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프리스틴은 손에 쥐고 있던 작은 병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선 옅게 숨을 고른 뒤, 입술을 움직였다.
“이것은 제가 황태자 전하의 방에서 몰래 가져온 독입니다.”
“──프리스틴!”
레오니스의 커다란 외침이 장내를 울렸다. 프리스틴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는 그녀가 해야 할 말이었지만, 벨리아르는 대신 뒷말을 이어 주는 친절을 보였다.
“그리고 그 독은 황제 폐하를 시해한 것과 같은 것이죠.”
레오니스는 벨리아르를 거세게 노려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겨우 심호흡하며 흥분을 조금 가라앉힐 때까지 벨리아르는 여유로운 태도로 관망했다.
“……공작,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것이오? 나는 저 병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오. 오늘 처음 보는 것이란 말이오. 내가 그랬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소?”
“이 자리에서 증명해야 한다면, 한 가지 확실한 방법이 있죠.”
벨리아르는 병의 뚜껑을 열어 레오니스의 앞으로 내밀었다.
“마셔 보시지요. 전하의 주장대로 이 안에 그저 물을 채워 놓고선 독이라 우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마셔 보십시오.”
병을 바라보는 레오니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는 저 병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고 있고, 그 안에 무슨 독이 들었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 독은 다른 독들과 달리 해독제가 없었다.
“당연히 먹지 못하시겠죠. 전하께서는 이 병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니까요.”
무언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분명 완벽하게 계획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런…….
레오니스의 머릿속이 더 이상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할 정도로 희뿌옇게 얽혔다.
“이건 모함이오! 프리스틴, 네가 어찌 나를……!”
“황녀 전하, 이렇게 물건을 훔치는 건 나쁜 버릇입니다.”
벨리아르가 태연하게 대꾸하는 사이, 에릭이 다가와 그에게 장부를 전해 주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레오니스의 앞에 장부를 던졌다.
“소만에서 저 독을 밀수하는 중개상이 지니고 있던 장부입니다. 이 안에 황태자 전하께서 그 독을 거래했다는 사실이 적혀 있습니다. 이것으로도 믿지 못하겠다면, 그 중개상을 이 자리에 데려와 직접 증언하게 하지요.”
명확한 증거가 있는 이상, 증언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주도권이 넘어갔다. 아니,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엉망으로 뒤엉킨 머릿속에서 그 사실만큼은 선명히 떠올랐다.
그래도 무언가 빠져나갈 방법이 있지 않을까? 이 상황만 무사히 넘기면 된다. 그래, 저 장부가 문제이니 저것만 없앤다면……!
레오니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장부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 위로 벨리아르의 손이 겹쳤다. 그가 거센 힘으로 그를 억눌렀다.
“……다, 당장 이놈을 포박하라! 감히 황태자를 모함하고 반역을 일으키려 한 중죄인이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정신없이 외치는 모습이 상당히 추악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더니, 벨리아르의 눈엔 지금 레오니스의 모습이 딱 그 꼴이었다.
“뭣들 하느냐!”
레오니스를 따르던 기사들이 다급히 검을 빼 들었다. 오래전부터 황태자에게 달라붙어 그의 지시를 행하던 자들이기도 했다. 벨리아르는 그들을 훑으며 서늘하게 일갈했다.
“지금부터 막아서는 자들은 반역에 가담한 죄로 목을 쳐 효수할 것이다.”
그들도 이미 사태가 겉잡을 수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여기서 괜한 충심을 내세웠다간 깡그리 개죽음을 당하리라는 것도.
서로 눈치를 살피던 기사들은 결국 검을 내려놓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벨리아르의 단호한 음성이 흘렀다.
“황태자 레오니스 브라이던을 황제 시해 혐의로 투옥한다.”
그의 말 한마디에 장내로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레오니스는 양쪽에서 자신을 붙잡는 기사들의 손길에 이를 빠득 갈며 소리쳤다.
“지금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죄인을 끌고 가.”
“네놈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내가 꼭 네놈을!”
레오니스가 끌려 나간 뒤, 장내엔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끝내 결론을 내린 귀족들은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이따금 애석한 탄식만이 흐를 뿐이었다.
끌려가는 오라버니를 지켜본 프리스틴의 얼굴엔 별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애초에 혈육의 정이랄 것이 없었기에 안타까움도, 오라버니를 사지로 내몰았다는 죄책감도 없었다. 그저 눈가가 조금 찌푸려질 뿐이었다.
조금 서툴긴 했지만, 황제는 그래도 다정한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를 죽인 것이 레오니스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치미는 경멸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무리 권력에 눈이 멀어도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프리스틴은 물미는 침울을 속으로 삼킨 채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벨리아르는 그녀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내비쳤다.
옅은 안개 같은 그 미소가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에 대한 마음을 접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데도 여전히 그를 보면 가슴이 뛰었다.
하여 붉은 입술 새로 제 이름이 흘러나왔을 때, 프리스틴은 섣불리 헛된 희망을 품고 말았다.
“프리스틴 황녀 역시 투옥하도록.”
그는 늘 희망을 주었다가 그것보다 더 큰 절망에 빠트리는 것을 즐겼다. 태생이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잔혹한 성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악취미였다.
“──벨리아르 공!”
“황태자와 결탁했을 수도 있으니 조사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저 이것을……!”
“예, 어디에 쓰셨습니까?”
순간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들이 벽에 부딪힌 듯 입안에서 바스러졌다. 차마 이 자리에서, 사냥대회 때 사람을 쏜 데다 죽이기까지 한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사실이 황제를 시해에 가담했다는 혐의보다는 가볍겠지만,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 역시 ‘조사’를 하겠다고 말했고, 분명 저를 살려 주겠다 약속했다. 그러니 여기서 섣부르게 말을 꺼낼 필요는 없다.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없는 일입니까?”
“벨리아르 공, 당신은 정말…….”
벨리아르가 그녀를 향해 바짝 다가섰다. 느른하게 휘어 올라간 입술 새로 옅은 숨결이 샜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쥐어 비틀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선득한 생각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매우 나긋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은 당신도 마찬가집니다.”
프리스틴은 자신이 벨라를 향해 화살을 겨눈 것을 떠올렸다. 그는 결코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의 이것은, 그날의 응징이었다.
며칠 전 벨리아르가 비밀스럽게 프리스틴과 만난 날, 그는 화살의 출처가 담긴 서류들을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이건…….”
“설마, 이걸 보고도 전하께서 한 일이 아니라 하지는 못하시겠죠.”
“……그래서, 이게 뭐 어쨌다는 거죠? 단순한 실수였어요.”
벨리아르는 옅게 조소하며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아, 실수요.”
“네, 실수. 말 그대로 사냥대회였고, 저는 그저 짐승을 사냥하려다가 화살이 빗나갔을 뿐이에요. 거기 하필 운 나쁘게 그 몸종이 있었을 뿐이고요.”
“그럼 왜 제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프리스틴의 눈가로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너무 무서웠어요. 사람을 쐈다는 게……. 그래서 당황스러운 마음에 그랬던 거예요. ……그리고, 고작 몸종 하나일 뿐이잖아요. 물론, 공의 재산에 피해를 준 건 사실이니 충분히 보상해 드리겠어요.”
“짐승을 쏘려고 했던 게 확실합니까?”
“당연하죠. 황당한 질문이네요. 그럼 사냥대회에서 대체 무엇을…….”
“벨라를 쏘려고 했던 건 아니시고요.”
프리스틴은 테이블 아래로 놓인 손을 꽉 그러쥐었다.
“……벨리아르 공, 억측이세요. 제가 대체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보통은 짐승을 사냥하는 데에 독을 쓰진 않죠.”
그는 애초에 그날 일의 자초지종을 물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온 것이다.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프리스틴이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자, 그는 대놓고 비웃었다.
“설마 화살을 쏜 것은 맞지만, 독을 바른 적은 없다고 발뺌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그런 멍청한 대답을 하지는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말했다시피 짐승을 잡으려고 그런 거예요. 그냥 화살만 쏴서는 잘 죽지 않으니까……. 저는 사냥대회가 처음이잖아요? 그래서, 잘 몰라서…….”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는 것이 확연히 보이는 탓에 벨리아르는 치미는 짜증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본론을 꺼냈다.
“황제 폐하께선 독으로 쓰러지신 겁니다. 아마,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테죠.”
프리스틴이 숨을 들이켜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네? 세상에……. 설마요. 아버지께서……. 그렇게 심각한 상태이신 줄은…….”
눈가에 비친 눈물이 더욱 일렁였으나 진심에서 우러나온 슬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전하께서 그 몸종을 죽였던 독은, 지금 황제 폐하를 쓰러지게 만든 독과 같은 것입니다.”
“네? 그, 그런…….”
“그게 무슨 뜻인 줄 아시겠습니까?”
이제야 진정 놀란 듯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멍청해도 이쯤 말하면 지금 왜 이런 얘기를 꺼내는지 알아챘을 것이다.
벨리아르는 냉담한 조소를 흘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꼬아 앉은 무릎 위로 올려 둔 손끝이 일정하게 까딱였다.
“이 사실을 공표하면 전하께서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한 유력한 용의자가 되는 겁니다. 이유는…… 늙어 무력해진 아버지를 해치고 제국을 손에 넣으려는 황녀 전하의 대담한 포부 정도가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