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벨라는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억눌렀다. 험한 분위기에 어느 정도는 각오했다지만, 그럼에도 참기 버거운 아픔이었다.
흐려진 눈앞으로 황태자의 구둣발이 명멸했다. 그는 자신을 밟아 짓이기는 것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절대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제게 바라시는 것이 오로지 그런 답뿐이라면, 저는 더 이상 전하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더 이상 황태자에게 제 결백을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제게 들어야 할 답을 이미 정해 놓았으니.
그녀의 눈빛에서 체념을 엿본 레오니스는 비릿하게 웃었다.
‘벨리아르 공작이 아니면 아무런 힘도 없는 주제에.’
그에게 이런 여자 하나 짓밟는 것쯤은 활시위를 당기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공작과 달리, 보통의 사람들에겐 쥐고 흔들 수 있는 약점이 아주 많았다.
“베일리 남작가라고 했지. 잘 생각해. 그대가 이리 버틴다고 해서 혼자 짊어지고 갈 수 있는 무게가 아니야. 공작의 후견을 받으며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지내다 보니 고향에 있는 가족들은 잊은 건가?”
역시나. 가족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가 원하는 대로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 다시금 절박함이 깃들었다.
“그분들은 이 일과 관련이 없잖아요! 여, 연을 끊은 분들이에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은 건들지 마세요, 네?”
진짜 가족도 아닌 데다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으나, 자신 때문에 무관한 사람들이 해를 당하는 것은 차마 견딜 수 없었다.
레오니스는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아 간절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벨라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턱을 쥐니 가녀린 뼈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난 이래서 멍청한 것들이 싫어. 내가 지금 그대의 말을 들어 주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 같나?”
레오니스는 다시 한번 벨라의 뺨을 내리쳤다. 살이 찢겨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 새로 참지 못한 옅은 신음이 흘렀다.
“흐윽…….”
“내가 네게 듣고 싶은 말은 단 하나야. 이 모든 것은 벨리아르 공작이 사주한 일이다. 그 말이 나오기 전까진 상황이 달라지지 않아.”
생리적인 아픔에 금방이라도 눈물샘이 터질 듯했다. 인정사정없이 얻어맞은 뺨은 아릿하게 부풀어 올라 열감으로 화끈거렸다.
당장 눈물을 터트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지만, 벨라는 필사적으로 입술을 꽉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눈물을 보이는 순간 황태자에게 굴복하는 것 같아 절대 울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저는, 저는 못 합니다, 전하.”
볼 안쪽의 연한 살도 터졌는지 혀를 움직일 때마다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그 말을 들은 레오니스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미련하긴! 그렇게 버텨서 도대체 네게 남는 게 무엇이지? 그런다고 공작이 잘했다 칭찬이라도 해 줄 것 같나? 어차피 그 입을 열지 않으면 공작의 발끝조차 보지 못하고 죽게 될 거다.”
그가 거세게 턱을 쥐고 들어 올렸지만, 온갖 곳에서 고통이 밀려오는 탓에 그녀로서는 세세하게 아픔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벨라는 어둠이 스미어 아른거리는 눈동자로 레오니스의 표정을 천천히 살폈다. 그러자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대체 무엇이 그리 초조하고 불안할까.
그의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감정이 어쩌면 저보다 더 격하다고 느껴졌다. 얼핏,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스칠 만큼.
“……전하께선, 그리 가진 게 없으십니까? 그러니 고작 저 하나를 이렇게 붙잡고 계시는 거겠지요. 설령 제 입에서 그런 자백이 나온다 한들…… 전하께선 절대 공작님을 무너트리지 못할 겁니다.”
벨리아르 공작은 겨우 이런 일로 무너질 사람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어떤 패를 더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는 절대 그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에겐 자신이라는 존재가 조금의 약점도 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아프지만 인정해야 했다. 벨리아르 공작에게 자신은 그저 흥미롭고 보기 좋은 인형일 뿐이니까. 그런 인형을 붙들고 윽박지르는 황태자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레오니스가 차갑게 표정을 굳힌 채 조소했다. 그녀가 내뱉은 말들이 날카롭게 신경을 긁어 댄 탓이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싸늘하게 내리깐 시선엔 숨길 수 없는 분노와 경멸이 들끓었다.
“……아주 건방진 말을 지껄이는구나. 나를 자극해 화를 부추길 생각이었다면 성공이다.”
그의 발이 가차 없이 벨라의 배를 걷어찼다. 무자비한 폭력에 눈앞에 번쩍 튀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이렇게 맞다 보니, 벨라는 애석하게도 제 처지를 상기했다. 고운 옷을 입고 귀한 아가씨 흉내를 내며 지내다 보니까 그사이 제 삶이 어땠는지 금방 잊은 모양이다. 자신은 늘 하늘보다 땅에 가까웠다. 바닥에 구르고 짓밟히고, 온갖 멸시를 받는 것이 당연했는데.
그러니 지금의 이런 상황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늘 견뎌 왔던 것인데 오늘이라고 다를까. 그저, 오랜만이라 조금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뿐이었다.
“으흑.”
레오니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꾸역꾸역 울음을 참는 모습에 더욱 화가 뻗친 그는 다시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때, 누군가 다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전하.”
레오니스의 보좌관인 워렌이었다.
“급히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지? 웬만한 일 아니면 네가 알아서 처리해.”
“폐하께서…….”
황제와 관련된 이야기에 레오니스는 벨라를 손에서 놓으며 몸을 틀었다. 이미 한계까지 부닥쳤던 벨라는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승하하셨습니다.”
묵직하게 전해지는 소식에 벨라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황제가 죽었다니. 안 그래도 그녀를 짓누르던 무게가 더없이 무거워졌다.
레오니스는 바닥에 널브러진 벨라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입매를 비틀었다.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차분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 베일리 남작과 그 식솔들을 모두 압송해 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니까, 그때까지 잘 생각해 보도록 해. 무엇이 가장 깔끔하고 편한 길일지.”
레오니스가 자리를 뜨고, 공허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벨라는 그제야 조용히 울음을 터트렸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 * *
보통 그는 시간에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었으나 벨라를 내어 준 후로는 조금의 틈도 없이 시간을 잘게 나누었다. 최대한 빠르게 일을 끝내려면 쉼 없이 움직여야 했다.
낮에는 바깥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프리스틴을 만났고, 저녁엔 황제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모든 상황이 급격히 치닫고 있다. 그만큼 벨라에게 가해지는 압박도 거세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깊은 새벽, 그는 에릭에게 무언가를 지시해 놓고 지하 감옥의 가장 깊은 곳으로 발을 디뎠다.
벨리아르가 모습을 드러내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 두 명이 긴장에 몸을 굳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기사들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열어.”
지하 감옥 안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죄송합니다, 각하.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황태자 전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그 명도 네 목이 붙어 있을 때나 유효한 거지.”
나른한 압박에 기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각하.”
기실 이곳을 지키는 기사들의 가장 큰 걱정은 하나였다.
제발 벨리아르 공작이 찾아오는 일이 없기를. 찾아오더라도, 그것이 제가 있을 때는 아니길.
“왜, 내가 못 할 것 같나? 지하에 있으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본데.”
기사는 오래전부터 대륙 전역에 퍼진 말을 곱씹었다.
벨리아르 공작의 오만은 하늘을 찌르고, 인내심은 바닥을 긴다.
여기서 더 버텼다간 제 목 역시 바닥에 나뒹굴고 말리라. 그를 본 순간부터 두 기사는 같은 생각을 했다. 차마 그를 막을 순 없으리라고.
결국, 기사들은 조용히 비켜서며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문을 넘은 그는 이어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열쇠.”
기사가 또 한 번 망설이자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급격히 분위기가 얼어붙자 다른 기사가 열쇠를 가진 기사에게 눈짓했다. 결국 무엇보다 소중한 건 목숨이었기에 열쇠는 순순히 그의 손으로 넘어갔다.
고요한 지하에 그의 발소리가 울렸다. 벨리아르는 차분한 걸음으로 철장을 향해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귀에 거슬리는 소음일 텐데도 바닥에 쓰러진 그녀에게선 미동조차 없었다.
그는 안쪽으로 들어가 그녀의 곁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옅은 숨소리가 들렸다.
벨리아르의 손이 천천히 그녀를 훑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옆으로 넘기자 빨갛게 부어오른 뺨이 선연하게 드러났다. 상처 난 입술 역시 흉하게 피딱지가 앉아 마르고 갈라진 채였다.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드레스 자락을 젖혀 올렸다. 몸 곳곳에도 잔혹한 폭력의 흔적이 가득했다. 그의 입에서 느른한 숨이 샜다.
몸의 상처를 꼼꼼히 확인한 그는 이내 벨라의 뺨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그녀의 모습을 담는 붉은 눈동자가 더없이 짙었다.
“정말 요령이라곤 없지. 이럴 때 일어나야지. 일어나서, 누가 이랬다고 일러바쳐야 할 거 아니야.”
조용히 모습만 보고 가려 했다. 이리 말을 붙이는 것도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그녀의 상태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두 눈으로 확인한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컸다.
이렇게 상처 하나하나가 불씨가 되어 옮겨붙을 줄 알았겠나. 이럴 줄 알았다면 감히 건드리지 못하도록 진작에 황태자의 손과 발 정도는 꺾어 놓았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베어 몸을 피로 적신다면 이 화가 조금은 가라앉을까. 다시 대륙을 뒤엎어 역사를 바꾸는 것쯤은 그에겐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더…… 기분이 개 같네.”
가슴속 깊이 치미는 감정이 무엇인 줄 알지만, 인정하고 정의하긴 싫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제 것을 마땅히 이용했을 뿐인데, 그것을 후회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
그저 이런 마음이 들게 한 원인을 잡아 족치면 되는 것이다. 깔끔하게 죽여 줄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을 느끼며 최대한 서서히 죽어 가기를. 반드시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는 그것이 벨라의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줄 가장 적당한 방법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