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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92)화 (92/180)

92화

그때, 누군가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그의 지시를 받고 다른 감옥에 갔던 에릭이었다. 에릭은 일부러 바닥에 쓰러져있는 벨라에게 시선을 두지 않으려 했다.

“주인님,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다시 움직일 시간이었다.

벨리아르는 몸을 일으켜 가만히 벨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제자리에 서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는 그 순간에도 대체 무엇이 제 발목을 그리 지독히 붙잡았는지 알지 못했다.

* * *

건국제가 끝나자마자 온 땅이 슬픔에 잠겼다. 평소라면 일상으로 돌아와야 할 시기에, 갑작스러운 황제의 서거 소식은 제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신 게 마녀의 소행이라며?”

“나도 그 얘기 들었어. 그러면 그 영애가 마녀인 것은 확실한 거 아니야? 연회에서 사악한 마법으로 여럿을 죽였대.”

“……이러다가 정말 나라가 어떻게 되진 않겠지? 황제 폐하마저 마녀에게 당하다니…….”

안 그래도 음울한 분위기에 형형한 소문까지 나돌며 흔들리니, 황태자 앞으로 상소가 빗발쳤다.

그날 연회에서 있었던 사건을 빠르게 마무리 지어 죄를 처단하고, 새롭게 즉위하여 제국민들의 불안을 잠재워 달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것은 레오니스도 간절히 원하는 일이었으나, 상황이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우선 벨라의 저항이 예상보다 훨씬 굳건하고 거셌다. 보통 귀족 영애라면 그 정도만 해도 술술 입을 열었을 텐데.

“고문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면 당장이라도 입을 열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었다. 레오니스 역시 온갖 수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녀에게서 자백을 받아 내고 싶었지만, 벨리아르 공작의 존재를 아예 배제할 순 없었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건 자신이었다. 벨라가 순순히 자백했다면 깔끔하게 끝났겠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으니 원래 계획했던 것을 이행할 시점이었다.

“의회를 소집해.”

“그 영애는 포기하실 겁니까?”

하지만 공작의 약점을 잡은 이 기회를 그리 쉽게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그 영애를 이용해 공작에게 타격을 주는 건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아. 중요한 건, 내가 황좌에 오르는 거지.”

* * *

안내했던 회의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의회로 향하는 벨리아르와 그 뒤를 따르는 에릭의 발걸음은 상당히 여유로웠다.

“마음이 꽤 급한 모양입니다.”

말없이 앞서가는 그에게 에릭이 넌지시 말을 붙여 보았으나 벨리아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에릭 역시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벨라의 상태를 본 후로 그는 무서울 정도로 일에만 집중했다. 덩달아 잘 쉬지 못한 에릭의 눈가엔 희미하게 피곤이 서려 있었다.

“준비는.”

“차질 없도록 철저히 준비해 놓았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릭은 예민한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확실한 답을 내어 주었다. 헛된 말은 아니었다.

벨리아르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곤 다시 침묵에 잠겼다. 평소라면 감히 그의 머릿속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너무도 확연하게 보였다.

“제가 아가씨께 가 볼까요?”

“너는 레오니스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봐야지.”

에릭에겐 오늘이 또 다른 시작의 순간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소식이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던 귀족들은 예정된 시각보다 이르게 회의장에 도착해 자리를 채웠다. 그러니 벨리아르 공작의 빈자리는 더욱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다.

약속된 시각에 맞춰 레오니스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와 가장 상석에 올랐다. 그는 벨리아르 공작의 빈 자리로 눈길을 주었다. 엄숙한 분위기를 뚫고 입을 연 것은 헤르먼트 후작이었다.

“벨리아르 공께서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습니다.”

레오니스는 무언가 고심하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평소 황태자와 가깝게 지내던 플뢰르 백작이 얼핏 비아냥거렸다.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으니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후견하던 영애가 그런 불미스러운 혐의로 끌려갔으니…….”

그는 몇 년 전, 공식적인 자리에서 섣불리 입을 놀렸다가 벨리아르에게 거하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다. 설핏 인상을 찌푸린 헤르먼트 후작이 그를 향해 일갈했다.

“플뢰르 백작, 확실하지 않은 말은 삼가십시오.”

“흠흠,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평민들은 정말 예언 속의 그 마녀가 나타난 것이 아니냐며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마냥 쉬쉬해서 넘어갈 사안이 아닙니다.”

“고작 눈동자 색이 특이하다고 해서 마녀로 몰아가는 것은 매우 편협한 사고입니다. 중한 일이니만큼 객관적으로 조사하고 판단해야지요. 아직 자세한 내막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소문에 휘둘리시면 평민들과 다를 게 무엇입니까.”

마지막 말이 꽤 모욕적이었는지 플뢰르 백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언성을 높였다.

“지, 지금 나를 일개 평민들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플뢰르 백작.”

보다 못한 레오니스가 나지막이 입을 열자 플뢰르 백작은 씩씩대면서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용히 있던 다른 귀족들도 구태여 말하지 않았을 뿐, 각자 둘의 생각에 동조하고 있었다.

“전하, 중요한 사안인 만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곤란하니 이대로 진행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말을 꺼낸 이 역시 황태자의 측근이었다. 레오니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바쁜 시간을 헛되게 흘려보낼 수는 없으니, 이대로 회의를 시작하겠소.”

벨리아르 공작이 참석하지 않는다면 황태자에게 상황은 더 유리했다. 그럼 훨씬 수월하게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으니. 귀족들은 침묵함으로써 동의를 표했다.

“전하, 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시게 된 정황을 조사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저희에게도 진행 상황을 전달해 주시기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레오니스는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로써 정말 벨리아르 공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시작점이라고 생각하니 흥분에 뛰기 시작하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는 엄중한 목소리로 시작을 열었다.

“황제 폐하의 사인은…… 독살이오.”

“예? 그, 그것이 진정 사실이란 말입니까?”

“어찌 그런 악독한 일이……!”

“그럼 누군가 폐하의 음식에 독을 탔다는 것입니까?”

조용하던 장내가 삽시간에 술렁였다. 레오니스가 한쪽 손을 들며 다시 말을 잇자, 귀족들은 재빨리 입을 다물곤 그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날 연회에서 변을 당한 귀족들 역시 같은 독에 사망한 것으로 판명 났소.”

“허어, 어찌 이런 일이…….”

곳곳에서 탄식이 흘렀다. 그날 죽은 귀족들 사이에 전혀 접점은 없었으니, 여기에 있는 귀족들도 운이 나빴다면 충분히 목숨을 잃을 수 있었던 사태였다. 그 사실을 알아챘는지 다소 거친 외침이 울렸다.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한 범인은 대체 누구입니까! 당장 참형에 처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가족까지 모두 몰살하여 다시는 이런 참변이 일어나지 않도록 확실한 본보기로 삼는 것이 옳습니다.”

죽은 귀족 중에는 누군가의 친인척도 있었고 오랜 친우도 있었기에 이들은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조사해 본 결과, 애석하게도 황궁 주방에서 허드렛일하는 사용인 중 한 명이 범인인 것으로 드러났소.”

“어찌 그런!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참혹한 일을 저질렀답니까?”

“가족 중 한 명이 귀족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한 후로 그에 반심을 품고 일을 벌인 것 같소.”

레오니스는 원래 계획했던 것을 입 밖으로 술술 내뱉었다. 여기다가 한 가지를 더 얹을 생각이었다.

“그럼, 그 남작 영애의 혐의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귀족들이 귀를 바짝 기울였다. 황제와 귀족들을 상대로 평민이 독을 탔다는 것은 상당히 분노할 일이었으나, 그보다 더욱 궁금한 건 벨라에 대한 조사 결과였다.

과연 그녀가 정말 마녀일지, 혹은 마녀 같은 짓을 한 것일지. 내색하진 않았지만 대다수가 평민들과 다를 것 없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귀족들의 모습에 레오니스는 애써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진 않소. 범인의 말로는 원래는 황제 폐하까지 해할 생각은 없었으나, 그 영애가 사주한 일이라고 하오.”

“그런 망측한……!”

“남작 영애가 그런 일을 벌인 이유는 무엇인지 밝혀내셨습니까?”

“아직 남작 영애가 입을 열지 않고 있어 정확한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소. 하지만, 곧 죄가 모두 밝혀질 테지.”

“그럼…… 벨리아르 공작도 이 일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그건…….”

레오니스가 섣불리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침묵이 더 큰 의미를 가질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것 보십시오. 제가 무어라 했습니까. 피후견인이 그런 일을 저질렀는데 어찌 벨리아르 공작도 무관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말하지 않아도 뻔합니다!”

“하긴……. 공작을 둘러싸고 무수한 소문이 있지 않습니까. 갑작스레 그 영애의 후견인이 된 것도 이상했는데,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깁니다.”

“오래전부터 마녀와 결탁했을 수도 있는 일이지요. 벨리아르 공작에겐 일반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귀족들의 술렁임이 더욱 거세졌다. 그중에서 벨리아르 공작에게 반발심을 품은 채 황태자와 가깝게 지냈던 귀족들은 이때다 싶어 그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반면 사안이 사안인지라, 벨리아르와 가깝게 지내던 귀족들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여론이 거세게 기우는 것을 보며 레오니스는 새어 나오려는 미소를 애써 삼켜야 했다.

“그래서, 나라의 불안한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중대한 결단을 내리고자 하오.”

아버지는 아둔하게도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벨리아르 공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황좌에 오른다면 그런 치욕스러운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제국의 가장 높은 자리인 황좌를 더 이상 비워 둘 수 없다고 판단하였소. 하여──.”

그 순간, 회의장의 거대한 문이 열리며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당당한 걸음걸이며 자연스레 풍기는 위압적인 분위기에 장내의 모두는 순간 그에게 멍하니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벨리아르 공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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