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레오니스가 황궁을 빠져나갔습니다.”
에릭의 보고에도 벨리아르는 차를 우려내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거나 혹은 계획된 일이었으니까. 에릭이 잠시 말을 멈추자 그는 태연하게 지시했다.
“계속해.”
“플뢰르 백작이 손을 더한 듯싶습니다. 아무래도 그쪽은 황태자의 목이 달아나면 기회를 잃고 마니까요. 아마 백작령으로 향하고 있을 겁니다.”
벨리아르는 찻주전자를 내려놓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의 손이 찻잔으로 가벼이 내려앉았다.
“에릭, 오랜만에 사냥이나 할까.”
묵직한 차향을 품은 나른한 음성이 눈두덩이를 내리눌렀다. 에릭은 순간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붙잡으려 검을 쥔 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왜 바로 목을 치지 않으셨습니까?”
의아한 기색 반, 원망의 기색 반이었다. 벨리아르는 등을 돌려 창가에 기댄 채 옅은 숨을 내쉬었다. 등으로 내리쬐는 햇살이 유독 따사로운 낮이었다. 정말, 사냥하기 딱 좋은 날이 아닌가.
“갇혀 있는 걸 밟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과거의 네가 그랬던 것처럼,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줘야지. 그래야 마땅하잖아.”
물론, 직접 사냥감을 쫓으며 땀 흘리는 건 질색이니 그건 에릭의 몫이었다. 벨리아르는 따끈한 차를 한 모금 넘기며 에릭을 향해 조용히 미소 지었다.
“가서 물어 와.”
그의 명령에 에릭은 다시 한번 검을 고쳐 잡았다. 주인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섣불리 의심하다니, 불충도 이런 불충이 없었다. 그는 가장 마땅한 방법으로 에릭에게 복수할 기회를 넘겨주었다.
“숨이 붙어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는 기꺼이 에릭의 말을 기특하게 여겨 주었다.
“그게 네 성에 찬다면. 코든 귀든 상관없으니 흔적만 가지고 와. 알아보기 쉽게 머리를 통째로 가져와도 좋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감사합니다.”
한 번도 그에게 고개 숙이는 행동에 거짓인 적은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결코 진심이었다. 에릭은 나름 담담하게 군다고 했으나 벨리아르의 눈엔 그의 사소한 감정들이 세세히 읽혔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을 건데.”
“예, 말씀하십시오.”
“네가 원한다면 정말 제국을 줄 수도 있어. 아직 에드윈의 소재를 밝히지 않았으니까.”
에릭에겐 황좌에 앉을 정당성이 있었다. 여기서 그러겠노라고 한마디만 한다면, 곧바로 2황자의 존재를 지우고 에릭을 차기 황제로 내세워 주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에릭은 일말의 고민 없이 단호히 답했다.
“저는 전혀 제국이 탐나지 않습니다.”
“황제가 되면 내게 존칭도 들을 수 있는데?”
넌지시 내뱉은 말에 에릭이 고민하듯 설핏 미간을 좁혔다.
“……음.”
여태 무슨 말을 해도 황좌는 필요 없다고 하더니. 벨리아르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딴 걸로 고민을 하네.”
“그건 조금 솔깃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없으면 사냥감은 누가 물어 옵니까.”
“황궁에 풀어놓으면 더 굵직한 사냥감을 물어 오지 않을까?”
“저도 귀찮은 건 싫습니다.”
완고한 거절에 벨리아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에릭을 황좌에 앉혀 놓으면 여러모로 편하긴 하겠지만, 곁에 두는 것도 그만큼 쓸모가 컸기에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아쉽네. 에드윈은 너무 무르고 멍청해서 별론데.”
“그만큼 말은 잘 듣겠죠.”
“잘 다녀와. 시간은 얼마가 걸려도 좋으니, 네 마음대로 해.”
주인이 허락했으니 에릭은 정말 마음대로 할 생각이었다.
에릭이 기사들을 이끌고 출발한 뒤, 벨리아르는 곧장 벨라에게로 향했다.
* * *
희뿌연 시야에 익숙한 방의 광경이 담겼다. 벨라는 그제야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인지했다. 지하에서 보냈던 지독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고, 끝내 마지막엔 자신을 안던 그가 떠올랐다.
“벨라, 이제 집에 가야지.”
실제로 그가 한 말이었을까. 꿈을 꾼 건 아닌지 헷갈렸다. 의심이 들 만큼 달아서 그랬다. 떠올리는 그 음성이 너무 달아서.
그를 떠올리니 온몸에 힘이 없는 와중에도 입꼬리가 휘어 올라갔다.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 자신을 데리러 온 그를 보며 얼마나 기뻤었는지, 얼마나 기다렸었는지.
“무슨 꿈을 꿨길래 깨자마자 웃을까.”
그때,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심장이 급격히 뛰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의자에 앉아 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쳤다.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꿈이에요?”
황당한 물음에 그는 헛웃음을 내비쳤다.
“왜, 내가 또 바위로 보여?”
벨라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며 그를 선명히 담으려 애썼다. 힘없이 눈가를 비볐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걸 보니 헛것을 보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는.
“물 마실래?”
마시기 적당하게 데워진 물까지 건네주었다. 벨라는 몽롱한 와중에도 다급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정신없을 땐 잘 몰랐는데, 일어나 앉으니 온몸이 비명을 질러 댔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용히 눈가를 찌푸렸다.
“아파?”
“……네.”
“어디가?”
“온몸이요. 아래도 아프고, 허리도 너무 아파요…….”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자조적인 미소를 삼켰다.
“내가 제일 아프게 했다는 거네.”
그의 말에 화들짝 놀란 벨라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아니에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
그는 의자에 기대앉은 채 눈짓으로 물잔을 가리켰다.
“마셔.”
벨라는 두 손으로 잔을 감싸 쥔 채 살며시 물을 한 모금 삼켰다. 그냥 맹물인 줄 알았는데 은은하게 우려낸 찻물이었다. 향은 옅었지만 분명 그가 즐겨 마시던 차와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뺨이 옅게 붉어졌다. 고작 이게 뭐라고. 잔을 감싸 쥐는 손길이 조금 더 소중해졌다.
벨리아르는 그런 그녀를 지켜보다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그에겐 수줍은 미소를 삼키는 모습보다 얼굴 한쪽에 흉하게 올라온 멍이 더욱 신경 쓰였다.
에릭에게 맡기지 말고 직접 갈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스쳤다. 잡아서 온몸의 뼈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짓밟아 주는 건데.
“그냥 내가 그랬다고 하지 그랬어.”
“그럼…… 공작님이 다치시잖아요.”
벨리아르는 옅게 조소했다.
“네가 날 지키려고?”
“다른 사람에게 무릎 꿇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설령 황족일지라도. 그리고 제가 죽더라도…… 그런 말은 할 수 없었어요.”
남들에게 무릎 꿇지 말라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제 말을 잘 들으려는 게 기특하고도 너무 미련해서 화가 났다.
“뒷말은 별로 칭찬해 주고 싶지 않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아니. 다음부턴 그럴 일 없어.”
벨리아르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자르며 대꾸했다. 마치 스스로 하는 다짐 같기도 했다.
“저 걱정하셨어요?”
그는 말없이 벨라를 응시했다. 그의 성격상 걱정하지 않았다면 곧바로 대답했을 텐데, 저렇게 침묵한다는 것은 긍정의 뜻과 다름없었다. 주제넘게 그의 걱정을 달래 주고 싶었다.
“에릭 경께서 매일 살피고 가셨어요.”
“그래.”
물론 정말 잘 있는지 확인만 하고 가는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 큰 힘이 되었다. 에릭이 온다는 것은 그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정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혹시나 자신이 모르는 사이 그가 찾아오진 않았을까 하는 기대가 서렸었다.
“공작님께선…… 많이 바쁘셨죠?”
“그러니까 네가 지금 여기 있겠지.”
은근슬쩍 돌려 물었으나 그는 원하는 답을 내어 주지 않았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하여 벨라 역시 빠르게 기대를 접었다.
“저 어떻게 빼내 오신 거예요? 황제 폐하께서도 서거하셨는데…….”
“이제 걱정할 거 없어. 황제를 죽인 진범이 모두 밝혀졌으니까.”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황태자가 반역을 시도했어.”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라 벨라는 놀란 듯 헛숨을 들이켰다. 어떻게, 그 누구도 아닌 황태자가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권력에 눈이 멀었어도 아들이 아버지를 해치다니.
“그게…… 사실이에요?”
“그래.”
“그럼 지금 어떻게 됐어요?”
“감옥에 가둬 두었는데 새벽에 탈출해서 에릭이 쫓으러 간 참이야.”
“……에릭 경께서 위험에 빠지진 않겠죠?”
벨라가 걱정스럽게 묻자 그는 짧게 조소했다. 지금 걱정해야 할 건 에릭이 아니라 그에게 쫓기는 레오니스가 얼마나 성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는가였다.
“에릭이 들었으면 표정이 참 볼만했겠는데.”
“에릭 경의 실력을 의심한 건 아니에요.”
“그리고, 치치를 죽인 게 황녀의 소행임이 밝혀졌어. 그때 사용한 독이 황제를 죽게 만든 독과 같은 것이라, 이번 역모와 아예 연관이 없다곤 할 수 없겠지.”
“그럼…… 둘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황태자는 곧 죽을 거고, 황녀는 외딴 섬으로 유배를 보낼 거야. 평생 홀로 썩어 가도록.”
그 말인즉 앞으로 황녀를 마주칠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이다. 다행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에겐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한 번은 꼭 황녀를 만나야 했다.
“저, 황녀 전하를 만나게 해 주세요.”
예상과 전혀 다른 반응에 그는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황녀의 처분을 전해 주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다짜고짜 만나게 해 달라니.
“왜?”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어요.”
“무슨 말.”
“사과요. 치치를 죽인 것에 대한 사과를 듣지 못했어요.”
벨리아르가 짜증스런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놈의 치치는 언제쯤 잊을까. 앞으로 그딴 선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또 한 번 차올랐다.
벨라의 입에서 에릭의 이름이 나오는 것마저도 가끔 거슬릴 지경인데, 다른 이는 오죽할까.
“황녀는 반성하지 않아. 가 봤자 사과는 듣지도 못해.”
“그래도요.”
“벨라, 고집부리지 마.”
그의 단호한 경고에도 벨라의 뜻은 꺾이지 않았다. 프리스틴이 사과하지 않을 확률이 크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시도조차 안 해 볼 수는 없었다.
벨라는 얼른 침대에서 내려가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공작님은 저를 황녀 전하와 만날 수 있게 해 주실 수 있잖아요. 네? ……제발요.”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벨리아르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구겼다.
“이번만이야. 다음부턴 이따위로 떼쓰지 마.”
이렇게 받아 줄수록 버릇이 나빠질 테니 단호하게 쳐 내야 하는데 그것이 제 뜻대로 되지 않으니 심기가 거슬린 탓이다.
더 짜증이 나는 건, 앞으로도 벨라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냉정해지지 못하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