의 외침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베른, 그곳엔 이름 없는 악마가 산다 했다. 황제조차 제 인형처럼 부린다는 제국의 실세. 그에게 도움을 청할 수만 있다면…….

그래야 어머니를 살릴 수 있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뛰었으나, 딱 한 번 뒤돌아보았을 때 목격한 건 레오니스의 손에 처절하게 죽임을 당하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에릭은 그 모습을 보고선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베른을 향해 달려갔다. 머릿속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 황태자에게 복수할 것이다.

“이름이 뭐지?”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좋아. 오늘부터 네 이름은 에릭 아데인이다. 어때, 마음에 들어?”

“……예, 주인님.”

그날로 오웬은 죽었다.

에릭은 너무 오래 파묻혀 있어 해져 버린 이름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나, 지금 생각해 보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수백 번 그날로 돌아가더라도 먼 훗날의 복수를 택할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오웬을 죽이리라고.

에릭은 날카롭게 벼려진 검을 쥐고서 천천히 레오니스의 앞으로 다가갔다.

“공교롭게도 오늘이 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다. 그러니, 너는 그 대가를 치러야지.”

천천히,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최대한의 고통을 안겨 줄 생각이었다. 그러려고 수많은 기술을 터득해 왔으니까.

에릭이 레오니스의 머리를 들고 돌아온 건 사흘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벨리아르는 굳이 에릭에게 몸은 어쨌냐고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뻔했기에.

* * *

벨리아르는 벨라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고 판단했을 때 프리스틴이 있는 황궁 지하 감옥으로 데려가 주었다.

벨라가 조용히 철장 앞으로 다가가자 프리스틴은 양팔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벨라를 확인하자마자 그녀의 입가에 조소가 스몄다.

“내 꼴이 어떤지 구경하려고 왔니?”

황녀의 신분일 때 보았던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칼은 엉켜 엉망이었고, 화려한 장신구 하나 없이 평민들처럼 간단하게 튜닉 원피스만 입은 채였다.

그래도 태생의 고귀함이나 워낙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탓인지 낯빛은 아직 예의 당당함이 죽지 않았다.

벨라는 프리스틴과 굳이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기에 차분히 본론을 꺼냈다.

“왜 그러셨어요?”

“무엇을?”

“그날 사냥대회에서…… 왜 화살을 쐈느냔 말이에요.”

그 얘기를 꺼내면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보일 줄 알았다. 하지만, 프리스틴은 도리어 벨라를 향해 비아냥거릴 뿐이었다.

“아아, 그게 그렇게 분했어? 화살 한 방 맞을 뻔한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었냐고! 네가 공작에게 일러바친 것이지? 그래서 내가 지금 이딴 꼴로……!”

“사람이 죽었어요. 전하께서 쏜 화살에 사람이 죽었는데…… 조금의 죄책감도 없으세요?”

“하, 지금 설마…… 그깟 몸종 하나 죽었다고 이리 따지러 온 거니? 내가 왜 지금 그딴 것까지 신경 써야 해?”

진심으로 짜증스러운 기색이었다. 지금 프리스틴에겐 제 처지가 가장 고달프고 애처로웠으니, 치치의 이야기 따윈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작 몸종 한 명이 아니라 제 친구였어요! 전하께선 제 소중한 친구를 죽인 거라고요!”

‘친구’라는 말에 프리스틴은 대놓고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복수하려고 공작에게 일러바친 거야? 이런 꼴을 봤으니 이제 속이 후련하겠구나. 흉한 꼴 다 구경했으면 썩 꺼져 주지 않겠니?”

순순히 사과받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일말의 죄책감도 없을 줄은 몰랐다. 벨라는 손끝을 꽉 그러쥐며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정말…… 제게 할 말이 그것뿐이세요?”

프리스틴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고작 그것뿐이겠니? 네게 하고 싶은 말이라면 수없이 많지.”

프리스틴의 머릿속은 오로지 벨라에 대한 증오로 가득했다.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이 결국은 모두 벨라의 탓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무리 되짚어 봐도 결국 이 비극의 시작은 벨라 때문이었다.

프리스틴은 입술을 까득 깨물며 세차게 벨라를 쏘아봤다.

“네년만 없었어도…….”

벨라의 표정이 안타까운 듯 일그러졌다. 결코 많은 것을 바란 게 아니었다. 그저 사과 한마디만 해 주면 되었다. 그래도 용서하는 건 장담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치치에게 조금은 떳떳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기억할 프리스틴의 마지막 모습 역시 이리 추잡하진 않았을 텐데.

“……정말, 끝까지 추악하시네요.”

“추악한 건 너겠지! 그 순진해 빠진 얼굴로 어떻게 공작을 꼬셔 냈는지 뻔해. 적어도 나는 너처럼 그리 천박하게 굴진 않았어!”

결국, 프리스틴이 새된 비명을 내지르듯 소리쳤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벨라의 표정은 끝내 착잡하게 물들었다. 제게 적대심을 품고 행동하긴 했어도, 고귀한 황녀의 모습만은 순수하게 동경했었다.

자신과는 태생부터 달랐으니까. 저와는 달리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니, 자신은 절대 가질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참 부러웠었다.

하지만 결국은 제 손으로 이리 비참하게 무너지고 마는 것이 진정으로 안타까웠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든 걸까.

“공작님께서 왜 전하를 버리셨는지…… 저는 알 것 같아요. 아마 전하께선 평생 모르시겠죠.”

벨라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뒤로 무슨 말이 달라붙든 무시하고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황녀의 초연한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지금은 그의 마음이 진심 같지?”

무엇이 그리 날카롭게 가슴에 내리꽂힌 걸까. 머리로는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되뇌면서도, 발목은 족쇄에 묶인 듯 꿈쩍하지 않았다.

“공작이 내게 얼마나 자상했는지 알아? 넌 우리가 얼마나 견고하고 깊은 사이였는지 모를 거야. 하지만, 그에게 진심이란 건 없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아니?”

거짓말이다. 분명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뒷말만은 짙게 잔상이 남아 귓가에 메아리쳤다.

“너도 그의 손안에서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결국은 버림받을 거란 뜻이야. 두고 봐, 너도 끝엔 나처럼 될 테니까.”

벨라는 결국 뒤를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본 프리스틴은, 진정으로 자신을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눈빛이었다.

벨라는 도망치듯 지하를 빠져나왔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벨리아르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벨라가 다가가자 그는 큼지막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러게, 만날 필요 없다고 했잖아.”

살살 어루만지는 손길에선 자연스럽게 소유욕이 배어 나왔다. 그는 버릇처럼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공작님.”

차분히 부르며 눈을 맞추니, 그는 마땅히 붉은 눈동자로 저를 얽매었다.

“저를 버리지 않으실 거죠?”

늘 바라던 것을 물었는데, 가슴속 불안의 응어리가 풀어지지 않고 더욱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안 버려, 절대.”

그의 말이 족쇄처럼 감겨 목을 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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