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 벨라는 잠시 긴장도 잊은 채 맞은편에 앉은 그의 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평소에도 멋있었지만, 정복으로 차려입은 오늘은 더욱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그러다 순간 타이밍을 놓쳐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반듯한 입매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그렇게 훔쳐보는 버릇은 어디서 배웠어?”
오늘따라 나직한 목소리마저 더욱 심장을 쥐고 흔드는 듯했다. 그가 두렵기 때문인지, 여전히 그의 앞에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오늘, 멋있으셔서요.”
“오늘만?”
“어제도…….”
괜스레 부끄러운 마음에 점점 뺨으로 열이 올랐다. 수그러든 고개 위로 인위적인 탄식이 흘렀다.
“아아. 나는 네 눈에 이틀만 멋있었던 모양이구나. 앞으로 분발해야겠네.”
놀리려 한 말임을 알았으나 벨라는 저도 모르게 얼른 변명을 끄집어냈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공작님은…… 늘 멋있으세요.”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벨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소렐 부인에게 중요한 날이니 그녀의 치장에 특별히 신경 쓰라고 지시했었다.
덕분에 오늘 벨라는 정말 별이 가득 박힌 밤하늘처럼 반짝였다. 하지만 그는 그 빛이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벨라.”
“네?”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음, 잘 모르겠어요.”
“요령 없는 건 여전하지. 이럴 땐 뭐든 달라고 말하는 거야. 값비싼 보석이든, 이 세상에 하나뿐인 귀한 것이든.”
뭐든 말하면 구해다 줄 텐데, 그녀는 뭐 하나 달라고 청하는 게 없었다. 벨리아르는 그 미련한 태도가 가끔은 답답했다. 조금은 약게 굴어도 귀엽게 봐줄 텐데 말이다.
“저는 딱히 그런 게 필요하지 않아요.”
“그저 살려 놓고 버리지만 않으면 돼?”
벨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해 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살고 싶었고, 이젠 그에게 버려지는 것이 가장 두렵다. 벨리아르는 짧게 조소했다.
“키우기 쉽네.”
벨라는 가끔 그가 가시 돋친 장미 같다고 생각했다. 보는 사람의 심장을 움켜쥘 정도로 짙붉은 색의 고혹적인 장미. 장미는 한없이 아름답지만, 줄기에서 돋아난 가시는 가차 없이 따끔했다. 그가 한 번씩 내던지는 말들이 그러했다.
“……아, 그럼 갖고 싶은 거 말고…… 보고 싶은 건 있어요.”
“말해 봐.”
정말 무심코 떠오른 것이었다. 문득 엘리아스가 보내 준 그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중에서 푸른 바다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정말 그림처럼 끝없이 물이 담겨 있을까? 본 적이 없으니 감히 상상하기에도 벅찼다.
“바다요. 바다가 보고 싶어요.”
“바다?”
“……네. 바다 아니면 사막도 좋아요. 저번에 모래시계를 선물해 주셨던 그 사막이요.”
벨리아르는 턱 끝을 매만지며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잠시 이어지는 침묵에 괜스레 초조해진 벨라는 살며시 말을 덧붙였다.
“그냥 한번 해 본 소리예요. 굳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정말 그가 바다에 데려가 줄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다. 그런 것을 바랄 처지도 아니었고. 역시 괜한 말을 꺼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래서 뒤이은 그의 말에 더욱 놀라고 말았다.
“그래. 나중에 베른으로 돌아가면 바다 보러 가자. 모래 잔뜩 있는 사막도 가고.”
“정말요?”
“응.”
그는 짧게 대답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림으로만 본 광경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설렘에 들뜬 나머지, 벨라는 그의 표정이 어땠는지 미처 살피지 못했다.
* * *
오늘 파티의 주인공은 단연 프리스틴 황녀였다. 값비싼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그 모습이 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고귀한 황족의 품위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전하, 오늘 너무 아름다우세요.”
“역시 제국에서 전하의 미모를 따라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그녀의 자태에 감탄하며 칭찬했다. 그러나 그 주목이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어머, 저기 좀 봐요.”
“벨리아르 공작 곁에 있는 저 영애가 그 소문의 마녀라는 거죠?”
“쉿, 목소리 낮춰요. 그렇게 부르다가 공작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이라고요.”
뒤늦게 등장한 벨리아르 공작의 존재감이 대단했던 탓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곁에 선 베일리 남작 영애에게 모조리 눈길을 빼앗기고 말았다.
“……하.”
그 모습을 보며 프리스틴은 조용히 헛웃음을 내비쳤다. 당장 공작의 앞으로 다가가 보란 듯이 인사를 건네 볼까 했으나, 그녀는 곧 둘에게서 아예 눈길을 거둬 버렸다.
한편, 쏟아지는 시선이 버거웠던 벨라는 저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꽉 그러쥐었다. 마음 같아선 그의 너른 등 뒤로 완전히 숨어들고 싶었다. 그러나 벨리아르는 그녀의 손을 쳐 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벨라, 숨지 말고 당당하게 굴어. 여기서 너를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네.”
“그렇다고 혼자 돌아다닐 생각은 말고. 사람들에게 굳이 널 소개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저 내 곁에 붙어 있기만 해. 잘할 수 있지?”
“네, 걱정하지 마세요.”
사람들에게 소개하지 않는다는 말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녀는 오늘 최대한 말없이 시간만 보내다가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였다. 귀족들과 말을 섞는 것은 그 무엇보다 어렵고 고된 일이었다.
그가 숨지 말라고 했지만, 벨라는 버릇처럼 그의 등 뒤로 섰다. 다행히 구석 쪽이었기에 이렇게 있으면 사람들의 시선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 있든 벨리아르 공작은 관심의 대상이었기에 끊임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오랜만입니다, 벨리아르 공. 의회에서 뵌 이후로는 처음이네요. 이리 인사를 건넬 기회가 생겨서 다행입니다.”
그에게 서글서글한 인사를 건네며 다가오는 사람은 캐링턴 백작이었다. 부드러운 인상처럼 유한 성품으로 평판이 훌륭한 자였다. 벨리아르는 미소를 곁들인 채 기꺼이 그를 맞이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좋은 소식이 들려오던데요.”
캐링턴 백작가에 헤르먼트 후작가가 구혼장을 보냈다는 것은 누구든 알 만큼 떠들썩한 이야기였다. 서로 명망 높고 유서 깊은 가문이었기에 혼사는 평탄하게 진행되었다.
“하하, 아닙니다. 딸아이가 아직 부족한 것이 많은지라 헤르먼트 가문에 누가 되진 않을지 걱정입니다.”
“캐링턴 영애는 심성이 곱고 영특하니 잘 해낼 겁니다.”
“감사합니다. 공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힘이 되는군요.”
캐링턴 백작이 자연스레 그의 뒤를 흘끗거렸다. 사실 그에게 다가오는 많은 사람 중 대부분은 벨라에 대한 호기심이 있을 것이다. 캐링턴 백작도 차마 그 호기심을 억누를 순 없었는지 넌지시 운을 띄웠다.
“혼사를 진행하는 것이 이리 힘든 일일 줄 몰랐습니다. 가문끼리 연을 잇는다는 게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더군요. 공께서도 내년쯤엔 제 고민을 이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그런 때가 오면 백작께 조언을 구해도 되겠습니까?”
그녀를 소개해 달라는 뜻이 명백했으나 벨리아르는 부드러운 미소를 곁들이며 결코 답을 내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사교계에 데뷔하지도 않은 영애를 대놓고 소개해 달라고 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캐링턴 백작은 순순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현명한 그는 벨리아르 공작이 웃는 낯으로 얘기한다고 해서 눈치 없이 계속 들이댔다간 좋은 꼴을 못 본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당연한 말씀을요. 성심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처음엔 그가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벨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흥미가 떨어졌다. 다분히 귀족스러운, 알아듣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게로 쏟아지던 시선도 차츰 잠잠해졌다. 제법 오랜 시간을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지루해진 탓에 벨라는 조금씩 주위를 살펴보았다.
보통 담소를 나누며 손에 잔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벨라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살며시 손에 쥐었다. 이어 냄새를 맡아 보다가, 한 모금 맛을 보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러 사람을 상대하다 잠시 여유가 생긴 벨리아르는 잊고 있던 벨라를 떠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땐 이미 그녀가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서 잔뜩 인상을 찌푸린 시점이었다.
그는 덩달아 미간을 좁히며 그녀의 손에서 잔을 채 갔다. 그 손길이 제법 신경질적이었기에 벨라의 어깨가 사뭇 움츠러들었다.
“이거 마셨어?”
“네, 근데 이게 조금…….”
생각했던 것보다 도수가 센 술이었는지 그리 유쾌한 맛은 아니었다. 그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곤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이리 와.”
그는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치며 바깥으로 향했다. 낯선 황궁 안을 마치 제집처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그가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널찍한 욕실이었다. 그는 벨라를 벽 쪽으로 몰아세운 뒤, 목덜미를 꾹 눌러 허리를 숙이게 했다.
“입 벌려.”
차가운 목소리에 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그러기 무섭게 그의 손가락이 들어와 목구멍까지 들이닥쳤다. 혀의 뿌리 쪽을 누르니 참을 수 없는 토기가 밀려들며 구역질이 일었다.
차마 그의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일 순 없어 필사적으로 참는데, 곧바로 질책이 이어졌다.
“참지 말고 뱉어 내.”
“우윽! 흐으, 하…….”
결국, 계속되는 자극에 속을 게워 낼 수밖에 없었다. 벨라는 그의 손이 더러워지는 것이 가장 신경 쓰였지만, 정작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아무거나 받아 처먹지.”
어쩌다 술 한 모금 마신 걸로 꾸중을 듣자니 조금 억울했으나 억지로 속을 게워 내느라 대꾸할 정신이 없었다.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고, 남이 주는 거 덥석 받아먹지도 말고. 알아들어?”
그 와중에도 그의 목소리만은 선명했기에 벨라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입 헹구고 나와.”
그는 깨끗한 물에 손을 씻은 뒤 욕실을 빠져나갔다. 벨라는 잠시 숨을 고른 다음에야 입을 헹궜다. 뒤늦게 드레스가 더러워지진 않았나 꼼꼼히 살펴보았으나 다행히 그런 흔적은 없었다.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벨라를 황제 앞으로 데리고 갔다.
“폐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마침 공이 보이지 않아 찾고 있던 참이네. 연회는 잘 즐기고 있는가?”
“예, 오랜만에 즐거운 연회군요. 황태자 전하께서 준비를 많이 하신 듯합니다.”
의례적인 인사 후, 그는 뒤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던 벨라를 제 앞으로 끌어왔다.
“저희 아가씨가 잠시 폐하의 말동무를 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 말에 뻣뻣이 굳어 있던 벨라의 눈이 조용히 휘둥그레졌다. 황제는 인자하게 웃으며 흔쾌히 수락했다.
“물론이네. 아주 반가운 일이지.”
“그럼,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그가 짧은 인사를 남기고 사라져 버린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얼떨결에 황제의 앞에 내던져진 벨라로서는 이건 아무거나 멋대로 먹은 벌인가 싶었다.
황제는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아 멍한 얼굴인 벨라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어 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친근하게 대해 준다 한들, 제 앞에 있는 사람은 제국의 황제였다.