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피후견인이 이런 사태에 휘말렸다면, 보통은 후견인 역시 몸을 사리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렇게 도리어 일을 조사하겠다고 나서는 건 다분히 벨리아르 공작다운 모습이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귀족 영애 하나 잡아가는 건 당연하고 간단한 일이었지만, 아무도 벨리아르 공작마저 이 사태와 엮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게 칼을 들이민다는 것은, 어쩌면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건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제가 영애를 빼내기 위해 거짓된 증거라도 들고 올까 봐 그러는 겁니까? 어차피 그건 누가 가져오든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거짓이라면 밝혀지겠죠.”
“하지만…….”
“제가 아끼는 영애인데, 발 벗고 나서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폐하와 관련된 일이니만큼 다양한 방면으로 엄중히 조사해야지요.”
레오니스는 조용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이럴 때일수록 머릿속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것이 중요했다. 절대, 저 악마의 속삭임에 휘말려선 안 된다.
벨라에게 초대장을 보낸 것은 자신이었지만, 그녀가 저리 황제의 곁에 바짝 붙어 있는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레오니스는 그 모습을 보고서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저 영애가 계속 곁에 있다가 황제가 쓰러진다면…….’
그때 저 영애를 압박해 자백을 받아 낸다면 벨리아르 공작까지도 함께 엮을 수 있다. 설령 그 방법이 통하지 않더라도 그리 손해는 아니었다.
원래는 귀족들에게 원한을 품은 이가 노리고 벌인 범죄인 것으로 완벽히 꾸며 놓았으니, 그때 돼서 진범을 내세우면 될 일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벨리아르 공작이 무언가 실마리를 잡기 전에 먼저 남작 영애의 입에서 자백을 받아 내는 것이지만, 그게 힘들다면 빠르게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하지만, 베일리 남작 영애에게서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정황이 나온다면…… 공께서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벨리아르 공작이 그 영애를 상당히 아낀다고 들었다. 그러니 남들 앞에 보이는 것도 싫어서 그리 꼭꼭 숨겨 두었던 것이겠지. 그런 영애를 그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에 처박아 두고 과연 언제까지 침착할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레오니스는 아무리 벨리아르 공작이라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감정은 있을 것이라 믿었다.
* * *
“저기요, 잠시만요!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네?”
쾅――!
벨라의 간절한 말에도 거대한 철문은 단호하게 닫혔다. 기사들은 아무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철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사라졌다.
벨라는 황망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빛 한 줌 들지 않는 이곳은 수많은 계단을 밟아 내려가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가장 무거운 죄를 지은 죄인들만 가둬 놓는, 황궁 지하 감옥의 제일 깊숙한 곳이었다.
계단 위에 따로 문이 있었기에 철장 앞을 지키는 기사는 따로 없었다. 어둠 속에 완벽히 홀로 갇힌 것이다.
고요한 지하 감옥에 가만히 서 있으니 아직도 귓가로 연회장의 소란스럽던 소리가 아득히 맴돌았다. 눈앞엔 황제가 쓰러지는 모습이 선연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무감하게 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었다.
결국 벨라는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이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차갑고 어두운 감옥 안에서 조금이라도 안도를 얻으려 구석으로 기어갔다. 벨라는 버릇처럼 몸을 웅크려 무릎을 끌어안았다.
황제 시해 혐의를 뒤집어쓴 것은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절대 그러한 사실이 없으니까. 언젠가 자신의 무죄가 밝혀질 것이고,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모두 그의 손에 달린 일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결백하다고 말해 봤자 들어 주는 사람은 없을 테니. 거기서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이런 방법으로 자신을 버린 것이라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일부러 황제 곁에 둔 것이라면…….
‘하지만, 왜…….’
마땅한 이유가 없으니 그건 억지스러운 망상임을 안다. 알지만……. 때때론 알고 있어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그래. 나중에 베른으로 돌아가면, 바다 보러 가자. 모래 잔뜩 있는 사막도 가고.”
그의 목소리, 표정, 눈빛, 모든 것이 생생하게 떠올라 벨라를 괴롭혀 댔다.
* * *
“최대한 황제 쪽에 우호적인 기사들로 배치하려고 했지만, 황태자의 의지가 굳건하다 보니 그리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낮에 들르기엔 힘들 것 같고, 새벽마다 제가 살피겠습니다.”
“그래.”
에릭의 보고에 벨리아르는 짧게 답했다. 언뜻 그의 눈치를 살핀 에릭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셔야 할 듯싶습니다. 시간을 오래 끌수록 아가씨께서 힘들어지실 겁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지금은 유독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유추하기 어려웠다. 벨라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어지럽진 않을까 걱정했으나 그는 담담하게 해야 할 일을 지시할 뿐이었다.
“황녀에게 내일 만나자고 연락해.”
“예, 알겠습니다.”
“내가 움직이는 동안 너는 황태자가 사주한 인물을 찾도록 하고. 조금이라도 빠져나갈 틈을 줘선 안 되니까.”
“맡겨 두십시오. 신경 쓰이는 일 없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벨리아르는 이후로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섣불리 말을 걸기 어려운 분위기라 에릭 역시 조용히 뒤를 따랐다. 그러나 잠시 후, 그가 걸음을 멈추곤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예, 말씀하십시오.”
“가장 아름다운 바다가 어딘지, 알아봐.”
에릭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벨라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아차렸다. 또한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떤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 * *
빛이라곤 눈곱만큼도 들지 않으니 시간 감각이 사라졌다. 이곳에 갇힌 후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퀴퀴한 지하 냄새가 비참한 마음을 더욱 부추기는 듯했다. 벨라는 필사적으로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제발 아무 일 없이 이 깜깜한 시간이 지나가길 빌었지만, 그건 헛된 희망에 불과했다.
멀리서 말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여럿이 계단을 밟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벨라는 본능적으로 몸을 굳히며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잠시 후, 철장 앞으로 다가온 황태자에게선 기분 나쁜 중압감이 밀려왔다.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벨라를 내려다보며 뒤에 선 기사들에게 명했다.
“영애에게 직접 물을 것이 있으니 모두 물러나도록.”
기사들이 물러나자 레오니스는 손에 든 열쇠로 철문을 열고 들어왔다. 벨라는 불안한 마음에 뒤로 물러나면서도 필사적으로 입을 움직였다.
“……전하, 저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요. 제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제발, 제발 믿어 주세요.”
황제가 쓰러졌으니 황태자로서는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 당연했다. 벨라 역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는 자신을 몰아갈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그녀는 차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영애,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나 보군. 물론, 이 안에 갇혀 있으니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거리는지 듣지 못했겠지.”
짙은 어둠 속에서도 그가 언뜻 내비치는 조소가 선명하게 내리꽂혔다.
“보라색 눈의 마녀가 나타나 황제를 시해하려고 했다. 황제를 죽이고, 결국은 제국을 멸망의 길로 이끌 것이다.”
벨라는 몸을 일으키며 답답한 듯 숨을 몰아쉬었다. 대체 자신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평생을 지독한 예언에 속박되어 고통받아야 하나.
“그런……. 전 정말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요! 왜, 왜 다들 눈동자 갖고만……. 저는 정말 억울해요!”
“말로는 다들 억울하다고 하지. 절대 그러지 않았다고. 하지만 증명할 길이 없지 않나. 그대의 눈동자가 보라색인 것도 사실이고, 연회에서 계속 폐하의 곁에 붙어 있던 것도 그대야.”
“그저 가벼운 대화만 나누었을 뿐이에요.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물어보시면…….”
“그 사람들은 모두 그대가 폐하께 음식을 권했다고 하던데.”
“그건……!”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아무리 결백하다고 떠들어 봤자, 주위 사람들이 저렇게 증언했다고 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그저 억울한 마음에 가슴이 답답하게 죄어 올 뿐이었다.
벨라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은 레오니스는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
“정말 공작이 그대를 빼내 주기라도 할 것 같나? 그래서 이리 버티는 거라면,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야. 그가 얼마나 냉정한 성격인지 알 텐데? 굳이 영애 하나 살리겠다고 위험을 떠안을 필요는 없지.”
그의 말과 더불어 아무 망설임 없이 자신을 내어 주던 공작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당장 반박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벨리아르 공작은 곧 베른으로 돌아갈 거야.”
제 마음을 무너트리기 위해 하는 말들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이미 헤진 마음은 날아오는 가시를 쳐 내지 못하고 하나하나 품어 버렸다.
“……저 역시, 전하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에게 기회를 주려는 거야. 잘 생각해. 공작이 시켜서 한 일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그대는 살 수 있어.”
이제야 황태자가 의도를 드러냈다. 왜 굳이 자신을 이 사건과 엮었는지도 깨달았다. 그의 목적은 벨리아르 공작이었다. 그를 무너트리기 위해, 자신을 미끼로 삼은 것이다.
“……전하께서는 사람 간의 신의를 쉽게 저버리는 분이시군요.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그렇게 말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설령 그가 정말 자신을 버리는 선택을 했더라도, 절대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벨라가 굳센 눈빛으로 마주 보자 레오니스는 대놓고 비소를 내비쳤다. 이리 갇힌 처지에 제게 울며 빌어도 모자랄 판에, 저런 맹랑한 눈빛이라니.
좋게 말로 하니 상황 파악이 잘되지 않는 모양이다. 사람을 굴복시키는 데엔 쉽고 편리한 방법이 있었다. 레오니스는 곧바로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
짜악――!
날카로운 마찰음이 널리 퍼져 나갔다. 뺨을 얻어맞고 바닥에 쓰러지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이 더욱 그의 화를 부추겼다.
“과연 그럴까? 귀족 영애로 곱게 자라서 모르나 본데, 사람의 마음은 생각보다 간사해. 당장 주어지는 고통 앞에서 그런 알량한 신의를 언제까지 내세울 수 있을까 궁금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