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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95)화 (95/180)

95화

벨리아르의 말에 프리스틴은 기겁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충분히 자신이 말한 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이건, 명백한 협박이었다.

“마, 말도 안 돼요! 그 독이, 그, 그게…… 저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흔하게 쓰이는 독일 거고……. 그런데 어떻게 저라고 확신할 수 있죠?”

“아니요. 그 독은 소만에서 극비리에 입수되는 극독입니다. 그만큼 가격도 비싸고, 들여오기도 쉽지 않죠. 황녀 전하시기에 손에 얻을 수 있었던 겁니다.”

“아, 아니에요……. 저는 그런 것이라곤…….”

프리스틴은 황망히 고개를 내저었다. 당최 그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는 정말 자신이 황제 폐하를 시해한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그 오해를 풀어야만 하는데…….

“제게는 이 사건을 빠르게 해결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마음은 없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뵐 때는 위치가 조금 달라지겠군요.”

벨리아르가 몸을 일으키며 단호하게 말하자 프리스틴은 다급히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생각하기도 전에 입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 잠시만요, 공! 그건……. 그, 그건 제 것이 아니에요!”

그의 서늘한 시선이 제 옷깃을 붙잡은 프리스틴의 손으로 내려앉았다. 곧이어 눈가를 찌푸리며 날카롭게 손을 쳐 냈다.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묻었다는 양.

“전하, 제게 똑바로 말씀하셔야죠.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그 독, 어디서 나신 겁니까?”

그러나 흘러나오는 음성은 퍽 나긋해서 프리스틴은 더욱 그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의 방에서요. 전 그저…… 오라버니의 방에 있던 것을 몰래 가져온 것뿐이에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똑바로 들으세요.”

프리스틴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 제 목숨 줄을 쥐고 있다. 저를 살리는 것도 그였고, 죽일 수 있는 것도 그였다.

“의회에서 그 말을 그대로 증언하시면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며칠 뒤, 전하의 목이 잘릴 테죠. 아,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고 했으니 명백한 역모이고, 그럼 깔끔하게 죽을 순 없겠네요.”

쉽게 말해 살고 싶으면 레오니스를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다. 프리스틴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꼼짝없이 다 뒤집어쓸 판인지라 고민할 여지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라면…… 레오니스가 아버지를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하, 할게요. 공께서 시키는 대로…… 그대로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제가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벨리아르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 올라갔다.

“그럼요. 제가 설마 전하를 죽이겠습니까.”

그렇게 황태자의 혐의는 주요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낱낱이 드러났다. 모든 증거를 같이 보았으니, 황태자를 따르던 자들도 감히 그를 감싸려 들지 못할 터였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제 목숨은 물론, 가문 전체가 무너질 테니까.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황태자 전하께서 반역이라니…….”

혼란스러워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벨리아르만이 홀로 평온했다. 그는 내내 상처로 얼룩진 벨라의 모습을 수없이 곱씹었다.

* * *

황태자의 시녀가 여분의 독을 몰래 처리하려다 붙잡힌 것으로 그의 죄는 더없이 확실해졌다. 하루아침에 황태자에서 반역자로 몰락한 것이다.

레오니스는 굵은 사슬로 목과 양팔이 묶인 채 지하에 감금되어 있었다. 깊숙한 층이 아니라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내려가기 귀찮으니 오가기 쉬운 곳에 투옥하라는 벨리아르의 지시 때문이었다.

너른 지하 안에 묵직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느릿하게 눈을 뜬 레오니스의 시야에 벨리아르의 모습이 번졌다.

“……이제 만족하나? 네놈은 기어코 원하는 바를 이루고야 마는구나.”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핏 벨리아르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그는 레오니스의 가까이 다가와 손수 목과 팔에 묶인 사슬을 풀어 주었다.

“아직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고 하기엔 이르지.”

그가 나타나며 감옥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모두 물러났다. 지금 이곳엔 단둘뿐이라는 뜻이다.

레오니스의 눈에 어설픈 기대가 깃들었을 무렵, 벨리아르는 무감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넌 아직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잖아.”

“큭…….”

레오니스는 피 섞인 침을 뱉어 내고선 그를 바라보며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네놈은 이 땅의 황제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냐?”

“다시 잘 생각해 봐. 내가 그런 번거로운 짓거릴 좋아할까?”

“그럼 대체 왜…….”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말이 있지.”

벨리아르가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 중 가장 깊이 공감하는 것이었다. 그는 제 손에 들린 사슬을 만지작거리며 나긋하게 읊조렸다.

“나는 도저히 나를 거역하는 것들을 가만 놔둘 수가 없어.”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레오니스는 바짝 긴장하며 그 움직임을 좇았다. 머리로는 당장 일어나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두운 지하 안에서 그의 붉은 눈동자가 소름 끼치도록 선명했다.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뿐인데, 거대한 돌덩이로 짓누르는 것만 같은 거센 압박감이 느껴졌다.

“감히 주인을 물려고 했던 것도 모자라 주인의 물건에까지 손을 대는 건 매우 나쁜 버릇이지.”

그의 말에 모욕감을 느낄 새도 없었다. 무자비하게 떨어지는 발길질에 순간 눈앞이 흐려지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차마 저항할 수 없는 힘이었다. 압도적인 힘 차이가 나는 탓에 발버둥 쳐 봤자 가해지는 폭력만 더 거세질 뿐이었다.

“끄윽…….”

최대한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몸을 둥글게 웅크린 레오니스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그래도 생명에 지장은 없을 만큼 나름 조절해서 때렸기에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벨리아르의 시선이 레오니스의 손과 발을 차례로 훑었다. 이어 무릎을 굽혀 앉은 그가 짧게 혀를 찼다. 에릭에게 약속한 것이 있으니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고작 손뿐이긴 하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벨리아르가 레오니스의 양 손바닥을 차례로 확인했다. 검을 많이 쥔 탓에 오른손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전하께서는, 주로 오른손을 쓰시나 봅니다.”

그렇다면 이 손으로 벨라를 때렸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마자 그는 일어서서 레오니스의 손목을 발로 밟아 으스러트렸다. 손목부터 손가락 끝까지 짓밟으면서도 그의 표정은 권태로웠다.

“으아악──!”

생생한 고통에 레오니스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비명을 내질렀다. 벨리아르는 그 소리가 시끄러워 살짝 눈가가 찌푸려졌을 뿐이다.

이 더러운 손으로 감히 제 것에 상처를 내다니. 자백하라 종용하며 모진 말로 쏘아 댔을 혓바닥도 잘라 내 버리고 싶었으나, 그것은 에릭의 몫이니 자제했다.

레오니스는 너덜너덜해진 제 손목을 어쩌지도 못한 채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거세게 노려봤다. 벨리아르는 설핏 미간을 좁히며 이번엔 그의 머리를 밟아 눌렀다.

“버러지 같은 게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네놈이…… 큭, 내게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내가 누구인데……. 내가……!”

아직도 자신이 이 나라의 고귀한 황태자인 줄 아는 모양이다. 그 꼴이 가소로워 벨리아르는 조소를 흘렸다. 이리 제 발아래 깔려 버둥거리는 주제에.

“그러게, 얌전히 굴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네 아비나 동생들처럼 내게 무릎을 꿇었으면 어련히 알아서 귀한 황태자 전하로 대접해 줄까.”

레오니스의 눈동자로 언뜻 희미한 후회가 스쳐 갔다. 굳이 황제처럼 그에게 무릎 꿇지 않더라도, 쓸데없이 더 큰 욕심만 부리지 않았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터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황좌도 마땅히 네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레오니스는 수없이 같은 선택을 반복했을 것이다. 여전히 그를 무너트리고 싶다는 욕망이 건재했다. 이리 모든 희망을 짓밟힌 순간에도.

“나더러 아버지처럼 네놈의 꼭두각시 짓이나 하라고?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것이 낫겠구나!”

벨리아르는 악에 받쳐 소리 지르는 레오니스를 보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쩌다 이런 돌연변이가 나와서는.

“기회를 줄까.”

“……뭐?”

“도망가서, 목숨이라도 건질 기회.”

레오니스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벨리아르는 조용히 미소를 삼키며 그의 얼굴을 한 번 걷어찼다.

“명심해, 레온. 네 그 더러운 목숨은 네 것이 아니야.”

레오니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를 빠득 갈았다. 멀어져 가는 벨리아르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렸을 적 기억이 어렴풋이 아른거렸다.

“레온, 착하구나.”

분명 그가 제 머리를 쓰다듬고 칭찬해 주었던 때가 있었다. 그 기억이 가시덩굴처럼 가슴을 옥죄며 파고들었다.

* * *

쇠끼리 부딪쳐 철그렁거리는 소리가 몽롱한 정신을 깨웠다. 벨라는 돌덩이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려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굳세게 닫혀 있던 철장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또 황태자인가 싶어 어깨가 흠칫거렸으나, 다가오는 걸음걸이가 익숙했다.

생각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다. 자각하지 못한 새에 눈가로 물기가 차올라 시야가 흐려졌다. 천천히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는 그의 모습을 담으려, 벨라는 필사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뺨을 감싸는 차가운 손이 누구의 것인지 너무도 잘 안다. 그의 눈빛이 내비치는 서늘한 냉기가 무엇보다 그리웠다. 바깥의 따스한 햇살보다 더.

“……공작님.”

목 끝까지 차오르는 울음이 벅차,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차마 담기지 못하고 흘러넘친 눈물 한 방울이 뺨을 적실 때쯤, 그의 입술이 성급히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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