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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93)화 (93/180)

93화

등장만으로 모든 이의 이목을 끌어간 그는 성큼성큼 걸어 레오니스의 앞으로 다가갔다.

“송구합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아가씨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조사를 하다 보니 조금 늦었습니다. 전하께서 너른 마음으로 양해 부탁드립니다.”

분명 말은 양해를 구하고 있었으나 태도나 풍기는 분위기는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앉아 있는 레오니스를 내려다보는 모습에선 언뜻 지배자의 모습까지 비쳤다. 하여 귀족들은 순간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했다.

블루벨 제국은 벨리아르 공작의 것이구나.

레오니스는 그의 시선을 받아 내며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서늘한 붉은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본능적인 공포가 심장을 죄어 오니, 그 느낌을 애써 무시하려는 노력이었다.

레오니스는 비스듬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으나 이미 귀족들은 그가 황제 시해에 가담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식으로 오만하게 구는 것은 오히려 그에게 독이 될 것이다.

“공의 심려가 큰 것을 충분히 알고 있소. 그래서, 열심히 조사하고 다닌 성과가 있는지 궁금하오.”

“설마 없겠습니까. 이 땅에서 제가 하지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이 마치, ‘난 네 목도 베어 버릴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레오니스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최대한 여유로운 태도를 내비치기 위해 애썼다.

“그럼 어디, 모두가 모인 이 자리에서 말해 보시오.”

벨리아르는 무던히도 애쓰는 레오니스의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조소했다. 그의 차분한 목소리가 장내에 깔렸다.

“전하, 폐하께서 돌아가시기 전 디어린 잎에 중독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레오니스가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공격이 시작된 것을 알았으니 마땅한 방어를 해야 했다. 하지만 섣부르게 대답했다간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레오니스가 잠시 머리를 굴리는 사이, 벨리아르는 다시 말을 이었다. 딱히 대답을 듣고자 한 말은 아니었기에.

“디어린 차는 향과 맛이 독특해 일부러 찾는 사람이 제법 있지만,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사항이 있죠. 산미가 있는 음식과 먹으면 독이 된다는 것.”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무엇이오? 늦게 참석하여 듣지 못하였을 테니 한 번 더 말하겠소. 황제 폐하의 사인은 극독에 의한 독살이오. 디어린 차는 폐하의 죽음과 관련이 없소.”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그 차를 지속적으로 폐하께 올린 것은, 전하시니까요.”

“……하, 지금 겨우 그런 것으로 나를 몰아가려는 것이오? 내가 폐하께 디어린 차를 올린 것은 맞으나, 그뿐이오. 디저트를 준비해 올린 건 그저 요리사의 독단이었는데, 그걸 가져다드린 내게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소?”

“그럼 그 요리사를 잡아 신문해도 되겠습니까? 폐하께 음식을 올리는 요리사로서 그런 중요한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는데, 그럼 누군가의 사주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미 요리사의 입은 막아 놓았지만, 그래도 선득한 불안감이 스쳤다. 먼저 목을 물리지 않으려면 도리어 상대의 목을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공에게 묻겠소. 공은 이번 황제 폐하의 죽음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소?”

“제가 베일리 남작 영애의 후견인인 것 말고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레오니스는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걸린 여유로운 미소를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과연 저 태도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저렇게 나온다면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확실히 짓밟아 주는 수밖에.

“죄를 시인한 범인을 데려오도록 하라.”

범인을 회의장으로 직접 끌고 온다는 말에 귀족들은 놀람과 호기심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기사들이 남자 한 명을 포박하여 끌고 왔다. 레오니스는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떨고 있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네 이름과 소속을 밝혀라.”

“저, 저는…… 필렌 바트입니다. 황궁 주방에서 자잘한 일들을 맡고 있습니다.”

“이곳은 엄숙한 장소이니 지금부터 네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거짓을 말했다간 참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좋다. 그럼 묻도록 하지. 연회장에서 음식에 독을 탄 것은 네 짓이 맞나?”

“그것은…….”

남자가 대답을 망설이자 레오니스는 엄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허튼 생각 하지 말고 바른대로 말하거라.”

“……예. 제, 제가 한 짓이 맞습니다.”

“사주한 자가 있다고 했는데, 누가 황제 폐하의 음식에 독을 타라고 지시했지?”

남자는 눈에 띄게 벌벌 떨면서도 꾸역꾸역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이 벨리아르 공작을 향하고 있었다. 벨리아르 역시 짙은 눈동자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느릿하게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남자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십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발언이었다. 레오니스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를 향해 호통했다.

“그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남자의 말 한마디에 귀족들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지금 그들은 제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해 보고 있을 것이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함부로 거짓을 입에 담는 것이냐! 지금 당장 네놈의 목을 칠 수도 있다!”

잔잔히 요동치는 장내에서 벨리아르만이 여유로운 태도로 남자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황태자 전하께서 왜 하필 네게 그런 지시를 했지?”

남자는 턱을 덜덜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벨리아르에게 시선을 매달았다. 이미 말을 뱉었으니 다시 주워 담을 순 없었다. 남자는, 그에게 제 모든 것을 걸었다.

남자는 어느 날 이유도 모른 채 황태자 앞에 끌려갔었다. 오로지 황궁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 중 가장 돈이 절실하다는 이유 하나로.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네 가족은 평생 돈 걱정 없이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겠다.”

“그,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죽는 거지.”

“……!”

“설마, 어리석게 거부할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너는 죽을 것이고, 내 말대로 하지 않는다면 가족들도 끔찍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대체,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법 괜찮은 거래 아닌가? 어차피 죽는 것은 매한가진데. 그 전에 말만 한마디 하면, 고통 받던 네 가족은 평생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 병든 어머니와 아이가 있다던데, 치료 받을 수 있도록 의사도 보내 주겠다. 그럼 네 아내의 고생도 끝이지.”

하여 그 거래 이후로 죽을 날만 기다리며 감옥에 갇혀 있었다. 모든 희망을 내려놓은 채, 남자는 자신의 선택이 가족들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다. 어차피 이렇게 살아 봤자 죽을 때까지 가족 모두가 고통받을 뿐이었다. 그때, 자신의 눈앞에 동아줄이 내려왔다.

“괜히 네가 죽을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사실대로 말한다면, 네 목숨도 살리고 평생 돈 걱정 없이 살도록 해 줄 텐데.”

“……그 말을 어찌 믿을 수 있습니까? 제게 그런 지시를 한 분은…… 감히 거역할 수 없이 높으신 분입니다. 저를…… 절대 살려 두지 않을 겁니다.”

“세상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지. 벨리아르 공작,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없나?”

“저, 저는…….”

“과연 네가 죽은 뒤에 네 가족이 정말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네가 그렇게 죽고 나면 가족들의 마음이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 없냐는 말이다. 그리고 그 전에, 황태자는 그런 약속을 지킬 사람이 아니다.”

“……그럼, 그분은…… 약속을 지키는 분이십니까? 제가 어찌 그분을 믿어야 합니까. 저는 귀족들을 믿지 않습니다.”

“누구를 선택할지는 네 몫이지. 하지만 잘 생각해 보도록. 황태자를 선택한다면 넌 어찌 되든 죽는 것이고, 그분을 선택한다면 최소한 살 여지는 있다.”

“…….”

“내가 너라면, 죽을 때 죽더라도 최대한 몸부림은 쳐 볼 텐데. 너를 그런 지옥으로 밀어 넣은 황태자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나?”

에릭이 그런 제안을 했을 때, 남자는 차라리 혀를 깨물어 자결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남은 가족들이 걱정되어 죽는 것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었다.

대체 왜 높으신 분들은 한낱 자신을 가만두지 못해 안달일까. 무엇을 잘못했다고. 자신의 잘못은 그저 짓밟혀도 아무런 저항조차 할 수 없는 평민이라는 것뿐이다.

“황제 폐하께서 드실 음식에 독을 탔다, 그렇게만 말하면 그만한 보상을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놈이! 머리가 다쳐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구나. 어디서 그런 망언을──!”

그때, 벨리아르가 레오니스를 등지고 막아서며 남자에게로 향하는 거센 분노를 차단했다.

“계속해. 그래서, 독을 탄 건 정말 네가 한 짓인가?”

“아, 아닙니다! 저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황태자 전하께서 제게 그리 자백하라고 하셔서…….”

“그 입 닥치지 못할까! 감히 겁도 없이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을 보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로구나. 네놈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이냐?”

발끈하여 소리치는 레오니스의 눈동자가 충혈되어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소리친 것이 무색하게 귀족들은 이미 동요하고 있었다. 벨리아르는 뒤돌며 보란 듯이 한숨을 내뱉었다.

“전하께선 범인의 증언마저 거짓이라고 하시니, 저로서도 어쩔 수 없군요.”

벨리아르가 문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의외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프리스틴 황녀가 들어오자 레오니스는 표정을 와락 구겼다. 그녀는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을 노려보기만 하는 오라버니의 앞으로 다가가 보란 듯이 예를 갖췄다.

“……프리스틴, 네가 어찌 이곳에…….”

형체 없는 불안을 감지한 레오니스의 입에서 다소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벨리아르는 단정히 입매를 휘며 그 물음에 답해 주었다.

“황태자 전하께 지난 잘못을 털어놓고 싶다고 하셔서 제가 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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