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벨리아르 공이 짓궂은 면이 있지.”
여전히 얼어 있는 벨라에게 황제가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머릿속이 엉망이었던 벨라는 당황해하며 입만 벙긋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황제는 편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하하, 편하게 말해도 되네. 공의 성격이야 내 아주 잘 알고 있으니. 이럴 때 아니면 영애가 언제 속풀이를 하겠는가.”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덕분에 한없이 높아 보이던 황제 앞에서 조금은 편히 입을 열 수 있게 되었다. 벨라는 눈치를 살피며 살며시 맞장구를 쳤다.
“네, 조금…….”
“그래, 가끔은 그렇게 속마음도 내뱉고 해야 화병이 나지 않아.”
황제가 장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마치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것 같아 벨라는 수줍게 웃었다.
“폐하께서도 공작님에게 불만이 많으세요?”
그녀의 물음에 황제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괜스레 주위를 살피는 척을 했다. 그러고는 엄청난 비밀이라도 말하는 듯 은밀히 속삭였다.
“그 얘기를 시작하자면 오늘 연회가 터무니없이 짧은 정도지.”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하시려나 싶어 열심히 귀를 기울이던 벨라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제야 긴장이 확 풀리며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녀를 편하게 만들어 주려는 황제의 무던한 노력이 통한 것이다. 황제는 평소처럼 인자한 미소를 곁들인 채 물었다.
“수도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베른보다 따뜻해서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볼 것도 많고요. 건국제도 즐거워요.”
사실 수도에 와서 달라진 점이라곤 침실에서 보이는 바깥 풍경뿐이었다. 낮에 햇살이 내려앉아 수없이 반짝이는 강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
고작 그런 것을 말할 순 없어 대충 얼버무렸다. 건국제를 즐긴다는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무지개 중 하나였다.
“저번에 보니까 무언가를 잘 먹지 않던데,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가?”
연회의 음식들도 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것들일 텐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으려니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낮에 식사를 조금 많이 했더니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아서요.”
“짐은 요즘 들어 이런 달달한 것에 맛을 들였지 뭔가.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했는지 영 힘이 없는데, 이런 디저트를 먹으면 그래도 좀 낫더군.”
“다행입니다, 폐하.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저도 기분이 좋아요.”
벨라는 황제가 여러 디저트를 맛볼 수 있도록 멀리 있는 것을 가져와 그의 앞으로 놓아주었다. 눈으로만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벨라의 눈엔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고, 남이 주는 거 덥석 받아먹지도 말고. 알아들어?”
그냥 아무것도 먹지 말라는 소리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앞서 둘러댄 것처럼 낮에 식사를 든든히 하고 오는 건데. 어쩐지 소렐 부인이 자꾸 음식을 권한다 했다.
벨라는 장식처럼 들고 있는 잔을 만지작거렸다. 황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저도 모르게 입으로 가져갈 뻔했지만, 곧바로 그의 서슬 퍼런 눈매가 떠올랐다. 결국 나중엔 아예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밀어 놓았다.
황제와 담소를 나누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지루한 연회가 어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대화에 빠져들 정도였으니. 그러나 점점 황제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벨라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폐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
“음, 디저트를 너무 많이 먹었는지 속이 좀 불편하군. 크게 걱정할 것 없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황제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선연했다. 혹시 체기가 있으신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그저 속으로만 삼켜야 했다.
벨라는 버릇처럼 벨리아르 공작의 모습을 찾아 연회장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러다 언뜻 황태자와 눈길이 스쳤다. 순간 인사를 올려야 하나 싶었으나,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그는 찰나에 시선을 거두어 버렸다.
“윽…….”
그때, 황제가 배를 감싸며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어느새 식은땀까지 송골송골 맺힌 모습에 벨라는 다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부축했다.
“폐하, 정말 괜찮으세요?”
“괘, 괜찮네. 영애, 조용히 가서 의사를…….”
황제는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최대한 일을 크게 벌이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
“네, 제가 얼른 불러올 테니 잠시만――.”
“커흑!”
그 순간, 황제가 더욱 괴로운 듯 숨을 꺽꺽거리더니 목을 부여잡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폐하!”
샴페인 잔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와 벨라의 새된 비명이 한데 섞여 홀 전체를 울렸다. 잔잔하게 흐르던 음악이 멈추고,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서 의사를 불러! 폐하께서 쓰러지셨다!”
누군가 다급히 소리치는 소리가 아득히 귓가를 울렸다. 벨라의 머릿속엔 오로지 황제의 안위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황녀 역시 소식을 듣고선 한달음에 달려왔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는지, 프리스틴의 표정과 목소리엔 걱정이 한가득 묻어나왔다.
“폐하, 폐하!”
그때, 일사불란한 발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기사들을 대동한 황태자가 나타나자 몰려 있던 사람들은 길을 터 주었다. 벨라 역시 기사들의 기세에 밀려 황제의 곁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순간, 좋지 않은 예감이 온몸을 서늘하게 휘감았다. 벨라는 고개를 들어 다급히 주위를 살폈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필사적으로 벨리아르의 모습을 찾아 헤맸다.
그가 와 준다면, 지금 상황을 말끔히 해결해 줄 것만 같았다. 황제가 그저 단순히 기력이 쇠해 쓰러진 것뿐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상황을 정리하고 저를 달래 주길 바랐다.
그러나 엉망으로 흔들리는 시야엔 그토록 원하는 얼굴이 도통 보이지 않았다.
“여기, 여기도 사람이 쓰러졌어요!”
황제뿐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귀족들이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순식간에 연회장의 분위기가 아비규환에 빠져들었다.
사람들이 다급히 소리치며 바삐 움직이는 사이에서 벨라는 멍하니 황제가 쓰러진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벨라를 보며 기사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뒤이어 기사 여럿이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위협적인 태도에 벨라는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이미 뒤쪽으로도 기사들이 에워싼 상태였다.
“실례합니다, 영애. 영애께선 저희와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지금 벌어진 일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니 협조해 주시지요.”
“네? 그게 무슨……. 어떤 조사가 필요하시다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황제를 모시라 지시한 레오니스는 벨라의 앞으로 다가왔다. 전에 봤을 때와 달리, 냉담한 시선이 그녀를 꿰뚫었다.
“폐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그 곁엔 쭉 영애가 있었고요. 폐하의 안위가 상한 것에 불순한 의도가 있었는지 조사가 필요한 것은 당연합니다.”
다른 귀족들도 같은 증상을 보였으나, 황제가 쓰러진 것과 귀족이 쓰러진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레오니스는 그 점을 꼬집어 그녀를 용의자로 지목한 것이다.
“영애를 데려가.”
그의 지시에 기사들이 곧바로 벨라를 붙잡았다.
“자, 잠시만요!”
뭔가가 잘못됐다. 지금 이렇게 끌려가면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뭐라 반박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그저 새하얬다. 그때, 소란스럽던 주위가 사뭇 가라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익숙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벨라의 눈동자가 빠르게 물기에 잠겼다. 사람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벨리아르를 보고서 벨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존재만으로 안도가 밀려와 거세게 날뛰는 가슴을 진정시켜 주었다.
그의 물음에 레오니스가 상황을 정리해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실 때, 이 영애가 지척에 있었습니다.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는 목적이었을 수도 있으니 투옥하여 조사하려 합니다.”
직접적으로 들으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했다니. 벨라는 그를 향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공작님! 제가 그럴 리 없잖아요. 저는 정말 폐하와 대화만 나누었을 뿐이에요. 절대 그런 일은 없어요, 공작님…….”
벨리아르는 간절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벨라를 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의심되는 정황이 있다면 조사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공작님……!”
그가 자신을 투옥해도 좋다고 허락한 것이다. 어찌,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만은 제 결백을 알아주어야 했다. 애초에 황제의 곁에 자신을 홀로 두고 사라진 것도 그였다. 그런데, 어째서…….
벨라는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이 꿈이라면 이보다 더 지독한 악몽은 없을 것이다.
저를 향하는 붉은 눈동자에선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을 어찌할 수 없어 답답하다는 심경이라도 내비쳤다면, 그렇다면 그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공작님, 공작님!”
애처롭게 그를 부르는 벨라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벨리아르는 그녀가 기사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에서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벨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 그의 눈동자가 레오니스를 향했다.
“제 피후견인이 연루된 일이니, 제가 직접 이 일을 조사하겠습니다.”
레오니스는 사뭇 눈가를 찌푸리며 이를 꽉 사리물었다. 애초에 공작의 의도는 이것이었나. 기어코 자신의 피후견인을 맹수의 눈앞에 던져 놓고 미끼로 쓴 것이다.
사람들이 벨리아르 공작을 향해 인간의 가면을 쓴 악마라고 칭하는 이유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